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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사람] 소리이음

소명을 좇아 복음적 대안을 제시하는 학사운동을 꿈꾸다_전재중

학사운동의 역사를 만나다 #2

다양한 운동이 움트는 학사 공동체를 위하여




‘학사운동의 역사를 만나다’의 두 번째 여정으로 전재중 학사(서울대78, CLF 상임이사)를 만났습니다. 전재중 학사는 학사회 초기부터 여러 모양으로 사역을 돕다가 1993년부터 10년간은 학사회장으로 섬겼으며, 현재는 기독 로펌 ‘소명’을 운영하는 동시에 CLF(기독법률가회) 상임이사를 맡고 계십니다. 학사회 총무인 이시종 간사가 만나 학사회와 CLF 사역에 대해 대담을 하였습니다. (진행 이시종 편집장 / 정리 편집부)




왼쪽부터 전재중 학사, 이시종 간사




*오랜 기간 동안 학사회 회장으로 섬기셨는데요,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요? 함께 섬기신 동역자 분들도 궁금합니다. 

학사회 일은 1985년 [소리]의 전신인 [학사회보]를 복간하는 데 함께한 것이 첫 시작이었어요. 저와 [소리]는 이런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웃음) 당시엔 그것이 학사회의 유일한 공식 모임이었죠. 그때 최초로 학사수련회를 열어 20~30명이 모였어요. 그곳에서 아내도 만났고요. 그러다 1989년 군 제대 후 서울에 와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학사회 사역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죠. 


제가 군에 있을 때 학사회 멤버들이 면회를 올 정도로 서로 친밀했어요. 임원이 조직화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두터운 교제를 나눴습니다. 전국대회를 준비하는 상시적인 모임이 필요해서  김재원, 유제필, 이상면, 고(故) 김유상, 전윤희 등 서울 학사들은 물론 대구의 최삼열, 조화영, 이용세 학사들과 부산 지역의 후배학사들을 자주 만난 기억이 나네요. 이들이 행정적으로 핵심 역할을 했는데 사는 지역은 달라도 자주 만났어요. 주로 금요일 밤에 만나 회의를 했는데 KTX가 없던 시절인데도 불구하고 대구, 부산, 경주를 다니면서 자주 모였습니다. 간사 없이도 학사들이 자발적으로 학사운동을 주도하던 시기였죠. 


존 스토트가 주강사였던 1993년 전국학사수련회 준비위원장을 한 이후 1994년부터 학사회장을 맡아 임기도 없이 일하다가 2004년 이용훈 학사에게 넘겨주었죠. 그 시기에는 수련회를 준비위원장이 차기 회장을 맡곤 했습니다. 제 이전에는 이상면 학사와 유제필 학사가 주고받으며 학사회장을 역임하다가 제가 장기 집권했죠. (웃음) 제 임기 동안 초창기부터 한철호 간사님과 주로 사역했고요, 후반기에는 이재천 간사님과 잠시 함께했습니다.   



