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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사람] 소리이음

제 자리를 지키는 미셔너리의 삶을 살고파_허성호

학사 운동의 역사를 만나다_#3

제 자리를 지키는 미셔너리의 삶을 살고파


지난 10여 년간 수도권지역 학사운동의 모판 역할을 했던 ‘수도권학사회’가 올해 ‘중앙학사회 YGM사역부(가칭)’로 전환됩니다. 지방 출신의 젊은 학사들의 필요를 보다 적극적으로 돕고자 운동성을 지향하는 공동체로 만들어갈 예정입니다. 또한 취업준비생과 비정규직 학사들의 소명과 직업선택을 돕고, 이성교제와 좋은 교회와의 연결을 지원하며, IVF 운동과의 연계를 다방면으로 모색하려 합니다. 이와 같은 방향 전환을 앞두고 수도권학사회 역사의 산 증인인 허성호 학사(경북대90)를 만났습니다. (진행 이시종 편집장 / 정리 편집부)




왼쪽부터 이시종 간사, 허성호 학사



* 학사님의 학창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IVF와 인연을 맺으셨나요?


저는 대구 토박이에요. 재밌기도 하고 힘들었던 고3 시절을 보내고 들어간 대학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군대문화가 지배하는 동문 모임, 성적 중심 학업 문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실망스러웠습니다. 고등학교 선배를 찾아가 이런 문제를 상담하면서 선교단체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소개를 받아 찾아간 모임이 IVF의 “행복에의 초대”였습니다. 그렇게 IVF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1, 2학년 때 어수선한 IVF 분위기로 인해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학원은 제 영적 암흑기의 시절로 기억합니다. 연결된 공동체가 없이 주중에는 밤낮 실험만 하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대학청년부, 주일학교, 성가대 등을 하느라 바쁘기만 했죠. 그러던 차에 IVF 최초의 학사회 전임간사였던 신호기 간사님을 만나 대구학사회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 대학원 졸업 후 서울생활을 시작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떠셨나요?


대학원을 졸업한 해에 IMF 구제 금융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원서를 쌓아놓고 회사를 고르는 분위기였는데, 1년 만에 그 많던 입사원서는 다 어디가고 취업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평소 생각했던 연구소와 대기업 등에 원서를 냈지만 잘 안됐어요. 그러다 떨어진 연구소의 면접관이 아는 기업체를 소개해준 거예요. 그렇게 취업을 하면서 1997년 급작스럽게 서울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문화충격이 컸어요. 강남의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가면 말로만 듣던 CCM 가수 공연을 직접 볼 수도 있었고, 토요일 청년부 모임이 서울에서 제가 다닌 지역교회에서는 아예 없었고요. 한동안은 제가 주일 오후예배를 참석하는 유일한 청년이기도 했습니다.   


입사 2년차 때 팀장이 퇴사하면서 아무 것도 배운 것 없이 제가 이전 팀장의 기술 부분 역할을 이어 맡게 되었어요. 그해부터 낮에는 몸으로 때워 일하고, 밤에는 일하기 위해 관련 공부와 실험을 하면서 주당 80시간씩 일했습니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컸던지 심지어 꿈에서도 고객을 만나 일했고, 새벽 4시에 현장으로 뛰어오라는 전화를 받기도 했죠. 주일 오후에 태풍을 뚫고 부산에 내려가 밤새워 기술지원을 한 경험도 기억에 남습니다. 가족과도 떨어져 있고, 교회는 여전히 사역의 대상인데다가 IVF와의 연결고리도 없고... 영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2년 정도를 그렇게 살다보니 이러다 죽겠다 싶었습니다.  



* ‘응답하라 1997’이군요. (웃음) 이후 학사모임에는 어떻게 연결되셨나요?


