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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사람] 소리이음

보냄 받은 자리에서 의미를 발견하길_지성근

학사 운동의 역사를 만나다_#4

보냄 받은 자리에서 의미를 발견하길


미션얼 컨퍼런스, 일상생활사역주간, TGIM, Seize Life 등등... IVFer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다양한 사역들이죠. 이 사역들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일상생활사역연구소의 지성근 소장(부산대81)을 만났습니다. 일상생활사역뿐 아니라 부산 IVF의 개척멤버로서의 소회,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진행 이시종 편집장 / 정리 편집부)

 


왼쪽부터 이시종 간사, 지성근 소장




* 간사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가족의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사모님(김미혜, 동아대83)은 소문난 미인이시죠?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중학교 등굣길이었어요. 학교 가는 길에 있던 사진관 앞에서 항상 같은 시간에 마주쳤어요. 그때 참 예쁘다, 생각했는데 어느 날 교회에 와있더라고요. 관심 있게 지켜만 보다가, 아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가기 직전, 저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 사귀자고 프러포즈를 했어요. 그래도 중학교는 졸업해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겠더라고요. (웃음) 서로 잘 지내다가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바람을 피웠죠.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만나주지 않는 시간을 보냈어요. 그래서 아내는 암흑 같은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죠. 그러다 제가 4학년, 아내는 2학년 올라갈 때, 아내가 저에게 성경책을 건네더군요. 이전에 저에게 사주기로 했었는데, 상황을 견디다 못해 이별의 의미로 선물한 거였어요. 저는 지은 죄가 있으니 말도 먼저 못 붙이다가 이 선물을 기도응답으로 생각하고 관계를 다시 시작했죠. (웃음) 그때의 일로 두고두고 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가 29살 때 결혼을 했으니 프러포즈한 지 12년 만에 한 거네요. 저는 연애 기간을 12년으로 계산하고 우리 집사람은 훨씬 짧게 계산해요. (웃음) 제가 신대원에 입학했다가 한 달 만에 휴학을 했어요. 그리고 총신대학원이 서류를 잘못 처리해서 85년 전체를 그냥 놀았습니다. 그때 동아대 IVF에 가서 찬양인도하고 DPM에도 참석했죠. 집사람을 옆에 두기 위해서였어요. 수업도 같이 들었으니까요. 끈덕지게 붙어 있어서 마침내 쟁취할 수 있었죠. (웃음) IVF에 예쁜 자매가 있어서 들어왔는데 옆에 누가 꼭 붙어있더라고, 한 친구가 나중에야 말하더라고요. 제가 동아대 학생인 줄 알았다더군요. 선배라 감히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하대요. 자녀는 1남 2녀로 대학생, 고3, 고1이에요. 자녀가 우리에겐 하나님이 주신 교육의 장이죠.



* 부산IVF가 올해 30주년입니다. 부산IVF의 개척멤버로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때 함께했던 분들은 누구인가요? 간사님은 어떻게 IVF와 연결되어 참여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부산 IVF의 시작이 독특해요. 80년대에 고신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전도사님들이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스터디를 하다가, 성서유니온 간사를 통해 당시의 IVF 간사님들과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우리도 캠퍼스사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1984년 3월 초에 처음으로 모집을 했어요. 그 멤버를 ‘고신7’이라고 부르는데, 전 여덟 명으로 알고 있어요. 아마 ‘캠브릿지7’과 유사하게 하려고 ‘고신7’이라 한 것 같아요. (웃음) 부산의 큰 두 개의 대학인 부산대와 동아대에 4명씩 가서 신입생모집을 시작한 거죠.


그때 저는 4학년 1학기였어요. 서울에 유학하던 모교회 선배들이 IVFer였고, 목사님 딸도 IVF 출신이었죠. 그래서 교회 대학부에서 IVF의 성경공부 교재를 접했고 IVP에서 마스터본으로 만든 책을 읽었죠. 그러다보니 캠퍼스에 IVF란 이름이 나타나자 관심이 생겼어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강승문 형제와 IVF에 처음으로 가입하고, 신입생을 받아 첫 학기부터 1학년을 다섯 여섯 명씩 맡아 소그룹을 했어요. 자발적인 전도사님들의 세계학생운동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IVF와 연결되었죠.

