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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평화로 가는 여정] 평화의 길로 부르심

[소리] 2018 네번째 소리 - 0809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평화로 가는 여정]



▷ 평화로 가는 여정(1) - 함께 갈 오르막길_김종호

▷ 평화로 가는 여정(2) - 서로가 존중하며 함께 '사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_한종무

▷ 평화로 가는 여정(3) -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우는 평화_문아영

▶ 평화로 가는 여정(4) - 평화의 길로 부르심_변준희 

▷ 평화로 가는 여정(5) - 평화를 향한 남북관계 변천 훑어보기_박일수







평화의 길로 부르심 





◆ 변준희(숭실대99)


“통일드림”이라는 비영리민간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시민활동가입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IVF 모임에서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에겐 두 가지 꿈이 있는데요. 첫 번째는 작가가 되어 좋은 글을 통해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는 거고요, 두 번째는 통일을 위해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작가의 꿈은 어렸을 때부터 가져왔지만, 두 번째 꿈이 생긴 건 2003년, 졸업을 앞두고 중국 동북삼성 지역으로 다녀온 IVF 비전트립 덕분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이 보호하고 있는 탈북민을 통해 들은 북한 주민들의 인권침해 현실은 참담했지만, 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분단된 한반도를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눈물이 제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제야 분단체제 자체가 거대한 폭력이고 비정상적인 구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정상성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평화적인 통일이 되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제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졸업 후에 바로 통일 분야에서 일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어국문학 전공을 살려 독서와 글쓰기 지도를 하는 8학군 지역의 사교육기관에 입사했습니다. 그곳에서 7년 간 20대를 보냈습니다. 나이에 비해 직급도 급여도 꽤 높았던 시기, 퇴직금을 대학원 등록금으로 내며 ‘통일학’을 공부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물었습니다. “통일이 되겠니?”, “그거 해서 밥 먹고 살 수 있겠어?” 하지만 진로를 고민하는 중에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길에 대한 부르심을 주셨고, 내 남은 생을 통일을 준비하는 일에 바쳐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주저함 없이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통일학 석사논문을 마무리하고 학위를 받던 시기인 2010년 여름, 통일부 산하기관인 “통일교육원”에서 학교통일교육강사 양성을 위한 ‘통일교육전문과정’을 처음으로 개설했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2010년은 이명박 정권 시절이었고,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이 있었던 해입니다. 금강산 피격사건과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대북 인식이 악화되었고,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통일의식이 심각하게 저하되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정부 부처의 대책으로 나온 것이 ‘학교통일교육전문강사 양성과정’이었습니다. 주로 북한학, 통일학, 정치외교학 관련 전공자들이 여기에 지원하였고, 서류심사와 면접시험, 한 달 간의 교육과 숙박 훈련기간을 거쳐 선발된 사람이 강사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통일부 통일교육원 소속 1기 학교통일교육강사가 되어 전국에 있는 초·중·고등학교에 방문하여 통일교육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만난 초·중·고등학생들은 북한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고, 통일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습니다. 출강 시마다 교육을 받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사전, 사후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통일인식이 변화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후설문지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통일 수업을 하고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조금이나마 사라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북한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통일을 원하는 우리의 마음 하나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현명한 통일 준비인 것 같다.” 


 그때 부르심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는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만, 하나님이 나를 ‘통일교육’을 통해 통일을 준비하는 일에 부르시고 있구나 하는 감동이 왔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그날이 오나요?’, ‘나는 그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단다. 그런데 너희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구나. 행복한 통일을 맞이하려면 더욱 성숙해져야만 한단다. 하나 됨이 상처가 아닌 축복이 될 수 있을 만큼 너희가 성숙했을 때 그날은 올 것이다.’ 이것이 제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통일교육은 ‘통일을 이룩하는 데 필요한 가치관과 태도를 기르도록 하기 위한 교육(통일교육 지원법 제2조)’이니, 이 일에 헌신해야 하는 이유가 더 분명해졌습니다. 


 2010년 이후로도 매년 통일부 통일교육원에서 강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하지만 훈련받고 선발된 강사들은 현실적인 문제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하나 둘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나갔습니다. 정부부처 산하기관 소속 강사였지만 급여가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강의에 대한 인건비만 지급되었고, 배정되는 교육 횟수도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년 중 4개월은 방학이라 교육 일정이 없어서 ‘통일교육강사’를 전업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강사들은 현장에 나갈수록 통일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며 확대되어야 함을 느꼈지만, 통일교육에 책정된 정부 예산은 너무 적었고, 그나마도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교육 기회뿐만 아니라 교육 내용과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개선해야 할 점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반복해서 개선점을 건의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뀌지 않으니 우리가 바꿔 보자’하는 마음으로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강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교사대상의 지도자양성 워크숍