당시 천리안 PC 통신에 IVF 모임이 있었는데 대학원 시절 밤샘하면서 이곳을 통해 알게 된 서울 지역 지체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때의 채팅 기록이 아직도 남아있답니다. (웃음) 거기서 만난 형(배종우, 인하대 학사)에게 부탁해 인하대 학사모임에 참석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재천 간사님과 최규창 학사님이 주도해서 만든 서울지역 연합 학사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2000년 가을로 기억하는데요, 당시 서바이벌을 위해 몸부림치던 제게 희소식이었죠. 중앙회관이 없던 시절이라 홍대 앞 서현교회에서 매주 모였는데 마침 학교 선배(은혜경, 경북대88)가 찬양인도를 하고 있어 제가 기타 반주를 맡게 되었고 6개월 후엔 어느새 제가 찬양인도를 맡게 되면서 의도치 않게 모임의 리더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웃음) 당시 한 국민대 학사가 이 모임이 자신을 살렸다며 소그룹에서 울먹였던 기억이 나네요. 



* 그 연합 학사모임이 결국 수도권학사회로 발전했습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모임이 만들어졌나요? 


이재천 간사님은 학사 풀(pool)을 만들어야 거기서 여러 가지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학사회 총무를 맡으셨는데, 전국 학사가 만 명이라지만 막상 사역의 대상도, 함께 사역할 동역자도 마땅치 않은, 당시로서는 학사 사역이 거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멤버십을 확보하기 위해 연합모임을 시작하셨지만, 간사님은 학사회 총무로서의 사역에 집중하셔야 했고, 병이 날 정도로 열심히 일하랴 학사회 섬기랴 바빴던 최규창 학사도 어느 순간 모임에서 빠지면서 구심력이 약해지다 보니 모임이 점점 약화되었어요. 


결국 많을 때는 100명도 모였던 모임이 2003년 즈음엔 7명 정도 남았어요. 한수현, 국효숙, 피승택, 마선영, 최승연 학사 등이었는데 나가라고 등 떠밀어도 남아있을 친구들이었어요. (웃음) 2003년 학사회 수련회는 저희들끼리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수련회에서 이재천 간사님이 학사운동은 10년 동안은 왜 그래야 하나 묻지 말고 헌신해야 한다며 학사운동의 장기적인 관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때 함께 수련회를 준비했던 7명의 남은 무리들이 ‘묻지마 1기’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수련회 이후 진정한 학사 자발이 뭘까, 우리가 제대로 학사 자발 운동을 해보자고 다짐하면서, 새삼스럽게 ‘나는요’도 하고 새 출발을 시도했습니다.  


그때, 이미순 간사님이 남서울 대표간사를 사임하고 학사회로 오셨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학사 자발성을 겨우 깨닫고 시작한 지 몇 주 만의 새로운 대표간사님의 등장에 당황스러웠죠. 남서울 학사회 리더들도 함께 참여하면서 리더 그룹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리더 모임에서 학사운동의 미래와 전략도 논의했으면 했는데, 계속 말씀과 기도만 이어지면서 수도권학사회가 양육 공동체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고 이로 인해 간사님과 갈등도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재천 간사님은 그분의 달란트대로 씨를 뿌리고, 이미순 간사님은 영적 훈련을 통해 싹을 틔우는 역할을 감당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때의 리더모임은 영적인 풍성함과 튼튼한 동역자 의식이 있었습니다. 간사님의 소개로 만난 자매와의 결혼 날짜를 리더모임에서 정해주기도 했고, 모든 멤버의 기도제목을 놓고 매주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미순 간사님이 학사회를 떠나신 후, 제가 대표간사 대행으로 협동간사가 되었습니다. 아쉬움은 왜 그런 구비가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후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거죠. 학사운동의 큰 그림의 일원으로서 수도권학사회가 어떤 축을 맡아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 같아요. 나름대로 미션을 만들었지만, YGM(Young Graduate Ministry)을 잘 해서 회복된 후 VGM(Vision Group Ministry) 운동을 하자는 정도였죠. 몇 달의 고민 끝에 만들었지만 추상적인 단계에 머물렀어요. 