 


* 부산지역 학사회는 언제 시작되었나요? 초창기 부산학사회의 목적이나 내용, 방식이 궁금합니다.


제가 부산학사회 제1호 학사죠. IVF를 한 지 1년 만에 학사가 됐으니까요. (웃음) 학사회는 88년에 졸업생이 배출되면서 시작했어요. 정관도 만들고, 학사회가 주도해서 세계관 스터디도 했죠. 마침 그때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성서유니온 간사로 1년 동안 있었어요. 성서유니온 사무실이 IVF 학사회 사무실과 가까웠어요. 성서유니온의 방이 더 커서 그곳에서 함께 모임도 하고 해외 서적을 번역하며 공부했죠. 명사초청 강연도 들었고요. 그때까지 졸업생이 10~15명 정도라 관계가 끈끈했죠. 그러다가 학사회 내에 세계관 모임, 회보 모임, 문화연구 모임, 낙태반대 모임 등의 소그룹들이 생겼어요. 몇 가지 모임이 독자적으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회보 모임은 전체를 네트워크하는 역할을 했어요. 소그룹의 결과물이나 학사들의 동정을 수합해서 회보를 만들었죠. 이 회보는 88년에 시작되어 제가 부산학사회를 맡았던 2006년까지 발행되었어요.

 


* 부산IVF 대표간사를 하시다 캐나다로 신학연수를 가셨죠. 이때 학사회 사역을 염두하고 나름의 준비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 그리고 이를 부산학사회에 어떻게 적용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처음부터 학사회 사역을 준비했던 건 아니었어요. 연수 마지막 해쯤에 학사회 사역을 제안 받았죠. 직장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고 준비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실제 학사들의 삶은 사역을 하기엔 너무 척박했어요. 직장에 다니지 않는 학사를 중심으로 사역하다 보니 기존에 준비한 것이 소용이 없어졌죠. 학사회 임원들도 그간의 사역으로 지쳐있던 상황이라 제가 그만두고 쉬라고 했고요. 그런 상황에서 일상생활이라는 개념이 더 적실성 있는 사역의 콘텐츠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안에 생겼던 첫 번째 질문은, 그때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교회병행단체’로서의 학사회가 교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였어요. 캠퍼스에서 전도해서 제자삼고 교회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학사회를 한다면 이 약속을 한 박자 늦추든지 혹은 학사회가 교회를 대신하기가 쉬웠죠. 두 번째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졸업하면 모두 직장인이 되던 시대에서 IMF 이후 졸업해도 실업자인 상황에 학사들에게 적실성 있는 메시지와 콘텐츠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어요. 이런 고민에서 시작하여 정리한 것이, 부산지역 학사회의 방향성은 ‘디아스포라 공동체’라는 것이었어요. 학사들이 보냄 받은 일상생활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 학사회가 교회병행단체로서 교회를 돕는 길이라는 게 결론이었죠.

 

그렇다면 모이지 않고 흩어져있는데 어떻게 공동체를 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죠. 옛날에는 성령의 끈으로 모인다고 했지만, 2000년대의 더 구체적인 끈은 홈페이지였습니다. 멀리서도 접속할 수 있는 공간이니 학사들이 볼 수 있도록 제가 매일 글을 썼어요. 6년 동안 매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학사들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이 홈페이지의 데이터가 손실된 사고는 지금도 무척 아쉽습니다.


저에게 학사운동의 기본전제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학생운동이 학생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학생의 운동이어야 하듯이, 학사운동도 학사를 위한 운동이 아니라 학사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학사회가 잘 모인다고 학사운동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학사운동이 잘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이죠. 왜냐하면 IVF 출신 학사들이 곳곳에서 학사운동을 이미 잘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학사회는 그런 학사들을 발굴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네트워크 하는 역할을 해야겠죠. 그런 학사들 각자의 사역과 학사회 사역이 합쳐져 학사운동이 총괄적으로 이뤄지는 거니 한국IVF가 학사운동을 못한다는 평가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간사님이 학사운동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일상생활사역연구소를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가치 생산과 유통으로 학사를 섬기려고 하신 것 같은데, 연구소의 취지와 일상성이 왜 중요한지 좀 더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본래 일상생활사역연구소는 부산지역 학사회에서 만든 두 개의 연구소 중 하나였습니다. 어떤 이름으로 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냥 편하게 연구소라 붙였죠. 일상생활 부분이 한국교회의 가장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영역이라 생각했어요. 주되심 곧 하나님나라를 공간적으로는 예배당 안에, 시간적으로는 예배시간 안에만 가두어놓지 않도록 한국교회에 권고하고 격려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고요. 이를 위해서는 신학교가 변해야 하니까 신학교 교수와 신학생을 위한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하고, 그 연구가 축적되어야 하니까 연구지도 필요한 것 같고, 강의, 강연도 당연히 필요하고... 그런 생각 끝에 연구소를 만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이런 연약함에 대해 예상보다 공감하는 분이 많이 계셔서 연구위원으로 위촉할 때 흔쾌히 승낙하셨고, 2,3년 동안은 연구위원들의 재능기부로 연구지를 만들었어요. 그 자체가 저에게도 많은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4년이 흐르니 그전에는 출판계에서 IVP만 일상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제는 흔하게 사용하게 되었죠. 감사하게 생각해요.

