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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부르신 곳에서 열심히 살아갈 뿐_엄현주

[소리정음] 깨끗하고 맑은 소리


부르신 곳에서 열심히 살아갈 뿐





“어디서 왔나요?(Where are you from?)”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흔히 하는 질문이다. 어느 나라 출신이냐는 뜻이기도 하지만 어디에 사느냐는 질문에 가깝다. 이민 와서 처음에는 “한국”이라고 말했는데, 그럼 캐나다에 여행 온 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어서 요즘은 “밴쿠버”라든가 캐나다 밖에서는 “캐나다”라고 답한다. 14년 전, 나는 캐나다에 이민을 왔다. 캐나다 시민권을 받은 지도 꽤 되었으니 법적으로는 더 이상 한국사람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한국 사람이면서 동시에 캐나다 사람이다. 


내가 이민을 온 이유는 우리나라가 싫어서 혹은 돈을 벌어서 잘 살고 싶어서라거나 아니면 자식을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오직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였다. 유학생보다 이민자에게 학비가 싸다는 것이 유학이 아닌 이민을 선택한 이유다. 소위 386세대인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쭉 부산에서 살았고, 서울도 대학생이 되어서야 가보았던 지방 사람이었다. 그러니 당연하게 외국을 갈 기회도 없었고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살았다. 그러나 시대는 예측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변했고, 20세기 말에는 외국여행이 흔한 일이 되었다. 삶에는 뜻밖의 일들이 찾아오고 그 경험들이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세 번의 외국여행이 그랬다. 대학도서관에서 일하던 당시, 다른 나라의 도서관을 돌아보고 그 시스템을 배워오는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두 번에 걸쳐 호주와 일본의 도서관을 돌아보고 올 기회가 있었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겉모습만 훑고 오는 시간이었음에도 다른 문화에 대한 깊은 인상을 안고 왔다. 그리고 또 한 번은 태국에서 열린 IFES동아시아학사수련회에 참석한 것이었다. 간사님이 한국어로 통역을 해주셨지만 조별모임 때마다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 학사들과의 만남은 나 자신이 우물 안에 개구리였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 세 번의 외국 나들이를 통해 세계로 향한 눈이 열리기 시작했고 다른 나라의 도서관을 더 보고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그 당시 내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정말 하고 싶어서 전공을 바꾸어 다시 공부한 끝에 어렵게 얻은 일자리였지만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답답함이 생겼다. 그리고 혼자 나이 들어가는 딸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걱정과, ‘노처녀’에 대한 사회의 편견어린 시선도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막연하게 유학을 생각만 하던 차에 캐나다 이민 수속 중이었던 후배가 이민을 가면 유학을 가는 것보다 학비가 싸다며 이민을 알아보라고 권했다. 이주공사에 알아보니 독립이민은 점수가 안 된다고 했다. 안된다고 하자 오기가 발동해서 직접 캐나다 이민국 사이트에 들어가 살펴보니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주공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서류를 준비하여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길 기도하면서 1999년 연말에 이민 신청서류를 보냈다. 인터뷰 없이 통과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이민 심사가 시작된다는 파일번호가 오면 인터뷰 준비를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해 봄에 파일번호와 함께 인터뷰 없이 이민수속을 하라는 허가가 나왔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로 가서 살 일은 막막하고 두려웠지만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직장을 그만둔 지 열흘 만에 한국을 떠났다. 2000년 11월, 일본과 미국을 경유하여 18시간 만에 밴쿠버에 도착했다. 랜딩(Landing-이민비자에 최종확인도장을 받고 입국하는 일)할 때 이민관의 인터뷰도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바짝 긴장한 채 이민국에 들어갔는데, 이민관은 별 말도 묻지 않고 캐나다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비자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캐나다에 첫 발을 밟은 그 날은 밴쿠버의 전형적인 겨울날씨답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IVF 선배이자 친구남편인 지성근 목사님이 신학연수차 밴쿠버에 살고 있어서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 주셨다. 목사님 집에서 연말까지 한 달여를 보낼 수 있었다. 

