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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모험으로 사는 인생_송민영

[소리정음] 깨끗하고 맑은 소리


모험으로 사는 인생




2년 전인 2012년, 나는 둘째아이와 함께 8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는 우리 가족이 이민 온 지 10년차에 접어드는 때였고, 둘째 은지가 10살 되던 해이기도 하다. 은지는 우리의 이민 역사와 함께 자라고 있는 산 증인인 셈이다. 8년 만에 한국방문을 결심한 것은 이민 갈 때 준비했던 MBTI 강사 자격을 갱신하고, 호주에서 태어나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은지를 위한 스페셜 여행이었다. 큰딸 은혜는 마침 그해 6월에 재외동포모국방문단에 호주NSW(시드니) 대표로 뽑혀 이미 한국을 다녀왔었고, 스페셜로 구입한 티켓으로 가는 여행이라서 은지와 나는 학기 중에 휴가를 내고 가게 되었다. 





마침 그해 IVF 전국학사수련회도 우리의 일정과 맞아 호주에서 미리 예약을 하고 수련회에 참석했다. 2002년 은혜와 우리 부부가 IVF 가족수련회를 참석한 후 호주로 이민을 왔는데, 전국 규모의 IVF 학사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호주 토종(?)인 새가족 은지를 데리고 참석한 것도 하나님의 세밀한 예비하심이었던 것 같다. 사실 수련회는 인하대 학사인 남편이 더 가고 싶어 했는데 가장으로서의 책임 때문에 함께 하지는 못했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이제 한국도 예전의 한국이 아니어서 한국말만 할 뿐이지 그야말로 나그네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여기에서 태어나고 자란 은지가 수련회 동안 유창한 한국말로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어 참 뿌듯했다. 성신 학사들과 원투원을 하고 후배들을 만나며, 그동안의 이민 생활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호주 시드니에는 친정의 둘째오빠와 남동생 가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남편의 여동생 가족 그리고 어머님이 우리와 함께 사신 지 5년이 되어간다. 단일 가족만 이민 와 사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그래도 형제들이 많아 호주 적응에 많은 도움을 받았고 외롭지는 않은 편이다. 아직 친정 부모님과 큰오빠네 그리고 도련님 가족이 한국에 남아있어 좀 아쉽고 그립다. 우리가족의 이민은 둘째오빠가 단독으로 기술이민을 신청하며 시작되었다. 손아래 올케가 패션디자이너로 기술이민을 신청했고, 그후 남편이 조경으로 기술이민을 왔다. 고모부도 IT로 오게 되었다. 둘째오빠 덕분에 가족 점수 10점을 받을 수 있어 가능한 이민이었다. 남편은 나름 영어(IELTS시험이 필수)와 백과사전 두께의 A4용지에 빽빽하게 호주에 관한 정보와 자료도 준비해서 이민을 왔지만, 우리가 만난 시드니에서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시아버님의 명퇴와 주식투자로 시작된 시댁의 어려움은 호주 땅에 온 남편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다. 모든 게 낯선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두 아이, 은지와 은혜도 힘겹게 삶과의 씨름을 해야 했다. 건축전공자로서 편한 일이 있었음에도 남편은 가족의 안위를 위해 시드니에 온 지 일주일 만에 돈이 되는 노동일을 시작했다. 일에 지친 남편은 집에 오면 거의 녹초가 되었고, 남편의 심리적 부재로 나는 이민 와서 지금까지 거의 과부처럼 사는 것 같다. 남편이 있으나 모든 것을 내가 혼자서 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늘 말없이 뒤에서 든든하게 버텨준 남편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벌써 16살(11학년)이 된 은혜가 영어 과목에서 《Looking for Alibrandi》를 읽고 5분 Speech를 하는 숙제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은혜의 발표를 들으면서 나는 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연습을 해야 한다며 몇 번이고 내 앞에서 스피치를 했는데 그때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눈물이 흘렀다. 