 


* 구체적으로 학사들이 연구소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그간의 자료에 접근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연구소가 부산에 있어서 의사소통 하는 데 어려움이 있죠. 그걸 보완하는 장치가 SNS에요. 홈페이지에 축적한 자료를 SNS를 통해 유통한다는 게 연구소의 기본전략이고요. 홈페이지에 들어오셔서 약간의 수고를 하시면 그간 축적된 연구소의 다양한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가령 TGIM 운영에 필요한 자료라든지, 일상생활 사역과 관련되어 시중에 나온 책 15권 정도를 챕터별로 요약한 자료, CBS 방송에서 2년 동안 다뤘던 다양한 주제들, 일상의 눈으로 어떻게 성경을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코멘트가 창세기, 고린도전서, 출애굽기의 챕터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연구지와 기타 자료들도 검색할 수 있어요. 유트브에서 “일상생활사역”을 검색하시면 저희가 만든 다양한 영상을 보실 수 있고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작년 12월에 일상생활사역연구소가 주최한 ‘미션얼 컨퍼런스’가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생중계되면서 외국에 계신 분들도 뜨거운 반응을 보이셨죠. 그 컨퍼런스에 관해 말씀해주세요.


IVF가 캠퍼스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 자체가 ‘미셔널(Missional)’하다고 생각해요. ‘보냄 받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IVF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으면 어디에 보냄을 받든지 그곳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며 살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최근 레슬리 뉴비긴과 같은 서구 학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보냄 받은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면서 저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IVF가 한국교회를 향해 미셔널한 교회 정체성에 대해 담론을 꺼내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이 ‘미션얼 컨퍼런스’라 생각했어요. 일상생활이 우리가 보냄 받은 곳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사역연구소와 관련이 없는 주제가 아니라 어쩌면 일상생활 영성에 중요한 신학적 기초를 미셔널 처치가 담고 있다고 생각했고요.


2010년, 2011년에는 ‘교회 2.0 컨퍼런스’라는 이름으로 홍대 앞의 카페에서 개최했습니다. 이후에는 그 이름을 목회자 그룹에 넘기고 원래의 의도를 담아 ‘미션얼 컨퍼런스’를 열었어요. 컨퍼런스 이름에 교회를 넣지 않은 건 교회론으로 접근하면 또 다시 목회자들만의 전유물이 되기 쉬워서예요. 미셔널이라는 담론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죠. 거기서부터 확대되어 교회 이야기를 꺼내야 하니까요. 그 내용도 교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는 목회자들뿐 아니라, 목회자가 아닌 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보냄 받은 정체성을 가지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넣으려고 애썼습니다.

 


* 타이틀을 미션‘얼’로 붙인 게 독특합니다. 어떤 ‘정신’이라는 의미와 관련이 있겠죠?


