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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독립, 낯선 천장의 미묘한 두 얼굴_김세종

[소리] 2016년 두 번째 소리- 0304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시간적 차이가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독립, 낯선 천장의 미묘한 두 얼굴



 

  내가 배운 사회 초년생의 재테크 팁에는 이런 게 있었다. 부모님 집에 살 수 있을 때까지 가능한 오래 붙어 있으면서 그 기간에 최대한 돈을 모으라는 조언이었다. 주거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이 지출을 줄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거다. 나는 ‘(부모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결혼하기라는 재정 목표를 세우고 돈 나갈 구멍을 최대한 줄여서 빨리 돈을 모으고 싶었다. 자연히 독립이란 건 결혼 이후에 하는 걸로 굳어졌다. 게다가 직장 생활에 적응하고 프로그래머로서 실력을 키워야 했기 때문에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출퇴근 시간조차 아끼려고 회사에서 잠을 자며 일했다. 그런 와중에 교회와 학사회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삶은 충분히 벅찼다.


  정신없는 사회 초년생 시절을 보내고 나니 일에 자신감이 붙었다. 조직생활에도 적응하여 어려움이 줄어들 무렵, 가정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가 생겼다. 돌아보면 우리 집은 그리 좋은 가정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로맨스가 아니라 책임감으로 사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셨다.


  “너희(누나와 나) 때문에 산다.”를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관계가 깊어가기보다는 늘 같은 지점에서 부딪히는 모습을 보이셨다. 이제는 이해할 법도 한데 답답하리만치. 이럴 거면 굳이 같이 살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러니 내게는 결혼에 대한 기대가 없었을 정도였다. 가정에 대해 고민하며 순탄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기에 자녀는 부모를 닮는다는 말이 참 무서웠다. 내가 싫어하는 부모님의 어떤 모습이 내게서 그대로 나올까 봐 무서웠다. 부모님의 모든 점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닮고 싶지 않은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그대로 방치하면 나도 자연스레 반복하게될 거 같았다. 부모님으로부터 묻은 때가 많다 느낄수록, 이게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자각을 하면서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버려두다가 누군가와 결혼해서 둘이 풀어나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니 끔찍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눈물과 상처를 줄 것만 같았다. 사랑하기만 해도 부족한 시간인데미리 풀어나가기 시작 하면 좀 더 수월하지 않겠나, 어떻게든 해보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집을 떠나기로 했다. 이런 집에서 벗어나는 건 문제 앞에서 도망가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미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해보지 않았던가. 결혼 전에 몇 년 더 집에 있어 봐야 우리 집이 크게 더 변하진 않을 거 같았다. 그렇게 변할 거였으면 벌써 변하고도 남았지, 이제는 그냥 내 갈 길을 가면서 집 안에서가 아니라 집 밖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보자고 방향을 틀었다.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 집에 같이 살면서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내가 드러나고, 신뢰하는 친구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밟아보 자고 결심했다. 집에서 나가서 살면 월세, 식비 등으로 일 년에 500만 원 정도 쓰게 될 텐데, ‘그만큼 더 모은 나보다 부대끼며 좀 더 깨어지기로 선택한 나를 좋아해줄 한 사람을 만나고 싶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친구들과 살아보는 길을 선택했다.



  시작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선에서 대부분 처리할 수 있어서 그랬다. 학생 때라면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했겠지만 직장을 다니며 모아둔 돈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딱히 이해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독립에 대해 부모님의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그냥 내 입장을 설명해 드렸다.


  사사건건 부딪힐 게 뻔했으니까. 부모님은 내가 회사 근처로 이사를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먼 곳으로 이사 간다는 사실을 제일 이해하지 못하셨다.


