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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새로운 이야기, 그 소망의 시작인 우리 - 방현주

새로운 이야기, 그 소망의 시작인 우리


  지난 4월 16일 끔직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까운 생명의 허망한 죽음을 우리는 속절없이 지켜보았습니다. 두 달여의 시간이 흘렀건만 상황이 수습되기는커녕 갈수록 탄식과 절망을 안깁니다. 분명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사회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어려운 상황과 심경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질문에 필자들이 성심껏 답변해주었습니다. 

  (소리정음의 내용은 IVF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침몰 이후 남겨진 삶> 

(1)  “야만과 거짓을 중단하세요!” 희생자의 피가 바다에서 울부짖는 소리_박득훈 

(2) 십자가의 길을 기억하자_김성우

(3) 함께 성장하는 계기로 만들어가길_한영주 

(4) 새로운 이야기, 그 소망의 시작인 우리_방현주




그날은 매우 화창했다. 부산의 한 센터에서 학령기 아동에 대한 강의를 하며, 어른이 아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해야 하는지 목소리를 높인 날이었다. 나 역시 교회와 주변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새삼 마음을 다잡은 날이었다. 강의 후 사고 소식을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거야? 그래서 애들은?...’ 여러 기사들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행간에서 뭔지 모를 큰 혼란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그 혼란은 현실이 되었다. 



Photo by Pensiero(flickr)


이후 계속해서 드러나는 사실은 이 땅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국민, 엄마인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사고에 대처하는 정부의 미온적이고도 매우 부적절한 태도를 보며 어느 날 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내가 지금껏 살면서 이런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나는 여기 살고 싶지 않아. 너무 깊은 절망을 느껴. 여자와 아이들에게 천국이라는 캐나다에 살 때도, 그중에서도 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는 밴쿠버에 살 때도, 미국에 있을 때도 한국은 늘 돌아가야 하는 곳, 내가 있어야 할 곳이었어. 그런데... 한 번도 이런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나는 여기 살고 싶지 않아.”


대한민국을 패닉에 빠뜨린 이 사고를 나는,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처음에는 무척 놀라고 당황했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 달이 다되도록 구조자가 한 명도 없는 상황을 보며 희망은 절망으로, 분노로, 비탄으로 응어리졌다. 국민과 전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채 오히려 총체적인 부패와 무능만을 보여주는 정부에 대해 분노한다. 이런 저런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한 시대착오적인 태도에 절망한다. 허울만 있는 부실한 사회 안전망에 대해 탄식한다. 부패와 부실이 탐욕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 탐욕으로 인한 희생자가 소외되거나 약한 자들, 더욱이 아이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린다. 망연자실 바다를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을 탓할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아리고도 아린 통증이 올라온다. 시신이나 유품을 찾고 사망이 물리적으로 현실화되기 전까지는 슬퍼할 겨를조차 없는 사람이 가족인데 하물며 부모는 오죽할까. 아이들을 구할 생각이 처음부터 있기는 있었던 것인지, 부패하고 무능한 위정자들을 바꾸고 진정 새로운 변화가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도 되는 것인지...이 모든 정황이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다.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강력한 충격이 되어 심리적 외상으로 자리 잡을 때 이를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무고한 생명의 희생은 무의미한 비극이라는 점에서 더 견디기 힘들고, 특히 그 죽음이 상식에서 벗어난 너무도 어이없는 결과로 빚어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인재로 시작하여 관재로 이어진 이 사고는, 사회적 정의가 구현되고 있다고 보일 때에야 비로소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지금 우리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이라도 가족처럼 울 수밖에 없다. 