“... 아빠는 물리적으로 내 곁에 있어 주셨지만 나와 거의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 최근에 아빠가 나와 친해지려고 시도하는 것이 어색하고 싫었다. 그러나 Josie Alibrand가 어렸을 때 헤어졌다 다시 만난 아빠와 갈등하고 화해하는 것을 읽으며, 우리 아빠가 표현한 사랑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서 우리가족이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살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또한 사랑에는 사랑이 자라날 수 있는 공간과 상대를 기다려 주는 인내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내가 IVF를 할 때, 폴 트루니에의 책이 참 많이 번역되었던 것 같다. 이민 와서 둘째오빠에게 《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읽어보라고 권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읽지 못했다. 이번에 이 글을 준비하며 읽어보려고 했는데 7번의 잦은 이사 중에 내가 보물처럼 아끼던 책들이 많이 없어졌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읽지 못했다. 





나와 남편이 선택하고 결정한 호주이민은 참으로 위험해 보이는 도박이었다. 남편은 큰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이민을 선택했다고 우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가정적인 남편은 성공 위주의 직장생활에 시달려 급기야는 망막박리(한쪽 눈이 거의 실명 위기였다) 수술을 받았고 그후 한국에서의 삶에 회의를 느꼈다. 게다가 주식으로 모든 안정된 삶의 기반을 파탄 낸 아버지와 그런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늘 외국생활을 동경했으나 고지식하고 완고한 아버지로 인해 그 꿈은 늘 꿈에 불과했다. 영어시험에 반복해서 실패하고 이주공사의 사기로 3년이나 지연되었던 이민에 대한 남편의 꿈은 2002년, 드디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와 함께 찾아온 갑작스런 경제적 위기는 남편의 정체성까지 위협했다. 이민 올 때 약간의 전세금을 가져왔으나 남편은 매주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렌트비와 자라고 있는 아이들(당시 은지는 임신 중)을 보며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삶을 선택했다. 그런 달라진 남편을 보며 나는 내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과연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냐고 처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다. 그때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내 삶의 잊지 못할 멘토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호주에 보내주셨다. 지금 그분은 호주에 계시지 않지만,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셨다. 주부 8년차였지만 공부 외에는 딱히 잘하는 게 없었던 나에게, 그분과의 만남은 내 정체성의 회복, 살림과 육아, 기도와 찬송까지, 전 존재적인 회복의 시간을 갖게 하였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날 수 있게 한 주님의 축복이었다.





나와 남편은 IVF 리더수련회에서 만났다. 기도짝이었다. 데이트할 때 남편은 건축이 전공이니 해외근무가 많을 것이라서 일하면서 그곳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 이후 우리의 삶은 ‘지성사회 복음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신혼에 학사들을 위해 가정을 오픈하고 나름의 모양새는 있었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소위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삶을 좇아가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의 과잉 관심과 부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착한 아들, 딸 그리고 사위와 며느리가 되고자 우리 부부는 너무나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살았다. 


이민을 와서 우리 부부는 그런 가면을 하나씩 벗고 있다. 호주의 보통사람들은 삶이 ‘easy going’이다. 한 예로, 우리는 7년 정도 호주침례교회 생활을 했다. 여름에 오전 9시 가족예배 시간에는 복장이 자유롭다. 반바지에 샌들도 오케이다. 물론 10시 장년예배 때는 찬송을 주로 부르고 노인 분들이 캐주얼 정장을 입고 예배를 드린다. 예배시간에도 반바지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원래 넥타이를 질색하는 남편은 특히 호주교회의 그런 자유로움을 좋아했다. 방학 때도 목사님들은 꼭 휴가를 정기적으로 떠난다. 수요예배도 없고 새벽기도도 없다. 안식년도 반드시 챙긴다. 매우 성경적이다. 그에 비해 이민목회를 하는 한국 목사님들은 너무 일을 많이 하고 쉬지 못하는 것 같다.


