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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평화로 가는 여정] 함께 갈 오르막길

[소리] 2018 네번째 소리 - 0809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평화로 가는 여정]


▶ 평화로 가는 여정(1) - 함께 갈 오르막길_김종호

▷ 평화로 가는 여정(2) - 서로가 존중하며 함께 '사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_한종무

▷ 평화로 가는 여정(3) -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우는 평화_문아영

▷ 평화로 가는 여정(4) - 평화의 길로 부르심_변준희 

▷ 평화로 가는 여정(5) - 평화를 향한 남북관계 변천 훑어보기_박일수








함께 갈 오르막길






◆ 김종호(연세대87)

친구 때문에 우연히 만난 IVF에 들어와, 92년부터 생각지도 않은 간사생활을 시작해 지금까지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 유명한 김경아 작가의 남편이기도 하고, 미모와 통찰과 따뜻함까지 갖춘 세 딸을 키우는 복 많은 아빠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통곡 아니 울음조차 본 일이 없던 나는, 그날 아버지의 오열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1985년 11월, 베트남을 탈출한 “보트 피플”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 한국국적의 원양어선을 만나 구조되어 부산항에 도착했고 얼마 후 그들이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이 TV에 방송되었다. 그 장면을 보시던 아버지가 오열을 하신 것이다. 고향을 떠나온 난민들의 사연이 실향민이신 아버지의 향수를 자극한 모양이다. 사별보다 생이별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일까?


 내가 북한에서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평안북도 선천이다. 북한에서도 꽤 유명한 기독교 지역이었던 선천에서 태어나 자라신 아버지는,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홀로 월남을 하셨다. 9남매 중의 첫째셨다고 하셨는데, 나중에 따로 월남하신 작은아버지 한 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든 식구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셨다. 그리고 2013년 2월 18일, 언젠가 고향에 꼭 가보고 싶다던 소원을 이루시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다. 그렇게 한 많은 실향민의 87년 인생을 마감하셨다.


 고향인 이북을 떠나 남쪽에 사는 분들을 실향민이라고 한다. 세월과 함께 그 숫자도 줄고 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 상실은 슬픔을 가져오기 마련인데, 아버지는 그 내색을 드러내놓고 해보신 일이 없어서 나는 북한에 있는 나의 뿌리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자랐다. 그래서 그날 아버지의 통곡은 아버지에게 고향을 상실한 아픔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내가 깨닫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아버지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상실의 슬픔과 가슴 저미는 고통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한 날이었다.



▶ 1932년경 북한에서 찍은 아버지의 가족 사진. 맨 앞의 까까머리 남자 아이가 아버지다.



 나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던 아버지 고향에 대한 향수는, 2013년 9월 압록강변을 따라 IVF 대표간사들이 함께 했던 통일기행을 통해 나의 것이 되었다. 대련공항에서 버스로 출발해 육로로 1200km 이동한 후 장춘공항에서 귀국을 하는 일정이었는데, 대부분은 압록강변을 따라 조·중접경지역을 거슬러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처음 도착한 도시는 단동. 멀리 강 건너편으로 북한 땅이 보이는데, 난생 처음 멀리서나마 북한 땅을 본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왔다. 철로를 따라 기차도 오갈 수 있고 사람들도 왕래할 수 있었지만, 그 땅은 우리에게 금단의 땅이었다. 


 그곳에서 조금 이동해 우리 일행은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상류, 하류를 오가며 북한쪽에 가까이 접근해 북한 땅을 지근거리에서 보는 시간을 가졌다. 선장은 의도적으로 우리가 탄 배를 북한 주민 두 명이 서 있는 나룻배 바로 앞에 멈춰 세웠다. 선상 난간을 따라 한 줄로 서서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 일행 눈앞에, 손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중년 남성 둘과 우리 일행이 마주 보는 상황이 펼쳐졌다. 한 눈에 우리가 남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아보았으리라. 그때까지 두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들 앞에 나타나 멈춰선 중국 유람선의 출현에,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남한 사람들의 모습에 얼어버렸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했던 이 갑작스런 상황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북한사람과 대화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안녕하세요, 인사도 한 마디 못 나눴다. 그렇게 억겁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진 30초 남짓의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선장은 배를 움직여 그곳을 떠났다. 우리는 이렇게 인사 한 마디도 못 나눈 채 그들과 멀어졌다. 가슴 먹먹하고 뒤통수에 뭔가를 맞은 듯한 그 이상한 만남은 내 마음 깊은 곳에 한 가지 선명한 인식을 남겼다. 바로 분단은 비정상이라는 사실이었다.


