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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인생은 짧다 그리고 세상은 넓다_김진선

[소리정음] 깨끗하고 맑은 소리


인생은 짧다 그리고 세상은 넓다





이민을 결심한 계기 


저희 부부가 처음부터 이민을 결심하고 준비한 것은 아닙니다. 유학을 생각하고 준비하던 중에 가족이 함께 유학을 하는 경우 영주권을 받아가서 공부를 하면 학비나 생활비가 훨씬 낮아진다는 조언을 받고 이민의 형식을 빌려 호주라는 나라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저는 어디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가에 대해 계속 질문을 한 것 같고, 남편은 어느 땅이 크리스천 의사로서 더 유익하게 쓰임을 받을까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언어소통이 잘 안 되는 교민이나 유학생, 불법체류 상태라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간간이 도우면서 마음이 많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은 의료경영에서 호주 의사면허 시험 준비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준비과정 그리고 초기 정착


영주권을 취득한 후 유학을 떠나기로 하고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어시험, 기술이민에 필요한 공부(경영학)도 하고 서류 준비 등, 영주권을 취득하는 데 3년 정도 걸렸습니다. 그 후 서울로 이주해서 2년 정도 [나음누리] 멤버인 이용훈 학사님과 ‘사랑을 나누는 의원’에서 함께 일을 하다가, 2005년 4월에 호주 시드니로 옮겨와 살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경우만 보더라도 준비를 시작하고 나서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듯이, 이민이라는 형식으로 이주를 할 경우 항상 예상보다 더 넉넉하게 준비기간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달리 호주는 서류나 일처리가 꼼꼼하긴 하되 빠른 나라가 아닙니다. 


저희는 먼저 시드니에 정착하신 친척이 계셔서 집을 구하는 문제나 기본생활에 필요한 정보 등을 가까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 또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새로 오시는 분들의 손과 발이 되어 도움을 드리는 입장이 되더군요. 작게나마 한인커뮤니티가 형성이 되어 있는 곳이라면 정착초기 도움을 받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초기에 힘이 들었던 것은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활환경이었던 것 같네요. 일단 저녁시간 이후에는 집밖이 깜깜해지고 갈 곳이 없습니다. 너무 조용하고 가족중심적인 환경이라 퇴근 후 볼일이 많고 모임이 많던 사람들은 특히 힘들어 한다고 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각종 모임과 일로 늘 바빴던 남편은 이 남는 시간을 어떻게 할지 몰라 한동안 당황스러워 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민을 해서 이곳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을 보니,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문화와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 고립된 생활환경 때문에 위축되고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호주 시드니에는 아예 한인커뮤니티가 형성된 곳에서 살면서 한인교회를 다니며 한국식으로 생활하기를 선택하는 이민자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호주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현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능동적으로 찾아다니는 것이 언어나 문화의 장벽을 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다면 학부모 회의나 학교의 행사에 자원봉사로 참여하면서 현지의 문화와 사람들을 가까이서 접할 기회가 되고 더 나아가 마음 맞는 친구를 사귈 수도 있습니다. 현재 저희는 한인이 거의 없는 소도시에서 남편이 일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현지교회에서 호주인들과 신앙생활을 하고 교제를 나누며 일 년 정도 지냈는데, 시드니에서 살 때보다 불편한 점은 있지만 호주라는 곳에 조금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호주사회의 한 일원으로 기여하면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도 생기게 된 좋은 경험인 것 같습니다. 오자마자 이런 환경이었다면 많이 힘들었겠지만 이미 시드니에서 한국문화와 호주문화를 적당히 오가며 완충기를 지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초기부터 지금까지 제일 힘든 건 역시 의사소통입니다. 한국에서 30대에 이민을 오시는 경우는 대부분 전문직에서 일했던 분들이라 같은 직업으로 해외에서 일을 하려면 보통수준 이상의 영어구사력이 요구되는데, 일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어느 분야이든 의사소통의 문제가 제일 큰 것 같습니다. 저는 이곳 유치원에서 교사로 일을 시작했는데 (호주에서는 학사학위 이상의 교사는 주로 원장급의 업무능력을 요구합니다), 학부모와 상담을 하거나 문서를 처리하는 것이 달라진 교육환경에 적응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들었습니다. 한국말로 하면 별것도 아닌 일을 끙끙대면서 하고 있으니 많이 답답했지요. 남편의 경우, 호주의사 면허 시험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는데 먼저 이 길을 걸어간 한국인 의사들이 별로 없었던 관계로 혼자서 모든 것을 찾아서 준비해야 했던 것이 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 가지를 통과하면 그 다음까지 6개월에서 많게는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시스템 또한 지치게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곳 생활 9년차에 접어드는 지금도 저희들에게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는 부분이 언어능력 향상이 아닌가 싶네요. 



이민 9년차, 지금의 선택에 만족을 하는가?


