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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세상 안에 있는 교회: 다원화된 도시사회에서 교회 공동체의 존재양식 - 권영석

세상 안에 있는 교회:

다원화된 도시사회에서 교회 공동체의 존재양식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에 이어 학사들의 교회생활을 들여다봅니다. 만만치 않은 마음고생을 하고도 “교회는 나의

자랑이요 면류관”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고백이 아름답습니다. 더불어, 작년에 ‘말씀산책’을 연재해 주신 권영석 목사는 교회가 붙들어야 할 핵심가치를 세 가지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몸 된 한국교회가, 사람을 아끼며 복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참다운 교회다움을 되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소리정음의 내용은 IVF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다움> 

(1) 사람이 교회다_박찬주 

(2) 교회, 지금 이곳의 하나님나라_성민모 

(3) 나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_양우석 

(4) 세상 안에 있는 교회_권영석




2013년, ‘말씀산책’ 코너를 통해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가지고 씨름해 보았다.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짚어 보지 않은 채, 모임의 숫자나 예배 형태 또는 프로그램만으로 교회에 대한 학사들의 회의의 먹구름을 걷어낼 수는 결코 없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교회의 핵심가치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에 대한 저간의 생각을 취합해 보고자 한다. 모임의 크기나 형태, 프로그램이 어떠하든지 주님의 교회라면 매한가지로 붙잡아야 할 핵심가치는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 교회 성립의 필요조건이 있다면 바로 이 핵심가치를 붙들고 그 위에 굳게 서는 것이리라.




첫째로, 교회의 구조나 형태가 어떠하든 거기엔 먼저 복음이 있어야 한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계셔야 한다. 예수 부재의 교회는 결코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주님도 함께하실 수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거기서 선포되고 가르치는 ‘복음’이란 기껏해야 도덕적 교훈이나 인생의 성공 비결을 재활용하는 수준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회는 그 본질적 속성상 무엇보다 주님과의 만남을 경험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과 조우하게 된 이들의 공동체가 곧 교회이다. 이들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자들이다.


‘존재’가 없는 ‘소유’가 아무 것도 아니듯이, 주님과 그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없는 제도적인 교회는 규모가 크든 작든, 재산이 많든 적든 교회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생명이 가치 있으려면 일단 태어나야 하며, 존재가 먼저 있어야 혹은 생겨야 한다. 생명이 없는 인형이 아무리 그럴 듯하고 화려하게 꾸민다 한들, 인형으로서는 존재감이 느껴진다 해도 생명으로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교회는 바로 이 복음으로 복음화 되고, 우리 주 그리스도로 그리스도화(化)한 사람을 구성원으로 한, 그 사람들의 공동체를 일컫는다.


복음이신 우리 주님과의 만남으로 말미암는 죄사함과 구원의 경험은 결과로만 보면 ‘회심’과 ‘중생’으로 표현되는 사건이지만, 과정으로 보면 우리의 전 존재를 걸고 실제로 돌이키고 결단하고 살아내는 사건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복음 선포,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련의 사건(구원/대속의 사건)의 기초 위에서, 주님은 지금도 돌이켜 당신께로 나아오는 이들을 차별 없이 만나 주시고 당신 가족의 새로운 식구요 형제로 맞아 주시기 때문에, 복음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인 현재적인 사건이다.


이 복음으로 인해 이제 우리는 가히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며 살아있고 또 살아가는 존재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온 세상의 모든 ‘소유’를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아니 결코 바꾸지 않을 ‘존재’가 된 것이다. 예배란 바로 이 존재들의 존재감의 표현이다. 이들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영원한 교제를 나누는 것,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세상에 또 있으랴. 따라서 예배는 우리의 가장 고상한 특권이자 동시에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의 봉사이기에, 주님의 교회는 무엇보다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이리라. 한마디로 예배는 ‘소유’ 차원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차원의 행위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마저도 수단으로 전락시킨 타락한 이스라엘의 예배는 도리어 하나님의 역겨움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이 우리를 남겨두고 떠나셨다는 데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지만 여전히 이 땅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님의 교회는 세상의 죽은 커뮤니티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나라로 탄생했지만 여전히 이 어두운 땅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현실, 곧 우리가 주님의 로열패밀리라는 현실(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로열패밀리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서 무명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 이 두 현실이 공존해야만 하는 역설적인 긴장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가능하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양식이다.


