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가는 여정]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우는 평화

Posted by GCF IVF GCF
2018. 9. 5. 11:42 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소리] 2018 네번째 소리 - 0809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평화로 가는 여정]



▷ 평화로 가는 여정(1) - 함께 갈 오르막길_김종호

▷ 평화로 가는 여정(2) - 서로가 존중하며 함께 '사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_한종무

▶ 평화로 가는 여정(3) -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우는 평화_문아영

▷ 평화로 가는 여정(4) - 평화의 길로 부르심_변준희 

▷ 평화로 가는 여정(5) - 평화를 향한 남북관계 변천 훑어보기_박일수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우는 평화




문아영

“피스모모” 대표를 맡고 있다.  




 2012년 여름,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나는 독일 튀빙엔의 평화교육연구소에서 인턴십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의 연구실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창이 있고 그 창밖으로는 무성하게 깊은 숲이 끝없이 내어다보이던 공간이었다. 한국에서의 바쁜 삶도, 대학원 과정의 과제들도 사라진 시간과 공간, 그 고요와 적막 속에서 “피스모모”라는 단체를 시작하고 싶으니 함께해주시지 않겠느냐고 이틀에 걸쳐 완성한 편지를 신뢰하는 이들에게 보냈다. 편지를 받은 이들은 모두 함께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주었고 2012년 8월 “피스모모”가 설립되었다. 


 피스모모는 평화교육단체로 평화활동과 교육활동을 병행하고 공교육과 시민교육 영역에서 평화와 교육을 연결하고 교사 및 교육활동가 연수를 주로 진행하는 비영리단체이다. “어떤 일 하세요?”라고 누군가 물어올 때, “평화교육합니다.”라고 대답하면 대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슨 교육이요? 평화교육이요? 그런 것도 있어요?”라고 되묻는다. 


 휴전과 분단의 상태로 70년 이상 지내온 한국사회에서 평화라는 단어는 주로 ‘안보’와 ‘통일’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되어 왔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에는 ‘전쟁이 없으면 평화롭다’는 소극적 평화인식이 일반화되어 있다. 평화를 늘 이야기하지만 평화에 대한 한국 교육의 상상력은 흡수 통일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나라사랑교육이라는 이름의 호국안보교육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국가보훈처의 주도로 진행된 나라사랑교육은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매우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수십억대의 예산이 투입되는 거대 국책 사업이 되었다. 


 나라사랑교육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국가의 안보를 지키는 일이며, 국가안보는 강한 국방력과 투철한 안보의식으로 뒷받침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이 교육과정에 동원되는 메시지들은 한국전쟁 이후 90년대 중반까지 진행된 안보교육과 전혀 다르지 않다. 나라사랑교육의 일환으로 통일안보현장 체험교육이 활성화 되었으며 정신교육, 국가정체성교육 등의 이름으로 청소년들에게 해병대 캠프와 같은 준군사훈련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초등학생들이 화생방을 경험하고 모 연예인의 아들 3형제가 유아 군사훈련을 받았다. 지금 이순간도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안보교육은 평화를 전제로 한 전쟁교육이다. 전통적인 평화관에 머물러 있는 한국의 안보교육은 식민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공교육기관이 식민교육의 핵심적 장소로 기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교육기관은 군사주의 문화와 분단폭력을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장소로 지금도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안보교육은 어린이 및 청소년들에게 ‘불안’과 ‘불확실성’을 자극함으로써 ‘불안의 상상력’을 함양해왔다. 이렇게 자리 잡은 불안의 상상력은 불확실한 것들을 조금 더 확실하고 통제 가능한 범위에 두기 위한 군사적 시도들에 정당성을 제공해주며, 최대한의 국가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 무장에는 상한선이 없다. 이렇게 상한선 없는 안보지향 체제에서는 국가안보라는 공동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포기하고 위임해야 하는 권리들이 발생함으로써 시민의 권리는 자동적으로 축소되었다. 


 또한 분단상황은 분단의 상태에서 국가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발생하는 직접적 폭력들을 합리화, 정당화함으로써 분단대결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어왔다. 잘 모르는 존재를 적으로 상정하고, 그 적으로부터 나를 어떻게 안전하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훈련이 전사회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다. 


 ‘국가안보’를 통해서 ‘세계평화’를 가져오겠다는 의지는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면서 강자의 주도 아래 약자가 관리되는 힘의 시스템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안보교육의 프레임은 아이들의 일상, 어른들의 일상, 현대사회의 일상 속에 스며든 권력관계와 경쟁중심 성과주의 경험과 연계되어 외부의 적을 규정하고 제압해 나가는 방식으로 삶의 장면 속에 촘촘하게 엮어져 들어간다. 


