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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사람] 소리이음

다양한 운동이 움트는 학사 공동체를 위하여_한철호

학사운동의 역사를 만나다 #1

다양한 운동이 움트는 학사 공동체를 위하여




[소리]에서 이시종 간사(학사회 총무, 본지 편집장)가 IVF 학사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셨던 간사들과 학사들을 만나 그들이 지녔던 비전과 사역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학사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이 여정의 시작으로 학사회 첫 전임간사였던 한철호 간사(강원대75, 선교한국 파트너스 상임위원장)를 만나 나눈 대화를 옮깁니다. (진행 이시종 편집장 / 정리 편집부)



왼쪽 한철호 간사(강원대75), 오른쪽 이시종 간사(학사회 총무)




* 김영철 목사님의 《IVF 50년사》를 보면 IVF 학사회와 학생회가 거의 동시에 조직된 것으로 나와 있는데, 간사님 이전의 학사회는 어떻게 운영되었습니까?


한국 IVF는 외국에 유학 갔던 사람들, 즉 졸업생들에 의해 시작되었어요. 이런 의미에서 학사회가 먼저 생겼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때는 몇 명이 모이든 상관없이 응집력이 강했죠.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 후원하는 것 자체가 학사회의 사역이었습니다. 



* 간사님이 학사회 운동을 위한 첫 번째 전임간사로 세워졌다고 들었습니다. 학사회 대표간사를 하셨던 기간이 언제인가요? 당시 공동체는 어떠한 기대로 학사회 담당간사를 세웠는지 궁금합니다.


88년부터 97년까지 학사회에서 사역했어요. 이전에 학사회 간사이셨던 현수일 목사님은 학부사역을 하시며 파트타임으로 섬기셨죠. IVF가 학생 중심의 단체이다 보니 초창기에는 학사회가 조직이라기보다는 동창회의 성격이 강했어요. 사역보다는 관리와 네트워킹을 위주로 했죠. 권영석 목사님도 TCF 간사를 하며 동시에 파트타임으로 학사회 일을 하셨어요. 나중에 IVF 총무로 역임하신 후 공부하러 떠나셨고요. 제가 오기 전까진 학사회 간사가 아무도 없었어요. 그때 유제필 학사가 학사회장으로, 박태웅 학사가 협동간사로 들어와 전문 연구 운동이나 세계관 운동을 했죠. 학사사역이 구체적으로 시작되다 보니 전임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해져서 전임간사를 물색하다가, 마침 제가 신학 연수 후 돌아올 때여서 학사회가 요청을 했어요.


제가 학사회 전임간사 제안을 받아들였던 이유는 유학 과정 중에 일어난 내적인 변화 때문입니다. 유학 전에 저의 신앙은 좁은 의미의 복음에 머물러 있었어요. 필리핀과 영국에서 유학하며 총체적 복음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마르코스의 퇴임 후 필리핀에서 일어난 사회운동에 필리핀 IVCF가 적극 참여했는데, 저도 멋모르고 따라갔다 당황하기도 했죠. (웃음) 그리고 필리핀의 가난을 경험하면서 복음과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으로 거처를 옮기며 공항에 내렸는데, 필리핀과 영국의 괴리감을 느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데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살 수밖에 없을까, 이 문제가 저를 사로잡았어요. 영국에서 공부를 하며 제 안에 통합에 대한 생각이 생겼고, 우리의 메시지가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이 복음에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보려면 학사회 운동이 적합하다고 결론 내렸죠. 



* IVF 공동체가 총체적 복음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보다 전략적으로 학사운동을 하고자 전임간사를 세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건 아니었어요. 자리가 비어서 왔죠. (웃음) 학사사역의 필요 때문에 간사를 세웠어요. 지금에 와서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잘못된 요구였을지도 모릅니다. 간사가 필요하면 학사 중 한 명이 했어야 합니다. 캠퍼스 간사들이 학생들을 전도하다가 이 사역을 돕는 간사로 남는 것처럼, 학사들 중에서 학사사역의 간사로 헌신했어야 하죠. 캠퍼스 간사 출신의 학사회 간사는 제가 마지막이길 바랐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거예요. 월급을 적게 받더라도 미래를 내려놓고 이 운동에 헌신할 학사들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 당시 학사회 사역의 주된 목표와 내용들을 말씀해 주십시오.