Photo by by somenody_(flickr)


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일에 무감각 했는가 하는 점이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기보다는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일에 익숙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책임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책임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오히려 주저 없이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며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아!’라는 전제에 암묵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알고 있다, 나도 그렇다는 것을. 일상의 삶에서 나도 원칙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적당히 둘러대기도 하고 책임에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려고 기를 쓴다는 사실을, 거창한 얘기를 하지만 실제 내가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하도록 조종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자성의 목소리에 내 책임을 분산하지 않으려면 나 자신부터 책임에 반응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이런 ‘나’가 많아질 때 거시적 맥락인 우리의 문화는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경쟁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의 늪에 매몰되어 가는 문화에서 생명의 존귀함과 약자에 대한 보호를 우선시 하는 보다 인격적인 문화로 옮겨갈 것이라 기대한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통분(痛憤)해 하셨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눈물로 표현하셨고, 죄의 결과인 죽음 그 자체에 격분하셨다. 그리고 마르다에게는 마르다에게 맞게, 마리아에게는 마리아에게 필요한 것으로 이들에게 다가가셨다. 이렇게 주님은 그들의 아픔에 함께 계시고 치유를 끌어내셨다. 주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유가족에게, 살아남은 자에게 그리고 우리 서로에게 치유환경이다. 



Photo by by samantha celera


우리는 당분간 이 외상을 끌어안고 살면서 한동안 많이 울어야 할 것 같다.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자. 너무 섣불리 다루려고 해서는 안 된다. 때로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도 필요하다. 눈물과 시간의 힘을 빌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떠나보내도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 사랑함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 있다. 함께 하는 시간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며 서로를 고립시키지 않게 하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주 접촉하느냐, 사회적 네트워크의 크기는 어떠냐가 아니라 관계의 질이다. 제도적인 사회 안전망은 약하다 할지라도 관계적 맥락에 기초한 보호 관계망을 두텁게 하여, 그 속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힘을 만들고 일상을 만드는 용기를 내자. 이것이 우리의 복원력이 될 것이다. 우리의 상처와 아픔이 우리가 가진 복원력 속에서 어우러져 과거의 상실이 현재와 미래까지 잃어버리게 하지 않게 하자.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강력한 방법 중의 하나는 ‘위로와 이야기하기’이다. 이 새로운 이야기가 이 일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위로가 되게 하고 마지막 장면이 되게 하자. 기억하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일을 잊지 않겠다는 분명한 약속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미래를 어떻게 살겠다는 능동적인 결단을 포함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서로 서로 치유환경을 확립하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애도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땅에서 벌어진 비통한 일을 보십시오. 이 일로 엄청난 슬픔과 뼈아픈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을 돌아보아 주십시오. 저희 속에 있는 통렬한 아픔을 들여다보십시오.


이 비극적인 경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저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봅니다.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십시오. 이 일은 인간의 탐욕이 빚은 결과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먼저 살피기보다는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왜 이런 일을 막지 못했느냐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이 지금 저희가 서 있는 이 자리에 통분하는 마음으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이 신원해 주십시오. 가진 자들의 욕심으로 인해 보호받아야 마땅했으나 보호받지 못한  생명들과 그 가족들의 억울함을.


주님이 기억해 주십시오. 어른들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렸건만 결국 죽음과 만나야 했던 아이들의 절박했던 공포를, 부모들의 가슴 속에 맺힌, 아무리 울부짖고 울부짖어도 결코 멈추어지지 못하는 통곡을. 


저희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십시오.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 보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 보상을 받으며 저희가 마땅히 알아야 할 진실을 알게 해주십시오.


저희를 위로해주십시오. 이 땅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게 해주시고 구조된 자들이 평강 속에 거하게 해주십시오.


잊지 않겠노라고, 기억하겠노라고 말하면서도, 떠나간 혹은 남겨진 아이들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저희의 아이가 안전한 것에 감사하는 저희들입니다. 이 일로 혹여 마음이 흔들려 자신의 일에 집중하지 못할까 노심초사합니다. 저희의 자기중심성을 보십시오. 저희는 이렇게 연약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소망을 품고 싶습니다. 주님이 부활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하신 것처럼, 저희도 이 일이 주님의 뜻 안에서 다시 펼쳐지길 원합니다. 이 일에서 저희를 소외시키지 마시고 저희가 기꺼이 그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져가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온전히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방현주┃동아대82

1992년 문춘근 학사(부산대83, 목사)와 결혼하여 아들(희찬)과 부산에서 살고 있다. 가족학을 공부하고 대학에 출강하며, 부산가정법원/고등법원, 건강가정지원센터 등의 전문상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리 no.214=2014. 06+07 

침몰 이후 남겨진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