 현 교육체제 속에서의 지속적인 긴장, 경쟁, 상급자 또는 권력자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경험, 침묵과 부동자세의 강요, 줄 세우기와 극기훈련, 군사훈련의 경험, 체벌과 학교폭력의 경험은 몸과 마음을 동시다발적으로, 지속적으로 마취시켜 ‘진짜 사나이’의 삶의 방식을 연마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또 상처받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음에 굳은살이 배게 하는 경험은 무감각함을 가져오고, 그러한 무감각은 각 존재의 섬세하고 풍부한 감수성을 퇴화, 파괴시킨다. 이렇게 불안과 불확실성은 서로에게 양분이 됨으로써 끝없는 안보불안의 악순환을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안보가 잘 지켜지기 위해서는 힘이 센 아저씨, 힘이 센 남자, 힘이 센 아버지, 힘이 센 오빠와 형이 이 나라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안보수행의 위임이 발생한다. 이러한 안보수행의 주체로서 호명되는 ‘남성’들은 소위 ‘진짜 사나이’로 한국 사회의 정상성의 표본으로 설정되며 성장기의 남성들이 지향하는 특정한 모델이 된다. 이 과정에서 ‘진짜 사나이’가 되지 못한 존재들은 그들을 보조하고 지지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암묵적 사회적 합의가 작동하며 사회 전반의 구조와 문화 속에서 보조적 위치성은 학습된다. 이러한 안보교육은 심각한 젠더불균형을 초래해왔으며 ‘진짜 사나이’들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상호 검열하고 등급을 나누는 문화를 정당화해왔다.


 피스모모는 국가안보에 위해가 되는 존재를 색출하여 신고하는 것이 다양한 타자 혐오의 문화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민혐오와 여성혐오, 약자혐오 등을 보라. 이질적인 존재, 의심스러운 타자를 적으로 인식하고 그 적을 타자화함으로써 ‘나 또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그들’을 ‘우리’로부터 분리해내고 ‘그들’에 대해서만큼은 물리적 폭력이 행사되는 것까지도 예외로 보게 되는 경험의 축적이 단일민족에 대한 믿음과 결부된 것이다. 



 그렇기에 피스모모가 지향하는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에 만족하는 소극적 평화가 아니다. 피스모모는 “존재의 존엄”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그 존재의 존엄을 중심으로 사회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불평등을 비롯한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개선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적극적 평화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피스모모는 ‘가르치지 않는 평화교육’, ‘수평적 서로배움’을 통해 실천적 사유의 시민공동체를 확장함으로써 이 사회를 덜 폭력적이고 더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미션으로 하고 있다. ‘적극적 평화’이자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평화’로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구조적 폭력의 문제들을 평화의 문제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갈등과 문제를 비폭력적으로 전환하고 해결해 나가는 시민성을 지향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평화롭다고 할 수 있을까? 스톡홀름평화연구소(SIPRI)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무기 수출과 수입 모두 세계 10위안에 드는 고도로 군사화된 사회이다. 지난 4.27 판문점 선언을 통해 남북 서로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전격적인 전환이지만, 남과 북의 오랜 군비경쟁의 역사가 한국 사회에 남긴 적대와 혐오의 깊은 내상은 일체의 적대행위 중단이라는 선언만으로 종결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남과 북의 평화적 전환을 국가 수준의 대응으로만 인식할 게 아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적대와 혐오의 문화를 어떻게 해체해 나갈 것인지, 개개인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분단폭력을 어떻게 드러내고 변화를 만들어 갈 것인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깊은 성찰과 논의가 필요하다. 


 피스모모의 이름을 처음 만들 때, 두 가지 의미를 담고자 했다. 첫 번째 의미는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운다”의 앞글자를 따서 ‘모모’, 두 번째 의미는 미하엘 엔데의 동화주인공 ‘모모’의 이름.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운다’라는 생각은 한국 사회에서 교육을 경험하며 어찌하여 배움은 한 중심을 향해야만 하느냐는 질문과 선생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반발, 학생들의 고유성이 지워져버린 학교에서 개별존재로서의 사람들을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어우러져 내 삶에 지속적인 갈증으로 남았던 문장이다. 프레이리는 그의 책, 페다고지 2장에서 참된 교육이란 ‘A’가 ‘B’를 위해, 또는 ‘A’가 ‘B’에 관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가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파울로 프레이리, 페다고지 2장)

 

 나이와 학벌을 떠나 각자 개별의 고유한 삶을 사는 모든 존재들에게는 그 삶의 고유하고 특별한 역사성이 있다. 누구도 다른 누구의 삶을 대신 살 수 없기에 몹시 특수하고 개별적일 수밖에 없는 개인적 삶의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질 때 서로배움이 일어나고 그 서로배움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로 점철된 사회에서 사물화 되어 버린 한 사람, 한 사람의 신비로운 존재감을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이 되리라 생각한다. 


 모든 존재가 모든 존재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모든 존재가 서로의 신비로운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면, 누구도 누구를 함부로 죽일 수 없을 테니까.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전환, 남과 북의 평화적 전환이 시리아의 분쟁과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문을 두드리는 난민에게 어떤 품을 내어줄 수 있을까? 나의 평화가 다른 이의 고통이 되지 않도록,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의 총량을 줄이는 것, 평화를 고민하는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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