* 그 당시의 학사운동을 자세히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학사운동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어요. 졸업했으니 당연히 평생운동으로 IVF를 계속 해야 하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영역에서 신앙과의 통합에 대하여 고민하는 곳이 한국교회 안에 우리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느껴지더군요. IVF 출신이 이미 여기저기 흩어져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캠퍼스뿐 아니라 지성사회 복음화의 사역이 IVF의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IVF는 다른 단체와 달리 뚜렷한 색깔이 없었어요. 제 동생은 CCC를, 형은 네비게이토를 학생 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남은 건 저였어요. 제가 대학에서 IVF 활동을 할 때 훈련프로그램도 없었고 전임간사도 없었어요. 콘텐츠라 할 게 없었죠. 제 딸이 현재 서울대 IVFer인데, 하는 게 많더라고요. 우린 1년 내내 모였지만 체계적으로 배운 게 거의 없었습니다. (웃음) 그렇지만 스피릿은 확실하게 남았어요.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자발성이 생기고 전해졌습니다. 물려받은 DNA에 졸업 후 사회에 나와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우리 안에 한국사회를 위한 성경적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공감도 있었습니다. 이런 과제가 IVF에 주어졌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학사회 운동 초창기에는 실질적인 의미의 한국사회의 지성사회 복음화를 위해 힘썼습니다. 어디서 그런 걸 말하진 않았지만 자발적인 동기부여가 됐어요. 지금 보면 그 내용은 수준이 낮지만 계속 해나갔어요. 아무래도 캠퍼스운동과는 성격이 달랐죠. 전문인 운동이나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운동에 대해 학사들끼리 1박으로 모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캠퍼스를 개척할 때의 필요와 직장 생활의 필요가 달랐으므로, 캠퍼스와 궤를 달리한 재정과 인사 운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캠퍼스 사역 파트와 갈등을 빚기도 했어요. 캠퍼스도 성장기여서 할 일이 많았죠. 인적, 재정적 독립이 해결되지 않아 결국 지지부진해졌죠. 학사운동을 열심히 할수록 캠퍼스운동을 해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그래서 서로의 사역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정리하기로 하고 저의 경우 법률영역의 운동을 위해 IVF 울타리 밖의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이하 기윤실)'에서 법률가 모임을 시작했어요. GCF는 결국 어린 학사를 길러내는 사역에 집중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시도하던 운동은 여러 형태로 독립해 나가고, 학사회는 사람을 기르는 운동으로 정리했었죠. 



한편 학사회 초기엔 수련회 사역의 성장이 빨랐습니다. 현수일 학사가 학사회 협동간사였던 때, 수련회에 30여 명이 모였습니다. 이걸 점점 키워 체계화했죠. 89년 부산 송도에서 했던 수련회가 기억나네요. 예상인원을 150명으로 잡고 준비했는데 250명이 참석했습니다. 잠잘 곳도 없었어요. 한마디로 난장판이었죠. (웃음) 일본 KGK 분들이 오셨다가 학을 떼고 갔습니다. 그 이후엔 인원이 더욱 늘어 예약을 받아야만 했죠.  



* 2012년에 11년만의 학사수련회를 하면서 학사들의 학사운동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사들의 기대를 엮는 비저닝(visioning)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사님은 학사운동에 어떤 모습을 기대하시는지요? 비저닝 작업을 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IVF는 자발적인 운동입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 가장 절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고 올인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이슈가 있겠지만 제 소견으로는 통일이나 양극화,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요. 양극화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노력과 상관없는 체제의 문제이고요. 정말 이게 우리의 이슈라면 풀뿌리 정치 운동을 해야 할 거예요. 양극화는 점점 심화될 겁니다. 200~300만원의 월급을 받는 안정적인 직업군이 급격히 줄고 소수의 1,000만 원대 자리와 100만 원대의 불안정한 자리로 확 갈리는 양상이지요. 할 이야기가 정말 많죠. 우선 이에 대해 고민하고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혁명적으로 사회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신선한 시도일 수 있습니다. 통일을 우리의 이슈로 잡는다면 그동안 전개했던 운동과는 달라야겠죠. 


이처럼 IVF 학사회 내에 모든 운동을 품으려 하기보다는 절박한 문제를 발견해서 구동하면 좋겠습니다. 전문인 운동을 하나로 모으자는 유혹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면 IVF가 괴물이 됐을 거예요. 규모가 너무 커지는 건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 같아요. 다른 단체에서 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절박한 문제를 찾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발견해서 거기에 집중하면 그것이 우리의 동력이자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양극화 사회에 대한 현실적 대한 대안으로 공동체 혹은 협동조합 운동을 연구하고 실천하여 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런 경험이 우리에게 인사이트를 줄 것이며 하나의 운동으로 확산해갈 수 있을 거예요. 


