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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너 있는 곳에서 꽃을 피워라

[소리정음] 깨끗하고 맑은 소리


너 있는 곳에서 을 피워라




[소리]로부터 이민에 대한 글을 부탁 받았을 때 사실 조금 난감했습니다. 한국을 떠나온 지 햇수로 12년이나 되었지만, 저 스스로를 ‘이민자’라고 인식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트위터의 영향인지 140자 이상의 글을 써 본 적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글쓰기와 담을 쌓고 살아왔기에 더욱 부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리]는 개인의 경험이나 느낀 점을 소중히 여긴답니다."라는 편집인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고, 제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갑작스런 떠남


thinkpananma(flickr)

보통 이민을 하려면 많은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에 비해 제 경우는 무척 갑작스럽게 진행되었습니다. 2002년, 당시 제가 근무하던 벤처회사는 한국에서의 비즈니스 부진을 미국 시장 개척을 통해 극복하고자 저를 포함한 개발팀 4명에게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출장을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정도의 기간이면 경험삼아 좋겠다는 생각에 아내와 함께 가겠다고 회사에 양해를 구해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미국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며 10년 넘게 살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2002년 추수감사절 하루 전날 미국에 도착했고, 다행히 그해 겨울에 성과가 좀 있어서 회사에서는 미국지사에서 재채용하는 형식으로 제게 취업비자(H1B)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도 ‘이민’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명확하지 않은 체류신분 때문에 겪고 있던 당장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과 여전히 몇 년 정도 경험 삼아 있어 보자는 생각으로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회사에서 구해 놓은 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함께 출장 온 동료들과 동거생활을 해야 했기에 아내가 무척 힘들어 했습니다. 제 명의로는 아파트를 빌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차가 없이는 움직이기 어려운 LA의 교통 환경 속에서 회사 소유의 차를 동료들과 나눠 써야 했기에 그것도 무척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비록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출장길에 아내와 함께 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동료들과도 불편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2003년 3월, 본격적으로 미국 지사에서 근무하게 되었지만 회사의 재정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봉급이 밀리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월세로 집을 빌려서 생활하고 있었고 저축이 가능할 만큼 여유로운 생활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활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회사가 문을 닫았고, 저희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주변 분들의 권유로 용기를 얻어 미국회사에 이력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별 성과가 없던 중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벤처회사에 채용이 되어, 2004년 1월부터 이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Permanent Resident Alien

  

새로운 직장에서는 이전 직장보다 연봉이 조금 줄었음에도 훨씬 편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미국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미국 생활에 조금 더 익숙해진 덕분이겠죠. 하지만 무척 당황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회사를 옮기면서 새로운 은행 계좌를 개설했는데, 회사에서 받은 첫 봉급 수표를 새 계좌에 입금하고 곧장 현금으로 인출하려고 하니 새로운 계좌는 2주가 지나야 인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지요. 그때그때 받는 봉급으로 생활하던 입장에서 한 번의 봉급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다행히 직장 동료에게 돈을 빌려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돈을 찾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던 순간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두 번째 회사의 재정상황도 갈수록 어려워져서 매년 10% 가까이 연봉이 삭감되었고, 봉급이 밀리는 상황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H1B비자는 혹시 회사가 문을 닫거나 회사에서 해고된 경우 미국에 체류할 수 없게 되어 바로 출국해야 합니다. 회사를 옮긴 직후에는 해고 될까봐 늘 불안했고, 회사의 재정상황이 어려워지면서는 회사가 문 닫게 될까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관리 업무 담당자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진행하였습니다. 영주권을 진행하기에는 당시 제 연봉이 너무 적어서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Tax Credits(flickr)



이렇게 영주권을 진행하게 되면서 뒤늦게 ‘이민’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영어로는 영주권 소지자를 ‘Permanent Resident Alien(영주하는 이방인)’이라고 부릅니다. 흉측한 외계인을 떠올리게도 하는 ‘alien’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성경이 떠올랐습니다. “너희도 이방인이었으니 너희 가운데 거하는 이방인들을 압제하지 말라”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말씀, 우리의 삶이 나그네의 삶이라는 베드로전서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몇 번 접해보았던 외국인 노동자들도 떠올랐습니다. 사실, 제가 바로 그 외국인 노동자였습니다.

 


뿌리째 뽑혀 옮겨심긴

  

남편 때문에 덩달아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 아내가, “뿌리째 뽑혀 옮겨심긴” 느낌이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같은 말, 같은 문화를 가진 사람들 또 가족들, 친구들을 모두 떠나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 어느 날 갑자기 정착한 뒤 겪어야 했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자리에 적응하기 위해 제가 밖에서 나름의 분투를 하는 동안, 아내는 또 아내대로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그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많은 밤 옆에 누워 소리죽여 흐느끼던 아내의 울음소리로 미루어 짐작만 할 뿐입니다.


이곳에서 만나게 된 다른 한인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기나 노동 착취 등 극심한 어려움을 당한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그 정도의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지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겪는 설움은 한국에 살 때는 생각지도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잘못한 것 하나 없어도 지나가는 경찰차를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불안해지기도 하고, 고압적인 태도의 공무원에게 속 시원하게 따져보지도 못하고 답답해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가도 이곳은 제게 여전히 남의 땅이고, 저는 남의 땅에 얹혀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한국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다보니 몸은 이곳에 있지만 늘 마음은 한국에 있는 것 같은, 일종의 자아분열적인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굵직한 일들이 터질 때마다 제 마음은 그 영향 아래에 있지만,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미국인 동료들 속에서 혼자만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한국 소식을 끊고 지금 발 딛고 살고 있는 곳에 더 집중하려고도 해보지만 태어나 자라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국으로 향하는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이런 경계인의 삶을 살다보니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 강한 자들이 아닌 약한 자들에게 향하신다는 것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주변부의 하나님, 약자의 하나님,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런 하나님을 만나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Bloom where you are planted

  

이곳에 더 있으라는 하나님의 싸인인 양 영주권을 받게 되었고, 두 번째 회사가 문을 닫기 직전에 규모가 큰 미국 회사로 이직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민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적극적으로 삶의 터전을 바꿀 만한 그런 성향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제 성향에 맞춰서 하나님이 ‘점진적으로’ 저를 이끌어 오셨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때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왜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냐고 하나님께 많이 물었습니다. 찬송가 <내 맘이 낙심되고 근심에 눌릴 때>를 부르며 찬송인지 한숨인지 모를 고백을 드릴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이 노래의 후렴처럼 “그 은혜가 내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랬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나오게 하셨고, 많이 외로웠지만 또 새로운 벗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니 정말 삶의 매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Bernhard Friess(flickr)



아내와 제가 뿌리째 뽑혀 낯선 땅에 옮겨 심겨진 삶을 고통스럽게만 생각할 때, 한 지인이 “Bloom where you are planted.”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여전히 이곳은 낯선 땅이고 오늘도 이방인의 삶이 계속 되지만, 하나님이 여기에 심으셨기에 저는 지금도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전계도│연세대93

아내(안지영, 가톨릭대94)와 딸(주은)과 함께 LA에서 살고 있다. 직장에서의 일과 교회를 섬기는 일의 ‘이중 소명’에 대해 고민하며, 어떻게든지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no.215=2014.08+09

인생은 나그네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