여러 가지 연구모임을 만들었어요. 제가 전임간사였을 때 세계관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각 영역별로 초기 모임이 구성되었어요. 이런 모임들이 운동으로 넘어갔어야 했는데, 스터디 그룹의 형태로 머물게 된 것이 아쉽습니다.


80년대의 이슈는 민주화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5년 또는 10년 이내에 끝난다고 봤어요. 서양을 관찰하니 민주화 이후 사회에서 일어날 중심적 이슈는 생명의 문제였습니다. 낙태, 고아, 성, 동성애 등이 모두 이쪽 계열의 문제죠. 또 다른 하나는 미디어였어요. 이 두 가지가 미래사회의 동인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디어 모임과 생명을 아끼는 모임을 만들었죠. 미디어 모임의 경우, 그때는 프로덕션보다는 미디어에 어떻게 영향력을 미칠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낙태는 그 자체보다 생명의 문제인데, 당시 개신교에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가톨릭에서만 다뤘죠. 네다섯 명이 모였는데, 모두 싱글이었기 때문에 결혼한 사람에게 가서 이 주제를 말하기가 부끄럽기도 했어요. (웃음) 낙태, 입양, 성도덕 문제가 모두 걸려있었고요. 안락사로 주제가 넘어가니 세계관의 문제가 됐어요. 안락사는 사람에게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권한을 주는 것인데,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은 누구인가, 이런 문제였죠. 당시 저희 모임 외에도 낙태 문제에 관심 있는 개인이 있었어요. 우리가 운동을 해봤으니 이 시점에 무엇을 해야 할지 감각이 있었는데, 연합 구조로 가야 한다고 봤죠. 그래서 연합을 했고 현재는 ‘낙태반대연합’이라는 전국적인 단체가 되었죠. 이렇게 운동을 길러내는 것이 우리의 꿈이었습니다.




* 함께 학사 운동을 했던 학사님들은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특별히 저희 공동체가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분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앞에 언급했던 박태웅 학사가 있습니다. 외대 졸업 이후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부하셨어요. 이분이 저를 끝까지 후원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홍병룡 학사(전 IVP 간사), 최재철 학사(현 전북대 교수)도 세계관 운동을 활발히 했습니다. ‘미디어 모임’과  직장인 전도 모임인 ‘강남제비운동’을 했던 이배원, 전제형, 김보미, 송복순 학사 등도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김재원 학사님, 유제필 학사님, 전재중 학사님 등에게 IVF가 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재원 학사님은 지금도 60-70 학사들의 네트워킹을 정말 잘하시고, 유제필 학사는 오랫동안 학사회장을 맡아 간사가 없던 시기에도 수련회를 꾸리고 사역을 했어요. 지금도 IVF 일이라면 만사를 제처 놓고 앞장서고 있구요.



* ‘6개대 사태’ 이후 학사회 사역이 많이 바뀐 것으로 압니다. 학사들이 대거 이탈하고 방향성의 혼란을 겪었는데, 그것이 학사회 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학사운동이 전문 연구 운동으로 일어난 건 77학번부터 85학번으로, 이들은 한 그룹입니다. 이들은 캠퍼스에서 송인규 목사님에게 훈련을 받았고 전과는 달리 학교별로 모였어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시작했던 것도 이들이고요. 6개대 사태로 85학번 이후의 학사들이 사라졌어요. 이전 학번의 학사들도 빠져나갔고요. 그래서 인적자원이 없다 보니 제가 사역했던 시기 이후에 전체 학사회가 영성 중심의 모이는 구조로 바뀌게 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운동을 해야 하는데 6개대 사태에 모두가 연관되어 있었죠. 그러면서 학사회가 힘들어졌어요. 영향이 컸죠. 6개대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학사회라고 봅니다. 캠퍼스는 어떻게든 보충되는 구조이지만 학사회는 고이는 구조이기 때문이죠. 



* 학사회 흐름이 중간에 끊겨서 아쉽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이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소리] 지면을 빌려 이런 분들을 발굴하려고 합니다.