‘얼’은 한국적인 말이죠. 미셔널(Missional)이라는 영어 단어를 번역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새로운 교회가 온다》를 번역할 때도 고민이 있었고,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어요. 그러던 중 ‘널’의 ㄴ을 앞으로 붙이고 ‘얼’로 바꾸면 한국적인 정서에 보냄 받은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가미되어서 독창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겠다 생각했죠. 어색한 조어(造語)이긴 하지만 단어에 의도를 담아 만든 것이죠. 미셔널이란 개념을 서구에서 가져온 프로그램이나 신학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10여 년의 역사를 둔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 지난 2,000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누구든지 생각하고 고민했어야 할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당연히 이런 보냄 받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왔고 영향을 미쳤겠죠. 그런 의미에서 외국의 논의는 물론 우리 안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번에는 처음으로 열렸기 때문에 특별히 이론적인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신 분들의 사례를 나누는 내용이 더 많았습니다. 사례 발표자 중에는 자기가 하고 있는 게 미셔널 처치라는 걸 모르는 분도 있었어요. 거기에 이름을 붙여준 거죠. 그후 일종의 감으로 혹은 성경에 대한 순종으로 시작했던 그 일을, 어떤 방향을 가지고 더 역동적으로 사역하게 된 분도 있어요. 앞으로도 이미 한국에 있는 미셔널 처치를 발굴해서 이름 붙여주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컨퍼런스에 자극받은 사람들이 또 다양한 방식으로 일을 해나가겠죠. 이런 다양성은 유지되어야 할 것 같아요.

 


* 신학연수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부산에서 거주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부산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부산을 떠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서울에서 연구소를 하는 게 영향력 확산을 위해 더 적절한 선택이 아니냐는 회유와 압박(?)도 있었는데 꿋꿋이 버티고 계시고요. (웃음) 지방에서 연구소를 하는 장점과 가치 그리고 애환을 나눠주세요.


우선 부산에 먹을 게 많죠. (웃음)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아빠가 공부한다고 캐나다에 따라갔다가 다시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상처가 많았어요. 그게 지금까지 아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요. 서울로 자리를 움직이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아이들이 제일 어려웠을 때라 가정의 상황을 고려했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물론 부산은 변방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신영복 선생님의 이야기대로 변방은 창조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확신이 생깁니다. 서울이라는 곳이 주는 삶의 압박감 속에서 새로운 사역을 한다는 게 어려웠어요. 그리고 그동안의 기반이 전부 부산에 있으니 그런 자원을 활용하면서 사역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죠. 사람과 물자, 네트워크가 수도권 중심으로 되어있는 현실이 사회구조적으로도 문제였고요. 당시 노무현 정권에서 지방분권과 각 관청을 지방으로 이양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때라 그런 고민을 기독교 생태계 안에서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직장사역연구소도 있는데 비슷한 내용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서울에서 생존하느니 지방에서 새로운 움직임으로 해보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부산에서 살면서 부산뿐만 아니라 다양한 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더라고요. 일상생활이라는 주제 자체가 변방의 주제죠. 이전의 왕조사 중심의 역사 기술에서 지금은 역사학의 대세가 일상사라는 변방의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같이 일상이라는 주제 자체가 중앙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 방식으로 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상징적으로라도 부산이라는 쇠퇴해가는 도시에서 목소리를 발하는 것 자체가 주는 함의도 클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 이제 50대의 삶을 살고 계신데, 앞으로 지금까지 해온 사역 외에 꼭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도 제가 꼭 해보고 싶다고 해서 한 게 있나요, 그저 하나님이 보내신 시점과 장소에서 응답하며 살았으니까요. 50대든 60대든 그렇게 살지 않을까요. 꼭 하고 싶은 건 없어요. (웃음)

 


* 끝으로 학사들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소리]를 읽고 계실 정도라면 학사운동에 관심이 많으실 텐데요. 지금 하고 계신 그 일이 학사운동이라 말씀드리고 싶어요. 열심히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고군분투 해주시는 게 학사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큰 도움이 됩니다. 직장을 위해, 가족을 위해, 친구들과의 만남을 위해서라면 학사모임에 안 오셔도 됩니다. (웃음) 그리고 학사모임을 이끌어가는 임원이나 간사도 그 정도의 내성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임에 사람이 안 와도 그게 우리 모임의 건강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요. 기독교 문화에서 자란 사람은 모임에 사람이 적으면 일단 불안해요. 사람이 왜 이렇게 안 오지, 우리 모임에 위기가 온 건 아닌가, 이러면서요. 위기가 아니에요. 그게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어요.


 


* 일상생활사역과 미션얼은 앞으로 더 중요하게 부각될 주제인 것 같습니다. 학사들을 만날수록 이 부분의 필요가 크다는 것을 느낍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직 미완의 종교개혁이 일상생활사역연구소의 사역들을 통해 재조정되길 기대합니다. 















[소리] no.213=2014.04+04

소리가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