 

이민도 일종의 이사라고 할 수 있다. 나라에서 나라로 이동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일단 주민등록증(SIN, Security Identification Number)과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는다. 의료보험 신청하고, 은행 계좌 개설하고, 살 집 구하고, 차 사고, 한국에서 부친 짐도 찾고, 이사하고 전기연결, 전화 설치하고 자녀의 학교전학 등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현지의 상황을 모르면 이런 일을 처리해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는 일이 많다. 이민자들이 처음 도착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대부분의 이유가 이런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도움을 주겠다고 접근한 교포들에게 힘든 일을 당하는 사례도 많아서 이민 가는 사람이 제일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이민 와서 처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이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민자가 두 번째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다. 아무리 한국에서 미리 공부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새로운 문화에 들어오게 되면 문화적인 충격을 겪게 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해서 밀월의 시기를 보내지만, 문화가 달라서 어려움을 겪게 되면 그 문화를 증오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습득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 정부에서는 신규이민자들에게 무료로 기초 영어코스들을 제공하기도 한다. 



나는 가족도 없고 가방 두 개만 달랑 들고 들어온지라 이사는 비교적 간단했다. 하지만 캐나다라는 나라에 적응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캐나다의 좋은 면은 조금만 지내보면 금방 알게 된다. 장애인들과 약자를 항상 우선으로 하는 사회로, 예를 들면 대부분의 버스에 휠체어나 유모차가 오를 수 있는 시설이 있어서 휠체어 탄 사람이나 유모차 끄는 사람들이 먼저 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불평 없이 기다린다. 또한 가족중심의 문화라서 상가도 일찍 문을 닫고 사람들도 일찍 귀가해서 저녁이면 거리가 조용하고 한산해진다. 무엇보다 도시 곳곳에 있는 공원이나 나무들이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다. 캐나다 사회의 좋은 점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캐나다에서 내가 가진 밀월기는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기숙사에 살면서 그 학교의 언어교육원에서 영어코스를 듣던 3개월 정도로 끝이 났다. UBC에 입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그 영어코스는 꽤나 비쌌기 때문에 3개월 후에 싸게 공부할 수 있는 학교로 옮기면서 한적한 주택가의 지하층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하필이면 버스 운전사들의 파업이 시작되었고 파업은 장장 넉 달이나 계속되었다. 전철을 타기 위해서 1시간 넘게 걸어가야 했기 때문에 집주인이 출퇴근할 때 차를 얻어 타고 전철역까지 나가고 들어와야 했다. 캐나다에서는 공공 노조를 포함하여 여러 직종의 노동조합들이 피켓시위, 태업 심하면 파업까지 가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들은 그들의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이지만 엄청난 생활의 불편을 초래하곤 했다. 그때의 버스 파업이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겪은 최악의 경험이었다. 첫해를 그렇게 보내고 다음해 1월, 밴쿠버에서 차로 1시간쯤 떨어진 애보츠포드라는 도시에 있는 신학대학(Columbia Bible college)에 입학하면서 그 도시로 이사했고 곧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다. 사실 먹고 사는 데 도움도 되지 않고 공부하느라 고생스럽기도 했지만, 한번쯤은 공부해 보고 싶었던 것이었고 어쨌든 영어는 늘겠지 하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워낙 영어 실력이 시원찮을 때여서 수업 내용을 반쯤만 알아듣고 IVF에서 배웠던 짬밥으로 나머지 반은 해결해나가야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일에 적응이 되어갔다. 