묘목도 다른 땅으로 옮겨 심으면 초기에는 자리를 잡을 때까지 힘이 들지요. 마찬가지로 삼십 년 이상 살던 한국 땅에서 호주 땅으로 옮겨와 뿌리를 내린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일까요. 하지만 힘들고 불편하고 무엇보다도 가족과 친지, 친구들을 맘껏 볼 수도 없는 타국생활을 결심하고 살아가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제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돌아오는 생각은 “인생은 짧다 그리고 세상은 넓다”이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엡5:16)”라는 성경말씀이 영어로는 “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NLT성경)”라고 번역되어 있더군요. 저와 남편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고, 자고 나면 훌쩍 크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삶보다 느리더라도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가 있는 삶을 살고 싶었고,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보다 배우는 즐거움을 앗아가지 않는 학교생활을 아이들에게 맛보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저와 남편의 공통된 고민이었고, 그러던 중 기회가 왔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점에서 감사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호주는 노동시간이 일반적으로 일주일에 38-40시간입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 취미를 공유하고 여행하면서 보낼 수 있다는 점이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희 아이들이 이곳에서 덜 경쟁적이고 여유가 있는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 1세대로서 산다는 것은 힘이 듭니다. 이제 십대로 접어드는 1.5세대, 2세대인 자녀들과의 소통 문제도 만만치 않은 고민이고, 언어적 문화적 장벽은 여전히 높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절로 가난하고 낮아져서 하나님께 더 간절히 매달리게 되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게 된 것 같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점에서 광야생활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지난 8년간 호주라는 땅에서 저희 부부는 광야학교를 지나온 것 같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저희들이 선택해서 온 길이지만 익숙한 고향땅을 떠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물질적, 관계적, 영적, 육체적, 그야말로 총체적 영역에서 하나님 앞에서 저희의 연약함이 드러나고 점검되고 치유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점이 아마도 저희들의 9년 전 선택에 대한 가장 놀랍고 감사한 결과가 아닌가 싶네요. 






이민을 생각하거나 준비하시는 형제, 자매들께


이민이나 유학은 상당히 고립되기 쉽고 외로운 상황들이 많습니다. 부부끼리 함께하는 시간도 많지만 부딪히는 시간도 많아집니다. 저희 부부의 경우 초창기 3년 정도 아주 심각할 정도로 부부관계가 힘이 들었습니다. 각자 일하고 공부하랴, 적응하느라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하고 이해하며 지낼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해 주고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 격려하는 그룹이 아주 중요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의 중심을 잃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인도를 받는 것이 이민준비에 가장 필수요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치 선교사가 파송을 준비할 때 기도후원자 그룹을 모으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인이 별로 없는 교회라든가 현지에서 외롭게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을 때는 형제자매들과의 긴밀한 기도소통이 있어야 한다고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유학이든, 이민이든, 선교사 파송의 형식이든, 모습은 달라도 본질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중심적인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기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에 대한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대학이라는 경쟁의 관문을 통과한 젊은이들의 내공 정도라면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잘 적응할 뿐 아니라 그 땅에서 필요한 사람들로 충분히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배운 것 또는 잘하는 것들을 한 가지씩 몸에 담고 언어라는 무기를 잘 준비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세계 구석구석으로 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습니다. 비록 전공이나 하던 일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한다고 해도 잘 견디며 해내는 주변의 한인들을 보게 되면서 그런 생각에 점점 확신이 듭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민을 바로 결정해서 진행하기 전에 기회가 된다면 가족과 함께 이주를 원하는 나라로 여행을 해서 짧은 기간이라도 살아보는 경험을 한 후에 결정하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서 나라로 이주하는 문제는 경제적, 정서적, 시간적으로 많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효과적이겠지요. 첫째는 직접적으로 그곳의 라이프스타일을 맛볼 수 있고, 이민을 해서 살고 있는 분들을 통해서 여러모로 관찰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내 가족이 이 땅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느냐 아니냐가 최종 결정을 내리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경험과 결심이 편안함과 안정된 생활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이주한 나라에서 모험을 시작하면서 닥치는 어려움을 상쇄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럴 줄 몰랐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이겨내자”라는 마음으로 삶을 대하게 된다는 차이라고 비교하면 너무 과장일까요?


일일이 지면으로 다 말씀 드리지 못해 아쉽지만 언제라도 연락하시면 저희들이 할 수 있는 한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고 붙드셔서, 세계 곳곳에서 주의 향기 날리는 학사님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김진선│대구가톨릭대91

이영택(경북대90), 김진선 학사 부부는 희균(15세), 희준(11세), 온유(5세) 세 자녀와 함께 9년째 호주에서 살고 있으며 2013년에 시드니에서 차로 10시간 정도 떨어진 소도시 리스모어로 옮겨와 전문의 과정을 밟고 있다. 틈이 나면 가까운 바다로 낚시를 가는 것이 세 남자들의 공통취미가 되었고 이사 후 전업주부가 된 엄마는 딸과 함께 플레이그룹, 오가닉 가드닝, 나무공예 그룹에 가입해 새로운 만남과 배움의 기회를 즐겁게 넓혀가고 있다. 















no.215=2014.08+09

인생은 나그네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