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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함께 성장하는 계기로 만들어가길 - 한영주

함께 성장하는 계기로 만들어가길


 지난 4월 16일 끔직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까운 생명의 허망한 죽음을 우리는 속절없이 지켜보았습니다. 두 달여의 시간이 흘렀건만 상황이 수습되기는커녕 갈수록 탄식과 절망을 안깁니다. 분명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사회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어려운 상황과 심경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질문에 필자들이 성심껏 답변해주었습니다.

 (소리정음의 내용은 IVF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침몰 이후 남겨진 삶> 

(1) “야만과 거짓을 중단하세요!” 희생자의 피가 바다에서 울부짖는 소리_박득훈

(2) 십자가의 길을 기억하자_김성우 

(3) 함께 성장하는 계기로 만들어가길_한영주 

(4) 새로운 이야기, 그 소망의 시작인 우리_방현주




세월호 참사에 대해 상담전문가로서 조언을 해달라는 원고청탁을 받고는 무척 망설였다. 우선 나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분노 사이를 오가고 있었고, 절망적 무력감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여전히 상담과 수업을 진행하며 인간의 변화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고 새로운 프로젝트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마음속 소용돌이를 잠재워야 한다는 의식적, 무의식적 노력을 꽤나 절박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면 이내 세월호 기사를 검색하고, 습관적으로 깊은 한숨과 동시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글을 쓴다는 건, 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 속 뇌관을 공개적으로 들추어내는 일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Photo by Deja Photo From Lens To Picture(flickr)


하지만 원고수락을 망설인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슬픔을 드러내어 다독이고 서로를 위로하는 것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과연 우리가 슬프다고 말하고 다독이며 위로해도 되는가? 정말 그래도 될까 하는 의문 말이다. 꽃다운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에 수장되고 있는데, 생떼 같은 아이들의 주검을 만져야 하는 부모들의 고통이 하늘을 찌르는데, 유족들은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고 있는데... 여기 이렇게 살아서 TV를 시청하는 우리가 과연 마음이 아프다고, 무엇이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 거대한 참사의 본질에 접근할수록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자신, 내 안에 있는 무책임과 세속적 욕심, 그리고 거짓을 직면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다독임과 위로를 운운한단 말인가.



하지만 결국 수락했다. 그날 상담했던 내담자의 말 때문이었다. 그는 “나도 또 하나의 선장이나 선원처럼 되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나의 마음과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고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의 죄스러운 마음을 이런 작은 노력으로나마 덜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서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한마디 말로도 비판의 도마에 오를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저 나의 경험과 한계 내에서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조언을 해보려고 한다. 개인에 따라 반응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정신적 외상(trauma)을 경험했다. 기독인 상담자로서 나는 우리의 내면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 가야 할지 몇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한다.



이번 참사는 그동안 우리가 경험한 재난과는 확연히 다른 차별성을 갖는다. 그간 대구지하철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씨랜드 화재 등 수많은 사건을 접해왔지만, 이번 참사처럼 장시간에 걸쳐 그 현장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경우는 처음이다. 마치 온 몸이 묶인 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지켜본 것과 같다. 게다가 '전원구조'라는 오보 이후 하루하루 희생자가 늘어가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점진적으로 희망의 끈을 놓아가며 절망하는 일종의 '충격 스트레스의 만성화' 과정을 경험한 것이다. 특히 사건발생 주간은 고난주간이었고 그 주일은 부활주일이었는데, 부활주일 예배 때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가. 그런데 결국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희망이 절망으로 점차 변해가는 과정을 매일같이 겪어야 했다.