남편도 나도 영어(IELTS) 시험을 준비하고 호주에 왔다. 그러나 영어라는 것이, 서른 살 넘어 이민을 선택한 우리 부부에게는 너무나 큰 산이었다. 호주에 와서 영어 학교 한번 다니지 않고 호주 철골설계 회사에 6년 이상 근무했던 남편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하다. 남편말로는 잘 알아듣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도 자유롭게 못해서 힘들지만, 자기가 하는 분야는 기술직이라 컴퓨터 화면으로 보여주면 호주인도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이메일로 해서 정확한 의사소통이 되도록 하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증거를 남긴다고 한다. 회사 간, 개인 간에 민사소송이 보편화된 사회이다 보니 그런 보호책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내 전공분야에서만 내가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다른 분야에서도 배우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호주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먹고 느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호주의 주류 사회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TAFE(Technical and Further Education,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주립 기술 전문대학)의 영어코스를 등록했다. 아침에 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놓고 은지는 TAFE 안에 있는 Childcare Centre(어린이집)에 맡긴 후,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 반까지 수업을 들었다. 곧바로 3시에 은혜를 픽업하러 돌아와야 했다. 아이들을 일찍 재워놓고 밤늦게까지 숙제를 하지 않으면 졸업장을 받기 힘든 과정이었다. 그러나 교실에서 배우는 영어는 늘 한계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잘한다고 칭찬을 받아도, 현실에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꿀 먹은 벙어리 신세였다. 오히려 나는 성경공부를 통해 영어를 많이 배운 것 같다. 성경공부를 하는 동안 은퇴한 노인들이 아이들을 사랑으로 잘 돌봐주셨다. 은지가 다니던 호주교회의 한국 플레이 그룹에서 소개받아 시작한 영어성경공부(Know Your Bible)는 나에게 호주교회를 소개해주었고,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신실한 호주 크리스천 공동체와 교제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물론 처음 3년은 그냥 가서 듣기만 했다. 누가 말이라도 걸면 그냥 웃기만 했다. 플레이 그룹의 한국리더 옆에 앉아서 열심히 들었다. 그때 모태신앙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영어는 안 돼도 지금 성경 어디쯤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체면치레보다는 검소하고 꾸밈없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호주 그리스도인들이 좋았다. 육아와 직장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내 나이 또래의 호주 아줌마들을 만날 수 있어 나에겐 대단한 도전이었고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둘째 은지는 임신 중에 다운증후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때 병원에서는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 은지의 초음파 검사결과를 전화로 3자 통역 서비스를 통해 전달했고 그 후 병원 컨설팅과 양수검사 등 모든 과정을 우리를 위해 무료로 준비해주었다. 또한 호주의 교육시스템은 과히 세계 최고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공부하고자 하는 국민을 정말 잘 도와준다. 50세가 넘어 직업을 위해 공부하면 일정금액의 상여금도 지급된다. 직업교육이 더 우선이고 나이 들어 대학에 갈 때는 이점이 더 많다. 호주에서는 모두가 대학에 가지 않는다. 공부하고 싶은 사람만 대학에 간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 졸업하는 것이 몇 배나 어렵고 실제로 20-30%만 졸업을 한다고 한다. Plumber(배관공)이나 Builder(건축업자)가 40%까지 세금을 내야하는 직장인보다 시간당 급여가 더 높고 잘산다. 





호주로의 이민을 선택한 후 여러 가지 위기가 있었지만,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발견한 것을 필두로 여러 은혜가 있었다. 양가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심리적 독립을 했고, 부부관계가 회복되었고, 동생 은지로 인해 은혜의 성품이 회복되었다. 체면치레 없이 솔직하게 사는 삶도 배웠고, 근검절약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는 simple life를 몸소 체험하며 살게 되었다. 이런 것이 이민 12년차의 열매인 것 같다. 


나그네 인생인 우리가 하루하루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호주에서의 삶을 통해 더 절실히 느꼈다. 지금 나는 호주에서의 삶에 감사한다. 우리 가족 각자의 회복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사귐이 귀하고 소중하다. 나는 이곳에서 남편과 함께 신혼 초에 꿈꿨던 은퇴사역자를 위한 센터를 만드는 일을 소망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내게 주어진 아내, 엄마, 며느리, Aged Care Worker(요양보호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고 싶다. 




송민영│성신여대91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민 12년 차이다.가가호호 방문하여 독거노인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no.215=2014.08+09

인생은 나그네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