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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_김병년

[소리] 2016년 세 번째 소리- 0506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시간적 차이가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시다

 

, 형수의 죽음을 언제 생각했어?”

아내를 잃은 선배목사님을 조문하러 간 자리였다. 밤이 깊은 시간이라 빈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눈길에 또렷이 눈물이 맺혔 다. 나지막하게 그가 말했다.

한 번도그의 대답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중병을 앓는 가족을 둔 사람들은 늘 죽음을 염두에 두는 법인데, 불치병을 가진 아내와 살면서 죽음을 한 번도 생각지 않았다니. 잠시 숨을 가다듬고 나서 선배목사님이 말을 이어갔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 난 살 줄 알았어.”

장례를 치르느라 퀭한 눈에 회한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후회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환자실에 입원하지 말 걸.”

예기치 못한 발병으로 인한 응급 상황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회복이 어려운 질병일 경우는 병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어야 한다.

, 마지막 순간까지도 죽음을 생각 못했다는 게 말이 돼?”

애석함과 의아함에 언성이 높아진 내 질문에도 그는 차분하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내 눈엔 호전되는 것처럼 보였거든. 의사들이 치료하는 것들이 이전과 달리 기대감을 갖게 했지.”

중환자 아내를 두고 있는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중환자에다 불치병이잖아요.”

낫는다는 기대감이 있었거든. 난 그게 믿음인줄 알았지.”

병원의 몇 가지 처치에 아내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타나더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을 거라고 확신했었다고.


  이처럼 우리사회는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익숙하다. 죽음을 삶의 실존으로부터 배제함으로 고난과 고통으로 죽어가는 자들을 가치를 상실한 인간으로 보고 망각하는 데 익숙하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이런 현상으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모든 과정에서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만다. 오히려 치료에 집착하여 기술적으로는 성공적인 수술이란 평가를 받지만 몸은 서서히 약해져간다. 의학이 발달할수록 생명과 죽음을 오가는 위급한 순간의 결정권을 전문가의 손에 맡기고 그들의 의학적 경험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그 결과, 나이 들어 죽어가는 과정을 가족들이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살리려는 노력이 오히려 가족과 환자 사이를 떼어놓고 서로의 소통을 배제시 킨다. 그로 인해 가족들은 사랑하는 이의 생기있는 육체가 시들어가는 동안 가까이서 지켜보고 함께하지 못하다, 결국 차갑게 식은 시신으로 만나게 된다. 이별의 과정이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후회하는 불행한 삶과 재정적인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는 불편한 삶을 초래하기도 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죽음을 죄의 형벌로 받아들이고 죽음의 세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대립한 다고 여김으로 죽음을 하나님의 통치영역에서 제외한다. 죽음을 죄와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산 자들의 영역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으로 생각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관계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음마저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임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죽음을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1;23).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으로 인도하는 길이 바로 죽음이었다.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시다(14;9). 육체적 죽음은 부활 신앙을 통하여 죄의 영원성을 단절시키고 죽음을 유익하게 만든다.

 


 

죽음은 삶의 한 과정이다

 

  의학의 발달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당히 늦춘 것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나 결국 회복할 수 없는 내리막길에 도달한다. 나이가 들수록 단단했던 뼈는 약해지고, 부드러웠던 근육은 굳어지고, 혈관은 칼슘이 쌓여서 막힌다. 해는 반드시 진다. 지는 해처럼 우리 자신 또한 노화하거나 병들어 급격하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임을 수용하면 지는 해조차 황홀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아내가 중병을 앓게 된 후로 나는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아픈 이들과 그 가족들 앞에서 죽음을 말하는 게 어쩌면 큰 무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환자들에게 죽음을 언급함으로써 훨씬 실제적인 삶을 제안할 수 있다.

집사님, 아버님이 돌아가신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가 속히 일어나도록 기도를 부탁하는 집사님 부부에게 말했다.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나는 온가족을 병원으로 모아 주십사 부탁 했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환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다시 말했다.

죽는 것 아시지요?”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환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라고 대답하는데, 아내와 딸은 아니라고 한다.

당신은 사명이 있으니까 아직 안 죽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 반응을 보면서 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직 힘이 있을 때,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을 때유언을 남기도록 하세요. 기력이 다 빠져서 아무 말도 못할 때 한마디만 하시라고 절규하는 가족들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말이라도 알아듣고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충분히 나누세요.”

나는 다시 뵈러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헤어졌다.

 

  서너 달 지나 다시 심방을 갔다. 이번에는 병원이 아니라 집으로. 폐에 물이 차서 의사가 어렵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계신 분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유언을 남기셨는지 확인을 했다. 그러고 사흘 뒤,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시신을 안치하는 입관예배에 유가족들과 함께 참석하여 예배를 인도하였다. 시신을 들어서 입관하는 마지막 순서를 위해 모든 유가족을 밖으로 나가 도록 했다. 창문으로 장례사들의 행동을 담담히 살피던 권사님이 문득 한마디 하셨다.

목사님, 우리 남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 줄아세요?”

