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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사람이 교회다 - 박찬주

사람이 교회다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에 이어 학사들의 교회생활을 들여다봅니다. 만만치 않은 마음고생을 하고도 “교회는 나의 자랑이요 면류관”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고백이 아름답습니다. 더불어, 작년에 ‘말씀산책’을 연재해 주신 권영석 목사는 교회가 붙들어야 할 핵심가치를 세 가지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몸 된 한국교회가, 사람을 아끼며 복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참다운 교회다움을 되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소리정음의 내용은 IVF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다움> 

(1) 사람이 교회다_박찬주 

(2) 교회, 지금 이곳의 하나님나라_성민모 

(3) 나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_양우석 

(4) 세상 안에 있는 교회_권영석






영화 <변호인>에서는 ‘국민이 국가입니다’라고 절규한다. <휴먼 라이브러리>에서는 ‘사람이 책이다’는 내용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에게는 ‘사람이 교회다.’


7살 때 동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나에게 동네교회의 전도사님이 교회에 가자고 손을 내미셨다. 그게 내가 처음 만난 교회였다. (지금 이런 일이 있으면 유괴니 뭐니 난리 났겠지만, 그 당시에는 다들 그런 노방전도로 교회를 만났다.) 사회성이든 사교성이든, 인간관계에는 무지 서투른 DNA를 내재하고 태어난 나에게 그래서 처음 생긴 친구는 교회친구였다. 물론 처음 만난 선생님이란 존재도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당연히 첫사랑도 교회오빠였고, 딸 넷인 집의 첫딸인 나에게 ‘친한 언니’는 모두 교회언니들이었다. 나에게는 시작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사람이 그냥 교회였다.



나의 교회사(史)


교회 중고등부 시절, 나는 나랑 이름이 비슷한 목사님의 둘째아들이었던 교회오빠를 좋아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좋아했던 남자였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항상 쉽다. 이후로 나는 많은 교회의 오빠들을 좋아했다.) 그런데 교회 내의 재산을 목사님이 본인의 명의로 몰래 옮겨 놓은 일 때문에 장로님들과 목사님이 편을 나누어 싸우기 시작했다. 나랑 가장 친했던 교회언니는 장로님의 딸이었고, 목사님이 사람들을 속이고 공금을 횡령한 거라고 알려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목사님 아들인 오빠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다 교회를 위한 일이었는데 장로님들이 오해를 한 거라고 했다. 결국 교회는 둘로 갈라졌고, 목사님은 새로운 교회와 성도들을 포함해서 교회를 새로 장만하셨다. 나는 좋아하는 목사님 아들인 오빠를 따라 차를 타고 30분은 가야하는 곳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과정에서 목사님의 너무 많은 거짓말과 속임수를 겪었고, 자꾸 따지고 드는 나 같은 애를 태우러 교회봉고차가 올 필요가 없다고 판단을 하셨는지 1년 만에 봉고차 운행은 중단되었다. 별 수 없이 나는 엄마가 오랫동안 다니시던 교회로 교회를 옮겼다.


그곳은 우리교회가 아닌 엄마네 교회였다. 모두가 나 집사님(지금은 나 권사님이 되신)의 따님으로 나를 부르고 인식했다. 마음을 줄 수 없었다. 친구들도 모두 아무개 집사님의 딸이거나 아무개 장로님의 아들이었다. 그냥 엄마네 교회를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다만 고등부 전도사님의 설교가 좋았다. 늘 뭔가 도전적인 분이었는데, 어느 날 교사선생님 대신에 전도사님이 성경공부모임을 맡으셨다. 그런데 이 분의 첫 번째 행동이 성경책을 주먹으로 쾅쾅 때리시는 것이었다. 이딴 건 그냥 책일 뿐이라고 책을 믿지 말고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이 성경책을 섬기지 말라는 말을 하셨다. 내가 겪은 첫 번째 문화충격이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첫 번째가 어려울 뿐, IVF에 들어와서 많은 긍정적인 문화충격을 겪었다.) 중1때 큐티를 배운 이후로 매일 성경을 읽었고, 자기 전엔 늘 찬송가 테이프를 틀어놓고 자던 나였다. 내게는 일종의 주술행위이며 제사행위였다. 교회를 빼먹으면 무슨 큰 벌을 받는 줄 알고 아플 때도 죽어라고 교회에 기어가던 나였는데 말이다. 그 전도사님의 도전으로 눈이 번쩍 뜨였건만, 결국 그 전도사님은 목사님과의 갈등으로 아무 말 없이 교회를 떠나셨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목사님한테 심방만 다니지 말고 성경도 읽고 성경공부도 좀 하시라고 하셨다던데, 사실 확인할 수는 없으나 가히 그러셨을 듯하다. 결국 내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전도사님이 떠나시고 나는 교회에 가서 멍 때리고 지내다가 대학에 오면서는 교회를 멀리했다.