Photo by Firesam!(flickr)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스트레스 사건을 겪지만, 그중에서도 인간으로서 감당해낼 수 없는 수준의 사건을 겪거나 목격하는 경우 이를 외상(trauma)이라 부른다. 내 아이, 내 조카, 내 친구 같은 어린 학생들이 차가운 물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상황을 속수무책 지켜보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가 내려놓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이미 우리 모두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외상을 입었다. 뜨거운 불에 한번 강하게 데이는 것도 아프지만, 은근하지만 점차 온도가 높아지는 다리미에 장시간 살을 대고 있을 때 심각한 화상을 입는 것과 같이, 우리 마음은 상처를 입었고 이는 평소 개인의 정신건강과는 관계없이 외상반응을 일으킨다. 평소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갑자기 화상을 입으면 부풀어 오르고 쓰린 것처럼, 우리 마음은 감당하기 어려운 외상에 이미 노출되었고 그에 따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아이들이 산 채로 수장되는 것을 지켜봄과 동시에 우리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던 가장 기본적인 체계가 무너져있다는 끔찍한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무너져도 너무나 심각하게 무너져 있는, 썩어도 너무나 광범위하게 썩어있는 우리 사회의 근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만 했다. 선장을 비롯한 선박관계자들의 무책임함과 비윤리성이 정말 이해가 안될 만큼 화가 났지만, 그걸 한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기엔 너무 심각하고 광범위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명확히 알아버렸다. 무능한 정부, 사악한 자본, 비겁한 정권, 거짓 언론...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명의 구조자도 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이미 일차적으로 입은 외상 위에 또 하나의 외상, 즉 외상을 다루는 과정에서 이차, 삼차 외상을 입었다. 성폭행을 당한 아이에게 “알려지면 창피하니까 아무에게도 말 하지 마”와 같은 메시지를 주어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안감과 자신에 대한 수치심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린 시절의 외상경험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가장 오랜 시간 영향을 미치고 고통스럽게 하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이차외상임은 이론적으로, 경험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우리는 수장현장의 목격자로서 슬프고 아픈 가운데, 무기력한 분노까지 경험해야 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화상을 입은 상태에서 날아오는 칼에 찔린 것과 같은 상태이다. 이런 수차례의 외상을 겪으면서 정말 아플 만하다는 것을 수용하고 맘껏 슬퍼하고 아파해야 한다. 눈물이 나오면 울어야 한다. 화가 나면 소리쳐 화를 표현해야 한다. 그래도 된다.



세월호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멍해지거나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작은 일에도 신경이 예민해지면서 가까운 사람들과 괜한 갈등을 겪는다고 한다. 일상을 겨우겨우 살아내긴 하지만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우울한 기분과 무력감, 과도한 불안감과 불면증 등의 증상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세월호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피하고, 전혀 없는 일처럼 무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이 모든 증상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PTSD)'로 진단되는 증상이다. 특히 과거에 유사한 외상경험이 있거나 심리적 취약성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더 심각한 증상들을 경험하기도 한다(실제로 3~6주 이후에도 일상에 문제가 있을 만큼 어려움이 지속된다면 전문적 도움을 받기를 권한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가 세월호 참사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집단적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고 그 장기적 파장을 우려하고 있다. 세월호가 침몰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기본적 믿음이 무너진 것이고, 우리 사회가 '균이 혈관을 타고 들어가 심리적 죽음에 이를 정도'라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나 또한 이 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상처가 향후 수 년, 수 십 년간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염려를 갖는다.



Photo by Leila Darwish


기독인들의 경우,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한 믿음의 균열 혹은 무감각으로 영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반복되는 슬픔과 분노, 부르짖음과 무응답 그로 인한 무력감은 개인의 신앙을 무감하게 만들 수 있다. “공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이렇게 잘못 없는 아이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교회와 신앙인들은 왜 이 악한 체제에 침묵하는가?”, “하나님은 왜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이 담고 있는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실망, 분노는 세월호 참사를 마음으로 겪은 기독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할, 참으로 타당하고 정상적인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마음속에 묻어버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영혼은 오히려 굳은 나무토막처럼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통이 단절될 수도 있다. 외상의 경험은 반드시 영적인 문제, 실존적인 문제와 만나기 마련이며, 이 부분을 적절하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외상에서의 회복 혹은 더 나아가 외상으로부터의 성장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편의 다윗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이 질문들을 붙들고 묻고 항의하고 분노해야 할 것이다. 개인의 영적인 실존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묻어버리지 말고 하나님과 선배들에게, 또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문을 말로 표현하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신성모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며,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일 것이다.