* 수도권학사회가 교회 대체물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때의 사역 내용만 본다면 교회와 다를 게 없다고 문제 제기 할 수도 있겠습니다. 수도권학사회는 캠퍼스와 학사회를 연결시켜주는 Campus Link Ministry(졸업준비학교, Life Long Planning Camp), 신입학사를 구비시키는 사역(YGM)과 그 이후 비전을 찾고 만들어가는 사역(VGM)등을 중점적으로 했는데, 캠퍼스 사역과 연계성이 있는 다른 사역과는 달리 실질적인 운동성을 만들어줄 VGM 사역에 대한 모델이 없었어요. 경험도 없고 선배도 없다보니 이름만 바뀐 소그룹을 한 거죠. 간사들과 학사 리더들의 헌신으로 YGM과 캠퍼스연계 사역은 잘 되었지만, 그 이후에 대한 답이 없었기 때문에 헌신했던 학사들도 지쳐서 결혼, 직장생활 등을 이유로 하나둘 떨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열매를 못 맺은 이유의 핵심은 리더십의 부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리더들이 헌신적으로 멤버를 사랑하고 섬겼지만, 장기적인 전략이나 사람을 세우는 것, 운동성을 키워 나가는 것, 비전을 실제 모임에 녹여 내는 것 등을 어떻게 할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세대 간 리더십 전수가 잘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인 것 같습니다. 경험과 연륜으로 이끌어줄 선배가 없다보니 잠재력 있는 그룹이 형성되지 못했고 모임이 정체 혹은 축소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협동간사 겸 대표간사 대행으로 있던 시절에는 학사 중심의 운영위원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등 학사 자발성의 기초는 만들어졌지만 공동체의 서바이벌이 관건이어서 전략적인 부분은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문태언 간사님이 대표간사로 오시면서 오랜 논의를 거쳐 VGM과 YGM을 통합하고, 에클레시아 공동체 가운데 자연스럽게 자발적 운동성을 발굴하고 개발해 내는 시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가시적으로는 LGM만 남은 셈이 되었습니다. 캠퍼스연계 사역은 지금도 진로지도학교, 평생동역자캠프로 이름이 바뀌어 잘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공동체 전체적으로 보면 지향점은 운동에 뒀으나 역량과 전략이 없었고, 결국 운동을 위한 공동체성만 남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을 키우고 남겼다는 감사함과 자부심은 있으나 학사운동의 모델을 만들지는 못했다는 아쉬움이 큰 부분입니다.  



* 지금하고 계신 일에 대해 나누면 좋겠습니다.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사회와 교회에서도 역할을 감당하고 계시고요. 이를 어떻게 조정하고 계신가요?


산업자동화 분야의 B2B 중소기업인 회사에서 부문장과 3개 팀의 팀장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제품기획, 홍보, 신규사업 개발 등 서로 성격이 다른 업무를 책임지다 보니 업무의 강도가 작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배워야할 것들도 많고, 실무와 관리, 코치 업무를 같이 해야 하고, 업무 특성상 해외 출장도 자주 다니는 편이라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여유가 별로 없는 건 사실입니다. 