운동을 전개할 때는 IVF가 어느 정도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다 보면 갈등으로 인해 동력이 떨어집니다. 지금 CLF가 힘을 모을 수 있는 건 우리 안의 신앙적 노선과 스피릿이 잘 맞기 때문이에요. 큰 혼란 없이 양적 성장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죠. 효율적으로 일을 바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신앙적 색깔의 차이로 인한 쓸데없는 긴장을 만들지 않는 게 좋겠죠. IVF 구성원 자체의 수도 적지 않기 때문에 우선 우리의 의제(agenda)를 먼저 설정하고 기초를 튼튼히 세워놓아야 합니다. 다른 단체에서 하지 않는 걸 농도 짙게 하기 위해선 끝까지 책임을 질 수 있을 정도로 함께할 사람까지만 모임을 열어야겠죠. 명확한 리더십이 없다면 서로 통합될 수 있는 사람끼리 모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과 가치가 공유가 되는 사람들, 피부로 와 닿고 정서가 소통되는 사람들이어야 하죠. 




* 전문 운동의 좋은 사례인 CLF(기독법률가회)를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CLF를 만드셨나요? 그리고 지금 CLF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고 계신가요? 


1994년 경, 저와 김향동, 조성극 등 IVF 출신 법률가들을 중심으로 소그룹 성경공부를 시작했어요. 법률영역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잘 할 것인가, 성경적 법학이란 무엇인가 등이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1년 정도 하다가 ‘기윤실 법률가 모임’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다가 1999년에 CLF를 창립했어요. 사실 첫 시작은 소그룹 운동의 연장이었죠. 법률계에 던져졌는데 무엇을 해야 할 줄은 몰랐고 아는 것이라곤 소그룹뿐이었어요. 어딘가에 던져졌을 때 소그룹으로 모이는 건 아주 중요합니다. 소그룹은 작은 모임이란 뜻이 아니라 자발성을 지닌 소창업의 의미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존에 조직된 예배모임에 찾아갈 생각보다는 자발성을 띈 무엇인가를 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소그룹을 시작했습니다. 제 수준에 맞춰서요. 법과 신앙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는 굉장히 매력적인 주제라서 초창기부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법률가가 되는 길인 사법고시가 상향성의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사법시험을 패스한 후에 기독 법률가의 스피릿을 심어주기란 어려웠습니다. 수원지(水源池) 사역의 주요성을 깨달았고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로스쿨 제도를 기다리며 체계적으로 학생들을 길러내기 위한 준비를 했죠. 그 일에 제가 가장 눈을 빨리 뜬 셈이었어요. 가장 중요한 건 따로 놀고 있는 ‘법과 신앙의 통합’이었고, 또 하나 중요한 건 공동체였어요. 공동체적인 원리가 살아 있는 그 만큼 운동이 확산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 운동을 바탕으로, 공동체적 성격이 가미되도록 기독로펌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CLF와 법무법인 ‘소명’이 거의 동시에 출범했어요. CLF를 돕기 위해 로펌을 설립한 거죠. CLF 출범 후 초창기에는 웨슬리 선교사, 홍병룡 간사 등의 도움을 받아 세계관 공부를 했어요. 《21세기 평신도신학》, 오스 기니스의 소명등 IVP 책을 세미나자료로 사용했습니다. 초창기에는 틀을 세우는 게 중요했는데, IVF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로스쿨이 출범한 2009년부터 사역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차근차근 준비했던 기독전문운동의 비전을 전하자 학생들의 호응이 컸습니다.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나라 운동에 대하여 역설했습니다. 전국 25개 로스쿨에 모임을 개척했고 전국대회를 정착시켜나갔죠. 겨울에는 리더 캠프를 통해 핵심 멤버를 계속 길러냈고요. 생존이 아닌 소명을 강조했고, 기존의 법률가상을 극복한 새로운 법률가를 강조하여왔습니다. 이제 졸업생들이 나오고 있는데 열매를 맺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지금 바짝 긴장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삶을 전적으로 드리는 기독법률가운동의 좋은 모델이 많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요즘 저 스스로 선배로서의 한계를 느끼면서 후배들이 선배들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동기부여를 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역 현장에서 약간 떨어져 기도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저희 로펌 안에서 모든 운동을 담아내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무국과  모임 공간도 별도로 하고 특화된 운동들은 점차 독립 분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급진적인 운동을 하는 후배들이 지방에서도 나올 수 있도록 자극하고 돕는 것이 저의 관심사입니다. 