고인은 몇 달 전 병원에서 내가 부탁한 대로 가족 들을 모아서 한 사람씩 유언을 남겼고, 아무 회한이 없을 정도로 자세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죽음의 과정에 임하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고인의 마지막 말이 뭔 줄 아느냐고 하니 가족들이 모두 놀란 눈치였다. 옆에 서 있던 가족들은 자신들에게 한 유언 말고 엄마에게만 남긴 특별한 유언이 있었나 싶어 모 두들 귀를 쫑긋 세워 권사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족들에게 돌아가면서 유언을 마무리한 뒤 아내 혼자서 간병하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입을 열어서 뭐라고 말을 하는데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희미했다. 입 모양을 보고 추측해서 되물어도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하셨단다. 그래서 펜을 들고는 입 모양을 보고 받아 적어 예, 아니오를 반복하며 확인하니, 마지막 유언인즉 이랬다.

팔이 등에 끼어서 저려요. 팔 좀 빼주세요.”

입관하는 자리였는데 온 가족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돌아가신 집사님이 참 유머가 넘치시네요.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죽는 순간에도 웃음을 남기셨을까.”

시신을 앞에 두고 웃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준비된 죽음을 맞이하는 여유로부터 오는 축복이 여기 있다. 유가족들이 내게 한 얘기인즉 이랬다.

후회는 없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을 많이 하고 가셔서요.”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심각하게 정체성을 고민한다. 죽음 앞에 설 때 자신의 존재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을 돌아본다. 그래서 죽음 앞의 시간은 용서가 일어나는 순간이자 화해하고 축복하는 순간이 된다. 그런데 죽음을 부정하고 조금이라도 더 낫게하려는 갈망과 치료 행위로 인해 그 용서와 화해와 축복의 시간을 보낼 거룩한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저물어 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을 환자 홀로, 그저 환자로서쓸쓸하게 보낼 수밖에 없는 격리와 고립을 초래한다.

죽음은 삶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죽음이 온가족과 헤어짐을 불러오기에 잔인하고 무섭지만, 반면에 생물학적인 삶의 한계를 인정하는 법을 배우고 한 사람의 삶이 완성되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의 주된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소요리문답의 첫 질문에서 사람의 주된 목적은 영어로 하면 ‘Man's chief end’이다. 인생의 목적을 묻는 소요리문답의 첫 질문은 그 목적(end)이 드러나는 순간이 인생의 마지막(end)임을 알려준다. 인생의 끝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삶의 목적을 깨닫게 한다. 끝은 우리 삶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의미와 목적을 부여한다.

  삶의 끝인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이다! 우리는 대체로 중병과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무서워 죽음의 이야기를 피한다. 그러나 죽음의 이야기를 피하는 순간 결국 삶도 회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다.

현실을 회피한 채 자신이 바라는 가상의 세계로 스스로를 몰아가는 이들은 그 바람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삶이 훨씬 더 의미 있게 흘러간다. 의미 있는 삶은 죽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죽음 또한 중요한 삶의 한 과정이니까.

 


 

이 죽음의 잔을 들겠느냐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 하고 맞이한 죽음은 안식을 준다. 강남순 교수께서 어느 잡지에 기고했듯이, ‘피해자 의식을 벗고 주 체자 의식으로 살아가는 삶의 변화가 아픔을 끌어안고 최선으로 살아가는 삶을 제공한다. 소중한 자신의 삶을 지금누리는 법을 배우게 한다. 삶의 유한함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원하는 욕구가 채워질 때까지 계속 많은 것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진리를 수용하면 미래의 갈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며 살아간다. 더 많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누리는 것에 자족하며 살아간다. 더 많은 관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맺은 관계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아픔이 찾아와 돌이킬 수 없는 운명 앞에 서게 될 때 더 나아진 상태를 바라는 삶은 현재누려야 할 모든 것을 미래로 미루고 살아가는 삶이다.


  더 나아진 상태를 위해 낫게 하지 못하는 것을 의학 기술로 시도해 보려는 순간, 아픈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무시당한다. 아픔 자체를 거부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다. 곽혜원 교수는 그의 책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에서 죽음을 금기시함으로 "비인간적이고 무책임한 존재로 만듦으로.... 눈에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에만 얽매이는 가운데 더 많은 물질의 소유, 명예와 업적, 지위와 권력, 향락과 쾌락에 집착하는 삶의 자세를 갖게 될 수 있다."라고 했다. 죽음에 대하여 냉소적인 인간이 어떻게 이웃에 대하여 자상하고 자연물에 대하여 관용할 수 있을까 자문한다. 죽음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회는 고난과 폭력에 대하여 눈감는 사회가 된다. 그러나 죽음을 자각하고 죽음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낄 때 이 사회는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


  헨리 나우웬이 쓴 이 잔을 들겠느냐를 조용히 꺼내어 읽는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잔을 들겠느냐고 물으시니,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라고 답했다. 제자들은 그 잔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지도 않고 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 잔을 드는 일은 죽음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죽음을 삶의 과정으로 인정하고, 능동적으로 수용하며, 주체자 의식을 가진 삶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제자 들처럼 헌신의 표시로 잔을 들든지, 자연스런 노화로 잔을 들든지,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잔, 죽음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음의 잔을 들어야 하는 삶으로 초대받았다.


너도, 이 잔을 들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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