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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소리] 2018 세번째 소리 - 0607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



▷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1) - 사춘기 시절을 돌아보며_익명

▷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2) - 사춘기 아이들 곁에서 보낸 7년_한민지

▶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3) -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_서정명

▷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4) - 사춘기 자녀와 나의 성장기(記)_김미혜

▷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5) - '동료인간', 당신을 새롭게 알고 싶어요!_한영주







하나님의 말씀은 교휸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서정명(가톨릭대84) 

아들(19)과 딸(17)을 두었고, 두 아이는 중학교 과정까지 홈스쿨링을 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수년간 책을 읽고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춘기 청소년에게 그다지 훌륭한 엄마는 아닌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춘기라는 단어를 깊이 수용하지 않은 탓이다. 모든 개념은 사회화 과정을 겪으니, ‘사춘기라는 용어는 20세기에나 등장했고 그걸 사회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으레 지나야 할 과정이라고 수용해버린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성경에서나 역사 속에서 사례를 찾아보곤 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사춘기를 가벼운 통과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감기나 잦은 병을 못 본 체하면 몸의 면역기능이 좋아져서 약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는 것처럼.  


 “너희는 사춘기가 언제였어?”하고 아이들에게 물은 적이 있다. 아들은 역시 무딘 안정형답게 “있었나?” 한다. “예전에 피파에 빠져서 돈 몰래 쓰고 해외승인 들어오고 그럴 땐가?” 물으니, “에이, 게임한다고 사춘기인가?” 한다. 딸은 “나는 없었던 것 같은데” 라고 한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역시, 사춘기를 잘 대접해주지 않은 효과인가?’


 생각해 보면 우리 집에도 성장기에 아이들의 변화가 있었다. 우리 집은 부부가 학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탓에 아이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큰애가 6살부터 홈스쿨링을 했다. (물어는 보았으나 그 나이에 아이들에게 무슨 주장이 있었겠는가?) 둘이 성별이 달랐고 성향도 매우 다른 아이들이었으므로 변화에 대한 대응도 달랐다. 아들은 중학교 1학년부터 게임에 빠졌다. 해외축구를 좋아하는 아이가 흥미를 가진 게임은 ‘피파온라인’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스포츠센터에서 아이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알았다고 하는데, 부모 몰래 카드를 훔쳐서 해외승인을 받으면서(거의 안 쓰는 카드라서 결제된 내역을 몇 달 뒤에 알게 되었다) 자신이 선호하는 비싼 선수들을 모아 구단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일은 좀 더 지능적인 형태로 여러 번에 걸쳐서 일어났다. 마지막 대책으로 다른 홈스쿨링 집으로 한 달간 귀양을 보내고서야 그 일은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은 아이가 반항을 하거나 부모와 관계가 깨지는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내게 여러 가르침을 주었다. 남자 아이를 키우는 부모 대부분 게임이 시험거리가 된다. 학창시절에는 공부가 아니어도 빈둥대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나가서 놀거나 하다못해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한데, 스마트폰과 게임이 아이의 생각을 빼앗아 버리는 것 때문에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 또한 내 시대의 생각에 머무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세대에는 이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이 시기에는 자신의 가정을 도와줄 절대적인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든 생활공동체든 마음을 같이하고 가족처럼 아이들을 생각해줄 친구가 있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 집의 경우, 큰아이가 사춘기를 들어서는 시기에 경제적으로나 관계적으로 가장 어려웠기 때문에 상황이 최악이었다. 큰아이에게 녹록치 않은 시기였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학교라도 나가면 될 텐데(하다못해 학원이라도 갔다면 좋았을 텐데) 종일 집안의 무거움과 괴로움을 맛보게 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다. 이때를 생각하면 아이들에게서 은혜를 많이 받은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부모는 사랑을 주는 존재이고 아이들이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아이들을 볼 때, 그리고 내가 자랄 때를 떠올려보면 아이들은 언제고 사랑을 줄 준비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으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언제든지 달려와 기뻐해줄 수 있는 자세를 어디서 배운 걸까. 의아할 때가 많았다. 결단코 나는 그걸 가르쳐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진심으로 깨달은 것은 누구나 아이를 사랑하고 잘 양육하려는 자세를 가진다면 서투르거나 교육할 소양과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괜찮다는 점이다. 한 가지를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기. 이것은 사춘기를 잘 통과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달고 쓴 것을 같이 경험한 아이들은 부모를 결정적으로 힘들게 하지는 않는다. 시간 속에 녹아있는 사랑을 알기에 부모의 잘못을 넉넉히 넘겨줄 마음을 배우는 것 같다. 