  나는 내가 신뢰하는 친구들과 같이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했으니까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출퇴근 거리는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결혼 전에 누군가와 같이 살아보겠다는 나의 의견도 필요 없다고 일축하셨다. 어차피 닥치면 다하게 된다고 하셨다. (하긴, 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는 부모님과 많은 부분에서 기준이 달랐기 때문에 피해가는 걸 선택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고맙게도 같이 살 친구들을 모으는 게 제일 쉬웠다. YGM의 소그룹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같이 살자고 하니 어렵지 않게 합류해 주었다. 그간 소그룹을 허투루 하지 않았구나, 안도감이 들었다. 3 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12명의 친구들이 내가 사는 집을 거쳐 갔다. 결혼해서 나가기도 하고, 개인 공간이 필요해서 나가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 이사도 했다.


  돌아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누구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천차만별, 각양각색의 일이 일어났다. 함께 살면서 각자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경험이 충돌했다. 그런 청소 방식이 너희 집에서는 당연했을 테지만 그건 너희 집에서 그랬을 뿐이야, 다른 집은 어땠는지 얘기해 보자고도 했다. 서로 마음이 상해서 한동안 본체만체 지내기도 했고, 당시에는 그 조언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서야 아하 그렇구나, 하고 떠오르기도 했다.


  함께 살면서 나는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걸 배웠다몇 시간이고 대화를 이어가면서 얘기하고 설득하고 공감대를 찾아가는 걸 배웠다. 잘 낙담하고 포기하는 나와는 다르게 앞에 있는 이 사람과 대화가 통할 거라고 믿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각기할 일을 하다가 자연스레 거실 탁자에 모여 앉아 대화하는 걸 배웠다. 갑작스레 이야기가 깊어지면서 야식과 함께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독립해서 살고 있는 게 부모님과의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독립 이후 부모님과 같이 보내는 시간의 절대량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만큼 나는 부모님과 멀어진 것일까? 나는 집을 나오면서 마음도 같이 독립했다. 마침 서른 살쯤 되었을 무렵이어서, ‘이 나이쯤 되었으면 이제 남 탓, 환경 탓 그만하고 살아보자.’라며, 덜 핑계 대는 삶을 살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부모님께도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내가 만들어낸 기준과 기대를 버리고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해보자고,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하자고 생각했다.



  어느 날,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다. 평소처럼 장난스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크게 화를 내셨다. 자기는 이렇게 아픈데 농담이나 하고 있냐면서 화를 내시는 것이다. 나는 무척 당황했다. 워낙 자기 얘기를 잘 안 하시는 분이라 나는 아버지가 어디 편찮으신지도 몰랐던 거다. 물론 아버지 나름의 맥락이 있었겠지만 내 맥락에서는 아닌데... 좀 알려주지...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아버지가 이렇게 살아오면서 주위 사람들을 밀쳐냈을 거라서, 그래서 외롭게 사셨을 거라서 마음이 짠했다. 이런 나의 감정은 어쩌면 아버지를 그냥 한 사람으로 보았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내가 친구들을 모아서 함께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자연히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그런지 중재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부모님이 싸울 때 예전 같으면 그냥 빨리 끝나길 기다렸을 텐데, 나도 모르게 두 분 사이에 개입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한 게 이런 뜻인 거 맞죠?” 하면서 말이다. 친구들과 살면서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걸 배웠기에 예전에 마음속으로 포기했던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고 생각을 전하는 일이 조금씩 가능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독립한 첫 날, 이사를 마치고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문득 올려다본 천장이 어찌나 낯설던지! 그때의 미묘했던 감정을 잊기 어려울 거 같다. 이게 과연 잘한 일인지, 괜한 짓을 벌인 건 아닌지 긴가민가하던 나, 독립해서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인생을 살기로 작정했던 그때의 나를 추억한다. 그리고 지금의 이 시절이, 친구들과 복작거리며 살고 있는 이런 경험이, 부모님과 누나와 함께 지금껏 만들어온 가정과 앞으로 자매를 만나 이룰 가정, 이 두 가정에 모두 좋은 영향력을 끼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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