대학 때 나는 각 학교의 운동권들이 모여 만든 연합동아리에 내 시간을 다 쏟았다. 거의 매 주일 엠티장소에서 술에 취한 채로 주일 아침을 맞이했고, 온갖 세미나로 공산당선언이니 북한소설이니 읽으면서 말도 안 되는 말싸움을 하면서 살던 중이었다. 엄마네 교회를 떠나 작은 개척교회에 참석하던 때였는데, 대표기도 하는 집사님은 교회에 지각한 신자들을 야단치느라 바빴고, 목사님은 온갖 다양한 심령경험들을 나누느라 바쁘셨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내 생활과는 완전히 정반대에 있었다. 나는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차 있었건만 교회에는 이 사회에 속하지 않은 척 사는 사람들뿐이었다. 철거민들이, 우루과이 라운드로 고통 중에 있던 농민들이 들어올 틈이 없는 교회였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IVF가 찾아 준 교회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직전이었다. 휴학을 할까 말까, 이 운동권에서 빠져나올 수는 있을까, 빠져 나온들 내가 갈 곳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친구가 IVF 종강LGM에 같이 가자고 했다. 주일날 교회도 지루한 판국에 무슨 캠퍼스에서 예배냐고 한심해 하던 중이었다. 오로지 이유는 단 하나, 너무 심심했고 외로웠다. 그래서 갔다. 두 번째 문화충격이었다. 교회에서 늘 듣는 복 받는 노하우 전수가 아닌 너희 잘못 살고 있다, 회개하라는 내용의 설교였다. 그리고 사회적 이슈나 고민들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고 나누는 모임이 있다며 서울지역연합 사회부 모임에 대한 광고를 했다. 그토록 내가 찾던 교회였다. 중고등부 시절 내가 강제로 뺏겨 버렸던 교회를 나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내게는 다시 IVF친구가 생겼고, IVF언니가 생겼고, IVF간사님이 생겼다. (물론 좋아하는 IVF오빠도 생겼다.) 한 마디로 당시 나에게는 IVF가 교회였다. (그 이후로도 계속이었다. 지금의 교회를 만나기 전까지.)



IVF간사를 마치고 기독교 단체와 기독교 언론에서 일했지만, (게다가 그 언론사는 한국교회개혁을 기치로 내건 언론사였건만) 나는 한번도 교회에 대한 희망이나 교회의 회복을 바란 적이 없었다. 교회는 나의 사랑도 나의 고민도 나의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냥 단 하나, 베드로에게 준 천국의 열쇠처럼 결국 교회가 이 땅의 남은 희망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한 가닥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교회개혁운동을 하는 분들을 지지했고, 그런 분들이 모여서 만든 정관을 가진 참 좋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심지어 지금의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였건만) 주일설교가 좋을 뿐이었다. 목사님이 신문과 방송에 나오면서 교회성도 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한 이유였고 여전히 어렵기만 한 교회어른들과의 관계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오랜 시간동안 교회에서 겪은 아픔과 배신들이 미처 치유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지금 나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나의 교회를 사랑한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평생을 걸친 교회에 대한 상처와 배신 심지어 무관심이 사라진 것일까. 모르겠다. 나도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어렴풋이 짐작되는 첫 사건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경이 권사님과의 만남이다.


나는 임신 초기에 하혈로 응급실에 입원했다. 전치태반이라는 병명이었다. 결국 출산 때까지 꼼짝 못하고 집에 누워만 있어야 했다. 당연히 나는 교회에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겨우 출산을 한 후 한 달도 되기 전에 쌍둥이를 안고 교회에 나갔다. 유아세례를 너무 받고 싶어서였다. 오랜만에 나간 교회에서 내가 과연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건만 김경이 권사님이 예배 편하게 드리라고 하시면서 교회 입구에서 바로 아기를 받아 안아 들고 가셨다. 그렇게 매주 나는 오랫동안 기대하던 예배에 갓난쟁이 둘을 데리고서 참석할 수 있었다. 일주일 내내 젖먹이 둘을 데리고 사람 구경 한 번 못하고 씨름하다가 나온 교회였다. 권사님과 여러 집사님들이 아이들을 돌봐주고 환대해주었기에 한 주간의 고단함을 씻을 수 있었고 외로움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만큼이나 큰 성령의 은혜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 권사님이 우리가 교회에서 아픈 일을 겪고 지금의 교회로 새로이 시작되던 해에 병으로 하나님 곁으로 떠나셨다. 너무 많은 분들이 마음 아파했지만, 아기 엄마들은 모두 권사님에 대한 감사한 추억으로 이 헤어짐을 특히나 슬퍼했다. 또한, 병상에 계신 권사님을 위해 온 교인들이 합창곡 ‘할렐루야’를 연습해서 동영상으로 전해드렸던 일은 권사님뿐만 아니라 온 교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해지는 공동의  첫 경험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교회 공동체 공동의 은혜로운 경험들, 승리의 기억들을 쌓아가면서 친밀해졌다. 김경이 권사님이 나의 교회에 대한 낯섦, 껄끄러움을 없애주신 첫 따뜻함이었다. 나는 권사님으로 인해 환대받는 따뜻한 교회를 회복했다.