새로운 나라에 온 순간 무얼 해서 먹고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이 시작된다. 사업이민의 경우에는 잡화점, 야채가게, 주유소, 빨래방이나 음식점 등을 시작한다. 독립이민으로 오는 경우, 전문직에서 일하던 사람일수록 자기 분야에 취업하기는 힘들다. 여기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새로 얻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짧게 직업훈련을 받고 쉽게 취직할 수 있는 다른 직종으로 전직을 한다. 배관공, 자동차 정비사, 목수, 정원사 같은 일들인데 육체노동이긴 하지만 임금도 괜찮은 편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직업을 택한다. 마지막 선택이 직업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영어를 잘 못해도 가능한 단순 노동이다. 식당의 접시 닦기나 농장에서 과일 따는 일 등, 일하려는 마음만 먹으면 일자리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애보츠포드로 이사를 한 후에 나도 저축한 돈만으로 버틸 수가 없어서 기숙사 식당 접시 닦기, 일식당 헬퍼, 한국신문사 편집 등 여러 가지 파트타임 일들을 하면서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그 시간을 통해 배운 것은 노동의 신성함이었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해서 잠잘 곳과 먹을 것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았다면 남들이 나를 실패자로 여겼을 것이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캐나다라는 사회 속에 들어오면서 한국에서 내가 얼마나 배웠고 어떤 일을 했던지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 인생은 이 사회 속에서 새롭게 리셋된 것이다.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던 단기코스도 마쳤고 영어 공부도 고등학교 영어 10학년부터 12학년까지의 과정을 공부하는 코스를 마침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공부를 위해 이민했지만 원래 꿈을 좇아 대학원을 가야할지 아니면 직업훈련을 받고 취직을 해야 할지 마음이 오락가락하던 시절이었다. 대학원을 마친다고 캐나다에서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취직을 하는 것이 나쁜 선택만도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일을 하든지 평생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는데 어느 길도 답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께 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YWAM(예수전도단)에서 하는 DTS훈련이었다. 하와이 코나에서 보낸 3개월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서 그 사랑 안에 잠겨서 보낸 시간이었다. 그후 캐나다로 돌아와서 시민권 취득을 한 후에 한국에 나갔다가 뜻하지 않게 제주에 있는 열방대학(YWAM에서 운영하는 훈련기관)에서 스텝으로 1년 가까이 도서실에 있는 책을 정리해주며 지냈다. 먹고 사는 일에 대한 걱정을 잠시 내려놓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쫓겨서 정신없이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삶의 방향을 하나님과 재조정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에 남을까도 생각해보았지만 내가 살 곳은 캐나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2006년 캐나다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배운 것과 경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마음먹고 정부가 지원하는 구직프로그램에 등록해 이력서를 다시 쓰고 면접 준비를 하면서 취업을 준비했다. 몇 달의 노력 끝에 지금 일하고 있는 도서관에 취직했다. 현재 UBC 도서관에서 한국책의 수서와 목록을 담당하며 8년째 일하고 있다. 결국 도서관 일로 돌아온 셈이다.


지난 14년간의 삶을 되돌아볼 때 나의 이민생활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처해 있던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과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 공부를 통해 나 자신을 좀 더 개발해보겠다는 욕심이 이민을 결심하고 이곳에 오게 했다.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결혼하지 않은 채 나이 들어가는 여자들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과, 대학교육을 마쳤으니 이 정도의 생활수준 또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잣대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캐나다에 살면서 이 사회가 그런 것에 대한 편견이 덜하기 때문에 나 자신을 좀 더 관용 있게 또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고, 뭘 하든 사람들을 덜 의식하고 본연의 내 모습으로 살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다. 그리고 익숙한 문화를 벗어나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좌충우돌 하면서 얻은 값진 경험은, 어떤 것은 버려야 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삶의 모습이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내 삶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게 되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뭔가 이룰 줄 알았는데 내 인생을 이끌어 가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분 앞에서 겸손히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힘쓸 뿐이다. 


나는 오늘도 주어진 하루를 살아간다. 세월이 준 나이의 무게, 기쁨과 감사도 늘어간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가나안 땅이 갈대아 우르보다 더 살기 좋은 땅이라서 보내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땅을 향해 가는 여정이,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일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훈련이 되었을 것이다. 캐나다에서 산다고 해서 더 좋은 것도, 한국에서 산다고 나쁜 것도 아니다. 어느 곳이든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어디에 살든 이곳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 하나님이 이곳에 있게 하셨으니 나는 이곳에서 그저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엄현주│부산대83

문학, 도서관, 정보,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책 읽기를 즐겼으나 눈이 급격히 나빠지는 나이이므로 요즘은 책, 영화, 여행 관련 팟캐스트 방송을 즐겨 듣는다. 주말에는 밴쿠버 근교의 산을, 매년 여름이면 록키의 산을 오르고, 작년 가을에는 제주 올레길을 걸었고 올 가을에는 스페인 까미노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날 계획이다. 즐겁고 건강하게 사는 것과, 열심히 일하다 은퇴한 후에 터키, 몽고, 베트남 같은 나라를 떠돌며 일손이 필요한 도서관에 가서 자원봉사하는 요원한 꿈을 갖고 있다.





















no.215=2014.08+09

인생은 나그네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