이 긴장이 가져다주는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때로 우리는 이 세상의 예전 습성을 답습하게 되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멀리 도망함으로 격리된 존재양식을 추구하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언제나 복수(複數)의 우리이며, 사실 교회의 탄생은 주님이 가져오신 복음 안에 이미 예견되고 내포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떠나시면서 남긴 것이 다름 아닌 교회 아니던가? 즉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따르는 이들로 구성된 새로운 집단 곧 교회공동체를 일구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 교회의 주인은 무엇보다 우리를 부르시고 또 우리가 따라나선 주님이시며, 그분이 보내신 성령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좇아 이 긴장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신앙고백을 공유하는 교회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는 이 세상의 가치관과는 하늘과 땅만큼 다를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그것은 생명과 죽음, 존재(存在)와 부재(不在)의 차이만큼 크다. 주님은 바로 삐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상을 심판하고 바르게 하기 위해 오셨으며, 죽어 있는 이 세상을 살리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이 가치를 제자도라고 하든, 진리라고 하든, 길이라고 하든, 은혜라고 하든, 선물이라고 하든,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는 새로운 주님을 모시게 되었고 그 안에서 존재를 얻었으며, 예전에 추구하던 가치나 목표 또는 이전의 습성이나 행동양식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기준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사실 하나님은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시대마다 예언자들을 보내서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일깨우고자 하셨다. 또한 마지막으로는 아드님을 보내어 무엇이 길인지 친히 본을 보이며 가르쳐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그 아드님이 우리의 길이 되셨다.


주체성이란 바로 이런 ‘존재감’의 별칭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경꾼이었지만 이제는 주인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 자신의 존재를 세우고 부각시키는 일에 골몰했지만, 이제 우리는 있는 그대로 이웃과 세상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언제나 타자의 위치에 있었기에 이웃과도 분리되고, 우리의 직장과 하는 일과도 분리되고, 우리의 이웃, 나아가서 사회와 자연과도 분리되고, 심지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아까운 매일의 일상과도 분리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주체성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타자로서가 아니라 책임 있는 주인의 자격을 ‘득템’한 것이다. 그야말로 노예의 굴레에서 해방된 것이며, 가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복음이란 이 정도로 복된 소식이다. 주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은 가히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으며, 그분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온 세상을 정화하고 회복해 나가는 일에 그분의 동역자가 된 것이다. 이런 복음이 선포되는 공동체,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나누는 공동체,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 살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바로 주님의 교회인 것이다.

 


 둘째, 교회의 사이즈가 어떠하든 거기에는 새로운 한가족으로서의 우애가 있어야 하며 그들 사이에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해야 한다. 오늘과 같은 첨단 스펙 사회에서 조건을 따지지 않는 진정한 만남은 점점 더 낯설어진다. 하지만 주님의 교회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서로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인정하고 격려하며 사랑하고 사랑받음으로써 이 안에서는 누구든지 민낯으로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한 개인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허리에서 온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게 된 셈이다. 인간은 결코 유아독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은 병들게 마련이며 그런 집단은 도리어 그 집단에 속한 이들을 집단적으로 오염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집단과 유리된 개인 역시 인생의 향방을 잃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만다. 주님이 마지막 식탁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허물투성이인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신 것처럼, 우리는 누구나, 비록 허물의 차이는 좀 있다 하더라도 함께 한 상에서 음식과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주님의 교회란 교우들 사이에 진정한 만남과 우정이 가능한 공동체이다. 따라서 인격적인 관계를 힘들게 할 정도로 사이즈가 커지거나, 무대 위와 무대 아래가 분리되거나,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차별하거나, 독단적이고 제왕적인 리더십 아래 종속되어서 일대일 관계가 아니라 갑-을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면 이는 결코 주님의 교회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우정의 범위는 내가 속한 지역교회를 넘어서서 다른 지체들과도 동질/동지 의식을 느끼며, 필요하면 얼마든지 동병상련하고 연대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에큐메니컬’ 정신이란, 교회들 간의 인위적인 노력의 소산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이라 할 수 있는 교회공동체의 본질적인 속성의 중요한 한 측면이다.