CLF에서 전략적으로 로스쿨 사역을 주로 하다 보니 기존 사법연수원 출신 법률가들로부터 불만의 소리를 듣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 차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 사법시험 제도는 부르심에 의한 법률가가 아니라 공부 잘해서 법률가가 되는 것이었고, 이제 로스쿨 시대가 되어 법률가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오히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법률가가 되는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저희들은 반기고 있어요. 그러한 소명에 의한 상징으로 로스쿨의 후배들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이후 사법연수원 신우회가 경쟁심, 질투 때문인지 더 열심히 참여하더군요. (웃음)



* CLF 사역이 원래 목표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로 근접하고 있나요? 


기본적인 인프라는 상당히 갖추어졌습니다. 전국대회에 500~600명이 모이고, 법률직역에서 이제 상당히 인정받는 그룹이 되었죠. 선교단체처럼 각 지부 모임, 리더 모임, 전국대회, 훈련 프로그램이 꽤나 준비되어 있고요. 과제는 우리의 소명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독로펌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현재 그러한 정신을 지닌 로펌이 저희 ‘소명’과 최근 분립한 ‘겸인’ 그 외에 수 개가 있고, 지방에서 기독로펌을 꿈꾸는 후배들이 있습니다. 10년 내에 지금의 ‘소명’ 정도의 로펌들이 전국에 10여개 세워지는 것이 중기 목표입니다.    


위기는 여전히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침체되고 위기를 겪는 가운데 CLF는 저희 스스로 신기하게 생각할 정도로 뜨겁고 순수한 모임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교회 분위기를 보면 한순간에 열기가 사그라질 것 같은 위기의식도 있습니다. 워낙 이 법조계가 어둡고 죄가 많은 곳이라 특별히 은혜를 주시는 것 같은데, 지금 주시는 이 기회에 우리가 합당하게 반응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흩어져 옛날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사님은 변호사 일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어떤 운동을 만드는 데 참여해 오셨는데요, 이렇게 하시려면 지불해야 할 대가가 꽤 컸을 거라 짐작됩니다. 특별히 시간과 재정, 에너지 사용에 있어서 지불한 대가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원칙으로 이러한 삶을 지속해 오실 수 있었나요? 


저는 신앙적인 훈련을 많이 받지도 않았고 탁월한 법률가도 아닙니다. 스스로 돌아보면 CLF를 창립하고 ‘소명’을 설립하면서 약간 희생한 만큼 후배들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변호사들은 돈 많이 버는 것으로 인식되어 어디가든 재정적 부담을 떠안게 됩니다. 제가 그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적어도 후배들을 CLF 운동에 참여시키면서 돈 부담은 주지말자는 생각을 가지고 ‘소명’을 통하여 상당부분의 재정과 인력 등을 흘려보냈습니다. 솔직하게 스스로 돌아보면 대략 30%정도 바친 정도였나 싶어요. 그래서 그 정도의 진전을 본 것 같고요. 요즘 깨닫는 것은 하나님은 전부를 원하시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많습니다. 내가 먼저 전부를 바쳤다면 훨씬 달라졌을 거라 생각해요. 이제 앞으로는 전부를 바치는 후배들이 나와야겠죠. 부분만 헌신하는 사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의 모델로는 이 이상의 운동을 할 수는 없어요. 제 성과이자 반성이기도 합니다.




* 가족 분들의 평가가 궁금합니다. 또 후배들에게 본인이 느끼고 있는 하나님나라 운동하는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나눠주세요.