학사들을 IVF 안에 묶으려 하면 잘 안 될 거예요. 자신의 세대들끼리 묶어야겠죠. 소위 ‘형님-아우’가 되는 관계 안에서만 될 수 있다고 봐요. 그들이 IVF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영향력을 미치도록 만드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IVF 밖에서 영향을 미치면서 나는 IVFer다, 라고 말하는 게 진짜 영향력이죠. IVF를 자랑스러워하도록 그들을 존중하기만 해도 됩니다. 나이드니 어른들의 섭섭한 마음을 알겠어요. 섭섭하지 않도록 해주는 건 IVF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고, 그게 네트워크죠. 이건 한국사회의 장점이자 약점이에요. 관계에 에너지가 많이 들죠. 행사 하나를 하면 축사, 격려사가 열 가지는 되고 각종 직함이 많습니다. 우리의 한계이죠. 거기에 말려들어선 안 되지만,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후배들도 그들끼리 이야기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페이스북과 같은 SNS가, 직접 만나지 않아도 만나는 것 같은 역할을 하듯이 어떤 매체를 만들면 좋겠습니다. [소리]에 60~70학번들의 페이지를 만든다면 90년대 학번 학사들은 크게 관심이 없을 겁니다. 이런 이중적인 부분을 어떻게 이뤄낼 수 있을지 고민이 되죠. 벌집과 같은 구조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학사회를 전담하는 간사를 세우고 학사 사역을 시작한 지도 거의 4반세기가 지났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사 운동은 지속되어 왔습니다. 지난 2012년 전국학사수련회 이후, 잠재됐던 학사 운동의 열망이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앞으로 학사 운동의 방향이나 사역에 대한 간사님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내면 캠퍼스 간사들이 동의하지 못할 수 도 있어요. 캠퍼스 사역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왜 중고등부 사역이나 군대 사역이 아닌 대학생 사역을 하는 걸까요? 예컨대 제가 한 명이라도 더 믿게 하려면 군대에서 사역했을 거예요. 제가 대학생 사역을 했던 이유는 대학의 기능 때문이에요. 전도를 통해서 미래의 리더십을 키워내고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줄 사람을 길러내는 것, IVF의 존재 이유도 그것이겠죠. 그런데 막상 우리 학사들이 그렇게 못살고 있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잘 못사는 사람들을 혼낼 것이 아니라 캠퍼스사역 프로그램을 바꿔야겠죠. 제가 현재 캠퍼스 간사라도 듣기 거북한 이야기지만 어쩔 수 없어요. 논리적으로 그렇게 갈 수밖에 없어요.


학사들을 교정하고 훈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학사들의 영성훈련 장소는  그들이 평생 다니게 될 교회입니다. 그런데 만일 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IVF는 교회 구조를 하지 않으니, 학사들이 교회를 세우거나 변화시켜 스스로 교회 안에서 영적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죠. 모여서 고민하다가 우리의 영성이 허약하다 싶으면 기도하는 식으로 가야 하는데, 제가 보기엔 우리 학사들이 현실에서 힘들어 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이들의 영성을 채워주기 위해 학사회가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그러나 여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졸업 1~5년차 위주죠. 그 이상의 학사들은 잘 오지 않아요. 원래 의도는 학부 때 영성훈련을 끝났어야 하는데 과외공부를 하는 것이죠. 과외공부는 교회에서 일어나야 하지 않나 싶어요. 교회에 깊이 영적으로 뿌리박으며 운동을 할 때 학사들이 이 운동을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학사회는 학사들이 교회개혁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IVF 출신 신학생들이 모여 캠페인을 벌이고 이를 위해 성경공부도 할 수도 있겠죠. 과감하게 신학교에 가서 한 세대의 목사를 IVF 출신으로 채울 수도 있겠습니다. 성공하든 못 하든 우리의 명제는 세상과 교회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죠. 또 다른 예로, 만약 주부모임을 한다면 처음에는 애 키우면서 힘든 이야기를 주로 나누다가 운동이 점점 커져서 대안학교를 만들면 좋겠어요.  