 2012년 12월, 학교통일교육강사 1,2,3기 대표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통일교육강사협회’ 설립총회를 하였습니다. 저는 1기 대표를 대신해서 나갔다가 얼떨결에 부대표가 되었고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운영위원들마저도 너무 지쳐 활동 동력이 식어져버린 위기 속에서, 2014년 4월 9일 우여곡절 끝에 우리 단체는 “통일드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부에서 비영리단체 인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통일드림에는 아무런 재정적인 기반이 없었습니다. 강사들이 모은 쌈짓돈으로는 사무실 임대료와 활동가 인건비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운영 자금이 없는 상황에서 활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부 보조금 사업을 따야만 했습니다. 한 번도 사업계획서라는 것을 써본 적이 없었던 제가 책임감으로 총대를 메고 첫 사업계획서를 작성했습니다. 사업계획서 작성을 마무리 했을 땐 거의 매년, 매번, 밤을 지새워 가면서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트북 앞에서 사업계획서와 씨름하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돌아보면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만 2014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통일드림이 제출한 사업은 모두 100% 선정되었습니다. 공모사업이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은 상황에서도 비영리민간단체로서 사단법인과 재단법인을 제치고 당당히 선정되었고, 경기도에서 지원하는 ‘공감 통일동아리’ 사업은 심사위원 평가 최고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업들을 통해 기존의  통일교육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했던 일회성, 주입식, 정보전달 중심의 통일교육 방식을 탈피한 대안적인 통일교육 프로그램을 기획 및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방법적인 면에서는 ‘장기적 관점의 자기주도적 참여활동’이 되도록 하였고, 내용적인 면에서는 ‘화해역량’, ‘평화역량’, ‘통합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개발해 나갔습니다. 기존 통일교육 과정에서 미흡하게 다뤄지는 평화교육과 민주시민교육 관련 내용을 접목시켜 보완하였고, 놀이를 접목한 다양한 교구재도 개발하였습니다. 통일교육주간에는 비영리민간단체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놀이체험 중심의 통일문화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번 위기도 있었습니다. 정부 산하기관 소속 강사들이 별도의 단체를 운영하며 통일교육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있었고, 이 때문인지 ‘통일드림 소속 강사가 되면 찍혀서 강의를 많이 못 받는다’는 소문이 돌면서 단체를 탈퇴하는 강사도 생겨났습니다. 2016년에는 시도 보조금사업과 용역사업을 여러 개 진행하게 되면서 급격히 일이 많아졌는데, 실무자가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다 보니 급기야 저는 탈진상태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밤늦도록 일하기가 부지기수였지만 야근수당은커녕 고정급여도 없이 일해야 하는 현실이 부당하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혼자 일해야 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외로움과 서운함이 밀려왔습니다. 이따금씩 다른 기관에서 훨씬 안정된 급여조건을 제시하는 스카우트 제의가 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이젠 이 외롭고 고단한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나에게 주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노동이 너무 지친다고, 이제 그만하면 안 되냐고 울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2016년 12월, 연말까지만 사업을 마무리하고 이제 통일드림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시기, 성탄 전야였는데 이상하게 잠자리에 누웠는데도 날이 새도록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잠이 안 오니 새벽예배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갔는데 하필이면 그날, 목사님이 설교를 하지 않고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100년 전 이 땅에 와서 조선의 가난과 아픔을 등에 업고 살다 간 푸른 눈의 여성, 서서평 선교사의 삶을 접하며 제 굳은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여전히 제 안에는 세상적인 성공과 사람들의 인정, 물질적인 부요함을 쫓고 싶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 지향점이 거기에 있는 한, 나는 만족할 수도 감사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오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 아침에, 저는 회개기도를 드리며 저에게 주신 메시지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독서문화운동으로 진행한 통일드림 책두드림




 2017년 5월, 정권이 바뀌었고 정부의 한반도정책도 달라졌습니다. 북한을 고립·붕괴시켜 단시간 내 ‘인위적인 흡수통일’로 가게 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부작용이 크기 때문에, 현 정부는 북한을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하고 교류·협력하면서 민족공동체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자연스러운 통일’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동방정책’을 통해 독일 통일을 이끈 서독의 브란트 정부가 앞서 시행했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2018 남북정상회담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 이후, 통일드림에는 ‘통일교육’을 문의하는 전화가 한동안 쇄도했습니다. 2015년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20여 종의 통일교육 교구재를 개발해 놓았는데, 이를 활용하고자 문의하는 학교와 기관도 급격히 늘었습니다. 5월 1일부터 지금까지 야근을 하지 않은 날이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준비하고 있었더니 이때에 쓰임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기쁘기도 하지만, 이렇게 무리하면 또 탈이 날거란 생각에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기존의 인력과 재정으로는 더 이상 버텨낼 수 없는 시점이 왔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화평케 되었듯이, 적대적인 남북관계를 화평케 하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예수가 되어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평화의 좁은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분단에서 통일로 가기 위해서는 평화를 만들어 가기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이 일에 동참할 ‘Peace Maker’를 부르고 계십니다. 함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마 5:9 표준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