 



 셋째, 이 땅에서 교회는 이 세상과 연관을 맺어야 한다. 교회가 내적으로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요, 예수 안에서 서로 동기가 되어 우애를 나누는 한가족이라고 한다면, 외적으로는 기존의 커뮤니티(지역사회)를 향하여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과 조우하지 않는 교회, 나아가서 세상에 인카네이션하지 않는 교회는 주님이 의도하신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대신하여 하나님나라를 대표하고 세상을 향해 그 핵심가치를 드러내라고 이 땅에 교회를 두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교회의 사명이란 곧 교회의 존재 이유요 본질의 한 부분이다. 교회의 사명은, 교회의 존재에 수반하는 하위적 내지 종속적인 것이 아니다. 즉 교회의 사명이란 교회가 먼저 존재를 확립하고 난 그 다음에서야 비로소 감당할 수 있으면 하고 못해도 할 수 없는, 그런 선택 사항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 교회는 그 본질적인 속성상 이 세상과 끊임없이 조우해야만 한다. 주님이 친히 성육신하신 것처럼, 우리는 천상의 가족에 속하지만 끊임없이 이 땅의 어그러진 어둠의 세력과 맞붙어서 빛을 발하고 진리의 길로 계도하는 수고를 감당하고 또 때로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듣고 읽고 알아야 하며, 그것을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일간신문의 주요 헤드라인에 오르내리는 뉴스 정도는 최소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각자의 전공이나 직업별로는 그보다 훨씬 더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의미심장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참여의식/책임의식(앙가주망, engagement)의 부재야말로 앞에서 언급한 교회의 세속화를 촉발한 주요 원인으로서, 성속 이원론을 양산하는 온상이라고 본다. 교회가 그저 거룩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한다면, 주님이 굳이 이 땅에 교회를 두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하듯이, 또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등경 위에 두듯이, 주님이 이 땅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아직도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세상을 위함이며, 이를 위해 주님은 도리어 우리를 이 세상 가운데로 보내신(missional)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과 같이 첨단 문명이 건설해 놓은 거대도시 공간에 살면서 내가 속한 지역사회의 바운더리를 규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사회, 나아가서 우리가 종사하는 직업과 속한 직장, 그리고 우리나라 전체와 전 지구적인 일들에 대해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을 노출하고, 또 필요하면 대항/저항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함께함으로 하나님의 미션을 거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종내는 모든 것을 다 회복하고 통일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이미 그 가운데서 일하시며 또 함께 일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은 결코 다원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과 이 땅의 생태계 전체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까닭은,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 관점으로 성경 내러티브를 열다》(IVP 역간, 2010)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모든 만물은 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따라서 그 모든 것이 지금도 그분의 소유이고, 장래의 운명 역시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정화되고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태학적 윤리와 선교에 관한 창조적 토대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토대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우리가 소유주인 것처럼 함부로 군림하거나 우리에게 주신 지식이나 자원을 남용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청지기로서 겸손한 종의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성도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의 공동체를 형성하든지, 또 어떤 형태의 프로그램이나 활동을 하든지, 만일 우리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생명으로 말미암는 존재의식/주체의식이 있고, 피차간에 형제 우애가 있고, 또 이 어두운 세상을 향해 보내심을 받은 소명감이 확실하다면, 우리 가운데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이며, 우리가 바로 주님의 교회 즉 우리 주님의 충만을 증거하는 대리자인 셈이다. 교회의 이런 핵심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하면 가정에서, 지역사회에서 또 일터에서, 아니면 어떤 초교회적 연합체를 통해, 나아가서 온라인상의 연대를 통해서라도 우리는 "새로운 나라"가 왔다고 하는 기쁜 소식을 누리고 또 나누며 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조국의 교회가 이런 본질에 착안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로 회복되고 새로워질 수 있기를 앙원한다. 이 '대업'을 위해 우리 학사님들이 할 수 있는 대로 더욱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또 헌신적인 수고를 아끼지 않기를 당부한다.






권영석(건국대73)

IVF 간사와 총무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학원복음화협의회>의 상임대표로 섬기고 있다. 송경숙 학사(서강대74)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no.213=2014.04+05

교회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