사실 가족의 저항도 많았어요. IVF 학사회로 지방에 많이 다닐 때 우리 큰애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 어느 날 전화를 받더니 화난 목소리로 “우리 아빠 IVF 갔어요!” 하더라고요. 제가 집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거였죠. 그래서 IVF의 좋은 점을 보여주려고 그 다음 해인가에 태국에서 열렸던 EAGC에도 데려갔었죠. (웃음) CLF 초창기 매주 목요일마다 저녁 도시락 준비부터 모임 내용 준비와 진행을 모두 맡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컸어요. 여름휴가나 겨울 휴가철을 앞두고 마지막 모임을 마치고 귀가하면 이제 CLF 모임 안 해도 되냐며 아이들이 더 기뻐하는 걸 보고 우습기도 하고 그랬어요. 사역에 가족이 동의를 했다기보다는 일종의 환경이 되었고 그래서 짜증도 많이 쌓였구나, 느낄 수 있었지요. 아내도 IVF 커플로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제가 에너지를 바깥에서 쏟아 부으니 자신에게 해주는 것이 없다고 투덜대지요.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사역을 존중하고 말로는 투덜거리더라도 짐을 함께 지고 협조해주려 노력을 하죠. 


사람들은 특히 재정적인 부분에 대해 많이 묻곤 합니다.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영업을 해야만 하는데, 이 부분을 제가 잘 못합니다. 골프도 접대 술자리도 안 하고요. 제 업무가 거의 보험 분야인데 제가 일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변호사 수수료도 낮고 비인기 영역이었어요. 그러나 저로서는 무리한 영업을 할 필요가 없는 대신 일손이 많이 필요하고, 수입이 낮은 대신 안정적인 영역이어서 기독법률가 후배들과 함께 열심히만 하면 되니까 CLF 사역하는데 딱 맞는 분야였죠. 돌이켜 보면 모두 은혜였어요. 만일 영업을 많이 해서 돈 많이 버는 영역이었다면 아마 CLF 사역은 못했을 거예요. 실제로 대부분의 로펌은 치열합니다. 저는 당분간 ‘소명’이 가급적 많은 인턴이나 수습변호사를 받아 기독법률가 운동의 요원들을  길러내는 양성소의 역할, 기독로펌을 인큐베이팅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으면 합니다. 



* 끝으로, IVF 가족들에게 인사말씀 부탁합니다. 


자신이 IVF를 선택해서 가입하고 활동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큰 물결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길 끝에서 주님을 만나는 건 확실합니다. 이걸 사소하게 여기지 말고 부르심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여 이 길 끝에 주님을 만나 나눌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는 그 때 어디에 있었냐고 물으실 때 제가 늘 주님 편에 서있었다는 말을 할 수가 있어야 하겠죠. 이런 관점에서 IVF를 보면 좋겠습니다.   


제 딸이 IVF에 들어간 후 5월쯤 저에게 묻더군요. 아빠는 왜 평생 IVF를 하냐고요. 학교 선배들이 IVF를 계속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이 고민한다고 하면서요. IVF의 규모가 커진 후 들어온 후배들은, IVF를 평생운동이라는 부르심보다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선택하는 것 같아요. 솔직히 걱정이 됐습니다. 저는 체계적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그 스피릿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에요. IVF 참여를 마치 소비자가 선택하듯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IVF가 학생 자발 운동이니 학사들도 이를 다시 한 번 붙잡았으면 합니다. 한국사회의 절박한 문제에 대해 복음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IVF가 감당할 부분이 있습니다. IVF 출신 학사들이 에너지를 여러 방향으로 쏟고 있는데, 다시 한 번 하나의 중심을 발견해서 함께 만나면 좋겠습니다. 



* 이사님의 나눔이 현재 진행 중인 학사회 비저닝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낌  없는 충언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소리] no.211=2013.12+2014.01

소리가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