지금 나의 교회는 예배 후 공동만찬을 드린다. 각자 집에서 밥과 반찬을 만들어 오고, 식판과 텀블러를 챙겨 와서 함께 성만찬을 하고 식사를 한다. 나는 이게 그렇게 좋다. 매일 대충 끼니 때우는 밥과 반찬에 질려 있다가 남이 차려준 음식을 푸짐하게 먹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교회 집사님들은 주일아침마다 이 음식을 해오느라 정말 바쁘실 텐데 나도 뭐라도 만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부담이 된 적도 있다. 그러나 쌍둥이 챙겨서 교회 오느라 정신도 없는데 반찬까지 뭐 하러 만들어 오느냐고 그냥 맘 편히 오라고 하신 덕에 아직까지 쭉 맘 편히 먹고 있다. 일단 교회만 가면 애들 데리고 알아서 놀아주시고 돌봐주시고 밥 차려 주시는 김경이 권사님의 후배들 덕에 지금도 따뜻한 환대만 마냥 누리고 교회를 다닌다.


이제는 뭐라도 섬겨야지 싶어서 작년에 애들이 유치원에 가자마자 교회 집사님과 권사님들의 성경통독모임에 참여했다. IVF에서 간사를 했던 시간들 덕택에 성경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어서 교회에서 받기만 한 것에 뭔가 체면치레라도 되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건만 ‘성경 선생님’이라며 칭찬해 주시고 고마워 하셔서, 도리어 내가 자존감을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로서는 교회 언니·오빠들을 다시 얻은 시간이었다. 우리 교회는 교회의 건물을 소유하지 않고 한 문화센터를 빌려 주일날만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주중에는 따로 카페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하고 각 집을 돌아가면서 구역모임을 한다. 이렇게 친해진 우리는 서로를 돌보게 되었고, 깊이 있는 나눔으로 우리는 서로의 아픔과 힘들고 고단한 삶에 쉼을 얻을 수 있었다.


한번은 남편과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고 화가 나서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다. 남편과 나는 교회를 정말 좋아했고, 남편에게 가장 상처를 주는 방법은 내가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혼자 애들을 데리고 교회에 간 남편은 교회 언니·오빠들의 질문공세에 시달렸고, 무척 반성했다. 그 다음 주에 교회에 나갔을 때 교회집사님들이 윤 집사가 속 썩이면 이 언니들을 부르라며 칠공주파 흉내를 내주었고, 교회 오빠들이 “몰래 불러서 매타작을 좀 해 줄까?” 하는 통에 오픈 부부싸움이 웃음으로 해결되기도 했다.



사람이 교회다


학생시절, 나는 교회가 이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면 차라리 교회를 버리고 이 사회의 아픔에 동참하는 길을 선택하겠다고 생각했다. 교회가 온갖 비리와 세속적인 탐욕으로 물들어 있다면 더 단호하게 싸워야만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생각으로 교회개혁운동을 하고 사회참여를 하는 교회 친구·언니·오빠들을 만났다. 존경하는 목사님을 가질 수 있고, 그 목사님을 멘토로 삼을 수 있는 교회를 만났다. 이 좋은 교회에서 나는 내 평생에 가장 좋은 스승이던 선배 간사님도 주일마다 뵐 수 있다. 훌쩍 큰 쌍둥이도 교회 친구와 놀고 언니·오빠들을 만날 수 있어서, 매일 “오늘 우리 새맘 교회 가는 날이야?”하고 묻는다.


“응, 우리 교회 가자. 예배도 드리고 친구들도 만나고 언니·오빠들도 만나러 가자.”


이번 주일에도 우리는 각자 주섬주섬 짐을 꾸린다. 아이들은 언니·오빠들하고 같이 가지고 놀 장난감을 챙기고, 나는 성경공부모임을 이끌 참고서적들을 챙기고, 남편은 식판과 컵을 챙겨 신나게 교회로 향한다. 이게 웬 복이냐! 주일이 이렇게 즐거우니 말이다.




박찬주┃숙명여대93

동네 아줌마들에게 '운동권 언니'로 불리는 7살 쌍둥이 엄마.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나라를 일구는 운동 단체인 <평화누리>(http://peacenuri.tistory.com)의 공동대표이다.  











no.213=2014.04+05

교회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