 분단이 된 상태에서 태어났고 북한에 대해 늘 안 좋은 점만 배우며 자란 내게 북한은 당연히 경계대상이었다. 그 분단체제에서 내 생각은 북한을 의심하고 평가절하하고 미워하고 경계하며 망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내 마음은 흔들렸다. 압록강변을 따라 더 상류로 올라가며 강폭이 줄어들면서 정말 지척에 보이는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보았다. 그들이 강가에 나와 빨래를 하고 물놀이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굴뚝에 연기를 피우며 음식을 하고 시시덕거리며 수다를 떠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고, 힘들고 척박한 삶 속에 고통을 겪고 있지만 우리 동포라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을 만날 수도 대화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웠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렬한 바람이 생겨났다.





▶ 압록강 건녀편으로 본 혜산 근방의 북한 마을. 

아이들 떠드는 소리, 자전거를 타고 가는 주민들, 빨래하는 아낙네의 모습 등이 정겨운 우리 농촌을 연상시킨다.




 작년 추석 때만 해도 남북 간, 북미 간 긴장의 수위가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연일 이어지는 김정은과 트럼프의 미치광이 발언과 핵위협과 전쟁의 소문을 지켜보기가 매우 불안했다. 해외의 가족과 지인들도 걱정을 하면서 안부를 물어오고 염려의 말을 전해왔다. 한 가지 위로가 되는 말은, “전쟁 나지 않을 거다. 주식이 폭락하지 않고 있다”라는 말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생각지도 못했던 화해 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전격 방문을 했고 그의 모습이 TV에 그대로 중계되었다. 그의 자연스러운 미소와 사람들을 대하는 자신감과 태도 등에서 그간의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이 많이 흔들렸다. 그는 한마디로 매력 덩어리였고 남한 사람들의 경계심을 녹이는 강력한 존재감을 선보였다. 


 이런 극적인 변화의 정점에는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공동경비구역의 남쪽으로 넘어온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고 북쪽으로 넘어갔다 다시 내려오는 장면, 함께 사열을 하고 기조발언을 하는 장면, 도보다리에서 이어진 장시간의 원투원, 공동 기자회견 등을 거치며 내 뇌리에 선명하게 또 다른 인식이 새겨졌다. “우리 두 나라는 통역이 필요 없는 나라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아픈 분단을 70년 이상 겪어왔지만, 사실상 우리는 하나라는 사실이 아주 또렷하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이제 북한도 고립과 벼랑 끝 전술로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다는 게 분명해 보였고, 우리나라도 분단을 넘어 교류와 협력과 더 나아가 통일의 가능성을 향한 의지가 있음을 보는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분단유지비용이 너무 많은 고통을 유발해 왔고, 이제는 교류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필요를 두 정권이 한 마음으로 확인한 자리였다.


 여전히 북한의 의도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경계하는 관점이 존재한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채 이런 화해 국면으로 들어가는 것의 부당함을 말하는 분들도 국내외에서 많이 보았다. 이러다 뒤통수 맞을 것이란 걱정도 하고, 결국 북한에 바보처럼 당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도 한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집 나가서 아버지께 물려받은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에 잔뜩 화가 난 첫째의 모습을 떠올린다. 망나니 동생이 돌아오자 야단치기는커녕 무조건 받아들여 잔치를 벌인 아버지를 보며 첫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한국교회가 만약 북한에 대해 첫째 아들처럼 행동한다면, 동생을 거부하며 사실상 아버지를 거부해버린 첫째와 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를 거부한 상태로 아버지와 화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와의 화해에는 둘째에 대한 용납이 반드시 요구된다.