졸업생의 질이 낮아지면서 운동의 의미가 거의 없어졌어요. 세속적인 의미의 운동, 즉 노는 것만 발전하고 있죠. 사회에서는 자원봉사가 대두되고 있어요.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자원봉사가 굉장히 활발해요. 이쪽으로 모금도 잘 되고요. 사실 이런 운동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죠. NGO, 자원봉사단체들을 보고 우리의 운동을 터뜨려야 합니다. 학사회 간사 차원에서는 학사들의 흐름 속에서 이슈를 발견하고 한 두 개의 아이템을 잡아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사들 안에 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게 학사회 간사의 역할이겠죠. 학사들은 이런 아이템 중 평생 해볼 만한 운동이라면 과감히 뛰어들면 좋겠습니다. 

  

  

* IVF 간사를 사임하신 이후 해외선교 동원 분야에서 오랫동안 사역하셨는데, 최근 선교 흐름 속에서 IVF 학사들이 어떻게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을지 말씀을 나눠주시지요. 


97년부터 IFES 동아시아 지역 학사회를 3년 정도 담당했습니다. 그후 선교한국에는 2000년에 들어왔어요. 저는 젊은이 운동에 헌신했기에 그러한 단체에서 부르면 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선교한국에 와서야 선교에 헌신했어요. (웃음) 


하나님이 성경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말씀하시는 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원하신다는 거죠. 민족과 족속과 나라와 백성과 모든 사람들 가운데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거룩에 이르는 과정일지라도 거룩이 모든 열방 가운데 확산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성경은 존재(being)과 행위(doing) 모두를 이야기합니다. 한국교회에도 동일하게 행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 또한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선교 자체 보다는 한국교회의 현실 때문에 문제가 돼요. 선교도 결국 양과 질의 문제입니다. 많이 보내는 것보다는 좋은 선교사를 보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현재 선교한국은 선교한국 대회와 선교한국 파트너스의 두 조직으로 분화되어 운영 중인데요, 제가 속한 선교한국 파트너스는 선교의 내용과 질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교육을 통한 동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지금 하는 사역이 만족스럽습니다.


IVF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학생사역 자체가 어려워져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 자체가 떨어졌어요. IVF에도 이전 학번들 중 많은 학사들이 선교지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20년 후에도 이런 일이 지속되려면 지금 캠퍼스에서 선교사로 많이 지원해야겠죠. 캠퍼스 훈련 자체도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이런 수고를 간사들이 압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기대와 도전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학생운동이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상관없이, 간사들이 지닌 정체성과 자존감 혹은 자존심을 가지고 사역하길 기대합니다. 


저도 제가 말하는 것처럼 사는 게 제 목표인데요, 학사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꿩 먹고 알 먹고 털 뽑아 부채 만들고 둥지 틀어 땔감 쓰는 인생을 따라가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야만 선교에 대한 눈이 열리고 이웃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 같아요. 모두가 힘든 시기이지만 실제적으로 밥을 못 먹어서 굶어 죽는 사람은 없는 시대입니다. 남들과 비교하면 내 상황이 어렵지만, 기왕 취업 안 될 바에 우리끼리 뭉쳐서 뭐 하나 해보자, 하며 좋은 일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의미 있고 창의적인 일을 하겠다는 태도와 그런 정신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물론 과정이 힘들겠지만 인내하면서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IVF 학사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 한 줄 인사 나눠주시지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우리가 배웠습니다. 어떻게 행복해지는지 비밀을 IVF를 통해 배워 알고 있으니 그 비밀을 따라 살면서 삶이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 간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개인적으로 학사운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이 정리되어서 좋았습니다. 간사님이 지녔던 학사운동 비전이 후배들에게 젖어있고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앞서 하신 말씀들이 여전히 살아 있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어려웠지만, 지금은 우리 운동의 방향성을 다시 잡아가는 데 있어서 맥락도 달라졌고 인적 자원도 쌓였습니다. 운동을 열망하는 학사들도 많고, 이미 하고 있는 학사도 많습니다. 과거에는 간사들이 학사들을 직접 만나 가야할 길을 제시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사들이 더 잘 알고 있고요. 이들을 어떻게 모으고 연결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될 때, 간사님 말씀대로우리 내부뿐 아니라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뜻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리] no.210=2013. 10+11 

소리가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