 딸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아이는 오빠와 학습스타일도 다르고 배우는 능력도 뛰어나지 않았다. 나는 늘 아이에게 자존감을 세워주려고 애썼다. 이대로는 자존감이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인지 딸은 집에서 수업이 있고 들락거리는 아이들이 있어도 짜증내지 않고 나의 일을 도와주었다. 사춘기로 인한 어려움은 솔직히 잘 생각나지 않는다. 몇 번 낯선 얼굴을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때는 나도 피했던 것 같다. ‘시간이 약이겠지’ 하면서. 사실은 마음속으로 ‘그래, 까불어라. 갱년기가 더 세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엄마의 이런 태도가 애들에게 반항할 여지를 주지 못했을 수 있겠다. 사실은 부모도 애들에게 소위 ‘개기는’ 때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특성을 잘 아는 것도 사춘기의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학교에서 간단한 인성, 성격 검사와 진로지도를 위한 유형검사들을 해주지만 애니어그램 같은 깊이 있는 도구들을 부모가 아는 것도 필요하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이런 도구를 알고 있었기에 아이의 성향에 맞추어서 양육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머리형’이라서 ‘장형’인 남자아이를 훈육할 때 온 힘을 다했고 눈빛을 떨지 않고 기가 죽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장형의 고집을 계속 키우면 하나님께 훈련받을 때 고통을 많이 겪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머리형에 흥이 많은 딸에게는 생각의 깊이를 넣어주기 위해 독서훈련을 강화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성향과 기질을 안 것이 도움이 되었다. 얼마 전에 코칭을 전문적으로 하는 친구가 아들을 보며, ‘안정형은 먹을 것을 꼭 챙겨주고 집에 오면 쉬라는 말을 먼저 해주라’고 조언했는데, 이런 부분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아이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덜했을 것이다.





 교육문제 때문에 사춘기를 혹독하게 보내는 아이들이 많은 것 같다. 조급한 현실과 불안한 미래는 부모들의 믿음을 빼앗는다. 너무나 뻔한 얘기겠지만, 안정적인 사춘기를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어려서부터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이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잘 해보자고 홈스쿨링을 선택했다. 내가 대학시절에 알았던 성경적 세계관을 어려서부터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상은 내 머릿속에서처럼 돌아가지는 않았다. 항상 생각한다고 해서 내 생각이 뇌로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학교와 학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후 돌아온 아이와 말씀으로 씨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아들은 초등학교를 마칠 때쯤 너무 많은 성경시간 때문에 짜증을 내기도 했다. 게다가 나는 생활 속에서 말씀을 잘 적용하고 말씀이 스며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부지런히 찾는 데는 턱없이 게을렀다. 부모는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알게 되면 말씀 앞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 


 사춘기를 맞는 아이들은 동역자와 협력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때는 교회와 사귐의 공동체가 중요하고, 우리도 그 덕을 보았다. 우리 교회는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수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통합예배를 드린다. 통합예배가 주는 유익이 많은데, 가족처럼 함께 드리는 작은 예배에서 아이들은 확대된 가정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특히 대형교회를 다니면서 자녀양육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게 된다. 과감히 작은 교회로 옮기라고. 자녀는 부모 혼자의 힘으로 키우기 어려울 때가 많다. 우리 자녀들이 다른 가정의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놀아주며 자라는 걸 경이로워할 때, 아이들은 부모의 마음을 배우고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통로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아이들은 세대 간의 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교육에 익숙하다. 이 세대는 신앙교육을 주입식교육으로 여기면서 자유로워야 할 아이들에 대한 인권침해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자랄 때, 어떤 세계관의 세례를 받는지를 분별하여 대처할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은 더욱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서 대학시절에 시작하면 늦다고 생각했다. 초등시절에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배우기, 중등에는 역사와 성경의 배경 이해와 역사인식, 그리고 고등이후에는 세계관을 분별하고 바르게 적용하기, 세상을 넓게 이해하기 등을 알려주고자 했다. 잘 되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러나 오늘도 스스로 만족하기로 한다. 원래 교육목표는 세우는 것이고, 실행의 결과는 50% 정도 나오면 성공한 거지….


 제2의 성장기를 맞는 아이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강렬한 것들이 너무 많다. 어제 축제 티켓을 들고 나갔다가 들어온 아이가 “축제 라인업이 환상이었다”며 “역시 지코가 무대장악력이 좋다”고 한다. IVF에 성실하게 가지만 과 밴드부에서 드럼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사회를 생각하고 지금 한반도 정세를 고민하면 좋으련만.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물인 이 아이의 삶을 인정하기로 한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주변에서 보는 아이들의 성장기가 대부분 비슷하다. 이들은 친구와 학업으로 어려움을 겪고 부모와의 관계에서 씨름을 하며 자신을 만들어간다. 어떤 형태의 교육을 하던 과하지 않은 관심과 존중을 보였을 때, 아이들은 건강하게 그 시간을 지나가며 성장하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유독 아이들과 씨름하는 엄마들에게 그 시간을 먼저 보낸 엄마들은 대부분 이런 말을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웃으며 하는 말이지만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 아이들이 훌쩍 집을 떠날 때가 온다. 공교롭게도 우리 두 아이들은 고등학생 시기에 집을 떠나갔다. 


  “요셉을 봐라. 다니엘을 봐라. 너희 나이에 집에서 나가서 생사도 몰랐다. 이제 하나님께 직접 듣고 인도를 받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준 말을 기억하는 아이는 집에서 더 멀리 떠나갔다.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를 떠나서 자신의 길을 잘 찾아가도록 그때까지 조금만 인내하라고 나 자신과 후배들에게 말하면 될까? 사실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