심리적 외상은 고통스러운 스트레스 반응을 나타내며 회복을 위한 일정기간이 필요하지만, 반드시 고통과 상흔만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외상경험을 어떻게 대처하고 소화해내는가에 따라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 일어난다는 점은 심리학계의 오랜 연구에서 확인된 결과이다. 마음의 상처를 적절히 대처한다면, 우리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통해 오히려 몸과 마음이 열리고 성장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우리는,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안에 적극적인 외상 후 성장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개인의 내면적 성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외상 후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긴 호흡을 가지고 한걸음씩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외상 후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 실존적 경험 앞에서 가장 치열하게 우리 자신을 직면하고 성찰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고통을 피하는 데 급급하거나, 성급한 분노를 특정대상(특히 이번에는 선장이나 특정 정치인사, 혹은 기관일 가능성이 높다)에게 투사하여 과격한 분노를 표출하고 자신의 죄책감을 벗어버리는 데 그치지 않아야 한다.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개인의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책임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내현화 방식("내 탓이오"), 둘째는 외부에 돌리는 외현화 방식("네 탓이오")이다. 예를 들어,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 정치인사가 자신 아닌 '타인'의 살인행위로 책임을 돌려버리는 비양심적인 경우는 오로지 외현화 방식만을 사용하는 극단적 사례가 된다. 이에 반해, '우리 안의 세월호를 보며 아무 비판도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잠잠히 침묵하며 기도하라'는 거룩한 말씀을 전하고 호된 비판을 받은 목회자의 경우는 내현화 방식만 사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외상 후 성장을 이룩해 내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의 내면을 성찰함과 동시에 외부상황에 대한 철저하고 정확한 비판과 행동이라는 이 두 가지 방식을 반드시 균형 있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세월호를 만들 수 있는 우리 내면의 악(예를 들어, 황금만능주의, 몰역사성과 무책임, 거짓, 대충 대충하는 비전문성 등)을 철저히 말씀에 비추어 성찰하고, 그와 동시에 세월호를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체제의 악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의 말과 행동으로 맞서야 할 것이다.



외상 후 성장을 위한 또 하나의 핵심은 이 모든 대처를 '나 홀로'가 아닌 '함께' 해간다는 점이다. 함께 울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행동해야 한다. 가장 먼저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이다. 심리적 어려움은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누군가의 존재로 대부분 해결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마음이 받은 외상경험의 중대함을 인정하고,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주변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을 읽는 ‘그대’가 먼저 교회에서, 소그룹에서, 모임에서 먼저 열어 보여 고통이 드러나도록 촉진하는 역할을 하길 바란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슬퍼하거나 분노해서 얻을 것이 없다는 섣부른 판단 하에 마음의 상처를 무시하거나 억압해버리지 않아야 한다.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서로를 다독이며 위로하는 것이 분명히 필요하다. 이렇게 함께 울고 분노하며 다독일 때, 우리는 함께 행동할 수 있고 성장을 위한 걸음을 지속할 수 있다. 그 행동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예를 들어, 시청 앞 분향소에 헌화하는 일, 교회의 어려운 청소년에게 밥 한 끼 해주는 일, 옳은 의견에 댓글 달아주는 일 등- 함께 할 때 힘이 생기고, 이번 참사의 결과를 '외상 후 성장'으로 이끌 수 있는 긴 호흡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너무 쉽게 다독이고, 너무 쉽게 위로하며, 또 너무 쉽게 망각해 버릴까봐 두렵다. 슬픔이 사라지고 분노가 사라지면, 지금 우리가 갖는 이 열망과 결단도 사라질까 두렵다. 하지만 무력감과 죄책감에서 헤매는 것도, 무분별한 분노의 돌을 던지는 폭력도 하나님의 길이 아님을 기억한다. 우리 자신과 현실을 균형 있게 바라보는 겸손과 역사의식으로 세월호의 희생자들의 삶을 우리 삶 속에 살아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들의 희생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우리 각자와 사회의 '외상 후 성장'을 이루어내기를 다짐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순 가득한 삶 속에 들어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세우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롬7:25, 더 메시지성경) 아멘! 주님, 그 일을 그치지 말고 우리 안에 계속 행하여 주옵소서.




한영주┃이화여대92

이화여대IVF의 재개척멤버였으며, IVF공동체에서 만난 최규창(서강대87)와 결혼해 아들 수영(중3)과 딸 수은(초3)을 두었다. 학문적으로는 인간변화를 촉진하는 치료적 요인에 대한 연구에, 상담자로서는 여성상담 그리고 15세로 대표되는 청소년상담에 관심이 있다. 또한 이레하우스에서 공동체로 살면서 함께 살아감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잘 놀지 못하는 사람이라) 지금 여기에서 아이들과 어떻게 재미있게 놀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많다. 현재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상담학과 교수와 15세상담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소리
no.214=2014. 06+07 

침몰 이후 남겨진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