 

 4년 전, 이모님이 한국을 방문하셨다. 국제결혼을 하고 평생 미국에서 사신 분이다. 이모와 함께 하루를 보냈는데, 이모는 나도 몰랐던,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일제시대, 미혼 여성은 정신대로 끌려갈 수 있기에 외할머니는 서둘러 엄마를 결혼시켜 내보내셨다고 한다. 그렇게 10대의 나이에 결혼한 엄마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되셨다. 그러다 전쟁이 시작됐다. 포격소리는 가까워졌고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남편과 시어머니는 남아 있기로 했기에 엄마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엄마와 세 아이는 금세 동네 사람들의 짐이 되었다. 처음에는 동정적이었던 사람들이 자기 생존도 보장 못 하는 현실에서 엄마와 세 아이를 버려두고 길을 떠났다. 이윽고 먹을 것도 떨어지고 세 아이를 걸리고 업어가며 고생하던 엄마는 피난길에 아이를 하나씩 잃고 당신도 길가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지경이 되었다. 아이 셋을 길에 묻어야 했던 그 참담함은 엄마의 삶의 의지마저 무너뜨렸을 것이다. 마침 지나가던 미군들이 발견해 아직 목숨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물을 주고 막사로 데려가 수액을 주사하여 살려내지 않았다면, 나도 오늘날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결국 “아이들 셋 다 길에서 죽이고 돌아온 원수"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셨다. 이로 인해 시어머니의 핍박이 시작되었다. 말로 다 못할 육체적, 언어적 폭력이 이어졌고, 결국 엄마는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와 친정으로 가셨다. 하지만 거기서도 엄마에게 되돌아온 것은 출가외인이 집에 왜 오냐는 매몰찬 거절이었다. 눈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엄마의 그 모습을 내게 말해주며 이모는 그날도 슬프게 우셨다. 결국 엄마는 온갖 고생 끝에 의정부에 정착해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군복 빨래를 해가며 생계를 꾸리셨고, 거기서 만난 아버지와 두 번째 결혼을 하셨다. 나는 그 두 분의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우리 가족사였음을 나는 최근에야 알게 됐다. 일제 식민지배, 분단, 전쟁과 지금까지 이어진 적대관계는 이제 청산해야 할 과거다. 이 역사는 그냥 역사책이나 남의 이야기로만 존재하지 않고 우리 가족의 삶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일이기도 했다. 




▶ 누나 셋을 둔 막내 아들로 태어난 나




 동계 올림픽을 전후해 남북교류가 시작됐고 남측의 가수들이 평양에 가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 그 공연이 남쪽의 지상파를 통해서 방송이 되었는데, 초반부에 가수 정인의 “오르막 길”이라는 곡이 나온다. 가사의 일부다.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여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

기억해 혹시 우리 손 놓쳐도

절대 당황하고 헤매지 마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 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크게 소리 쳐

사랑해요 저 끝까지


 남녀 간의 사랑의 노래가, 남북화해라는 상황 속에서 들리니 너무나도 간절한 화해의 노래로 다가왔다. 앞으로 북한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면 나는 평양도 가보겠지만, 어떻게든 아버지 고향, 선천 땅을 밟아보고 싶다. 그곳에서 혹시라도 살아 계실지 모르는 삼촌, 고모들을 찾아보고, 사촌들도 만나보고 싶다. 아버지는 유아세례를 받으신 분이셨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교회를 다니고 계셨다니, 나는 벌써 4대째 기독교인인 셈이다. 북한이 공산화된 후 그분들이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꼭 알아보고 싶다. 이렇게 못 다 이룬 아버지의 소원을 나라도 이뤄보고 싶다. 그리고 한국의 근현대사가 남긴 상처를 이제는 치유해가며 더 나은 미래를 우리 자녀 세대가 누리는 그 날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