가정에서는, 아내를 만나 교제하는 1년 동안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고 결혼 후 8년 동안도 거의 싸우지 않았는데, 유일한 갈등의 원인은 학사회였습니다. 학사회에서 만났는데 학사회 때문에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인 거죠. (웃음) 평소에는 회사일로 야근하고, 회사일을 조정할 만한 날에는 학사회 모임에 가니, 결국 집에는 매일 늦게 들어가게 되고 아내 입장에서는 반가울 리 없죠. 수도권학사회 협동간사 외에도 중앙학사회 실행위원, [소리] 편집위원, 작년엔 전국학사수련회 준비위원, 교회에서는 소그룹 리더 등 이것저것 맡은 역할에 조금씩만 시간을 떼는데도 가정에 소홀하기 쉽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를 얻다보니 사회적으로 활발히 활동해야 할 시기와 가정에 좀 더 충실해야 할 시기가 겹치는 것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저의 핵심 과제는 생활과 일 사이의 균형이었습니다. 최근 얻은 인사이트는, 통합이에요. 각각의 영역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균형보다는, 하나님나라 관점에서는 일과 가정 그리고 사역 모두가 서로 다른 일이 아닌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요소이기 때문에 통합적 관점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가정과 교회, 학사회와 직장을 그때그때 우선순위에 따라 보다 유연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가정 때문에 회사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고, 해외 출장이나 학사회 때문에 가정이 감당해야 할 부분도 있는 거죠. 아마도 오늘을 살아가는 학사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회사 일에 더 열심을 내어 인정받고 재정적 여유를 누릴 수 있지만 일정 부분 포기하는 것, 시간과 재정을 나와 내 가정을 위해 쓸 수 있지만 공동체와 나누는 것, 주말에는 편히 쉴 수도 있지만 주중에 수고한 가족을 위해 기꺼이 나의 시간을 내어 놓는 것, 아내는 아내대로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인해 남편과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하고 육아의 부담도 좀 더 많이 가지는 것, 그리고 이로 인한 아내의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것 또한 기꺼이 감당해야 할 고난(?)이지 않을까요.  


 특히 학사회에 관해서는, 학사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했으면 사역을 하다가 중도에 사라지는 학사가 되긴 싫어요. 물론 수도권학사회에서 제대로 회복을 경험하고 덕분에 아내를 만났다는 빚진 심정도 있지만, 모두 졸업하는데 너마저 떠나느냐, 우리의 선배는, 롤 모델은 어디 있느냐 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특히 문태언 간사님이 사임하시면서 제가 수도권학사회에서 빠지면 전체 역사를 아는 사람이 없어지더라고요. 현재의 리더십과 제가 거의 10년 차이가 나는데 제 상황만 돌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부담감으로 인해 최근 2년 여간은 정말 균형 잡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 그게 정말 고마워요. 학사님과 같이 역사를 지고 가는 사람이 없으면 안 되겠죠. 수도권학사회의 산 증인으로서 앞으로 IVF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면 좋을까요? 하프타임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을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작년 말부터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어요. ‘Business As Mission’이란 개념을 접하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업가가 아니더라도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역할로든 비즈니스를 하며 살 수 밖에 없거든요. 일상에서 미셔너리(missionary)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예전에 수도권학사회에서 이를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잘 안되었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해보자는 말만 하고 있어요. 어떻게 모델을 만들며 살아갈지, 또 그런 삶의 방식을 어디서 배우고 누구와 같이 실험하며 만들어갈지 고민입니다. 


다만 적어도 향후 몇 년 동안은 지금까지 10년 동안 수도권학사회에 있었던 모양과는 다르게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모양일지는 몰라도, 이제는 수도권학사회와는 독립하는 게 저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유익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저에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과 같은 모험이에요. 졸업 이후 하나님나라 운동과 학사회를 따로 떼서 생각하지 못했는데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단순해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요. 하지만 회복되고 벗겨져야 할 것도 많고, 욕심과 교만도 있고, 삶이 중요하다면서 골방에서 기도 안 하는 것도 있고요. 그런 신앙의 기초에 대해 현재 다니는 교회에서 계속 돌아보게 해주는 것이 참 감사한 부분입니다. 계획주의자가 아니어서 내년이 어떨지 후년이 어떨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떠나라 하셔도 아쉽긴 하지만 큰 후회는 없고요. 40대인데도 여전히 안정적인 게 없고 내일 일을 모르겠네요. 현재로서는 지금 하고 있는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키우면서 준비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평범한데, 제가 깨달은 것은 어디에 가서도 지금처럼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회사 일 잘 하고 학사회 모임 잘 하고 가정을 잘 돌보면 그게 미셔너리의 삶이 아닐까 합니다.  


아직 하프 타임을 제대로 못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인생의 후반기에는 내가 이렇게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고 있다고 삶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 가슴에 와 닿는 진솔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그간 수도권학사회를 지탱해온 학사님의 존재 자체가 귀했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후배 학사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동체를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소리] no.212=2014.02+03

소리가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