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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떠나보내면서 동시에 기억하라_방현주

[소리] 2013년 6월호(통권208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시간적 차이가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 편집주 






"미안해, 사랑해..." 자살 유가족의 사투(死鬪)


꿈에서라도 겪고 싶지 않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마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을 "자살 유가족, 자살 생존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하루에 약 170~350명 정도의 자살 유가족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미 우리 공동체에도, 교회에도 자살 유가족이 많습니다. 그들은 죄책감과 분노와 원망이 뒤섞인 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침묵을 깨는 것이 상처 치유의 첫걸음이라고 하더군요. 자살로 우리 곁을 떠났으나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드러내놓고 마음껏 추억하고, 그리워하며, 잘 떠나보내는 작업이 이제 우리 안에서도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000 알지?”

“응”

“그 친구가 죽었대...”

“뭐? 아니 어쩌다가?”

“자살했대...”

“........................................................”



우리는 이런 소식을 들으면 대개 다음에 할 말을 잊는다. 머릿속은 순간 하얗게 변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빠진다. 우리 문화에서 죽음이라는 것 자체도 금기시 되는 주제인데 하물며 예기치 않은 죽음이랴. 특히 그 죽음의 양식이 자살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죽음의 양상에 따라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도전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가족


한 가족에게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예측되는 사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자녀의 출산, 자녀의 입학, 졸업, 결혼, 여러 가지 집안 대소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혀 예측되지 않았던 갑작스러운 가족 사건이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대개 가족은 옆에서 임종의 과정을 지켜본다. 임종과정은 가족으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지금까지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던 사람을 보내고, 그 변화를 맞이하게 할 준비를 하게 한다. 그리고 인생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며 일상의 삶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을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자살은 임종의 과정을 생략하는 죽음이다. 가족은 전혀 보호받지 못한 상태에서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여러 가지 절차를 밟아야 하며, 거기에 장례 절차까지 진행해 나가야 한다.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죽음은 다양한 상실을 포함하는데, 무엇보다도 죽은 당사자의 상실, 역할과 관계의 상실, 완전한 가족단위의 상실,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기대나 소망의 상실이다. 가족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모든 상실을 감당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살은 우리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볼 때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되는 죽음의 방식이다. 남은 가족들은 질병으로 사망한 경우보다 자살에 의한 사망에 대해 주변으로부터 무언의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들은 제대로 작별인사를 나누지도 못하고, 충격을 오롯이 느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자살은 가족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 중의 하나이다. 이런 중요한 상실은 가족관계에 연쇄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배우자, 부모, 자녀, 형제, 확대가족까지... 심지어 죽은 사람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에게도, 남겨져 있는 가족 구성원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도 이 고통은 영향을 미친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은 충격으로 인해 수치심과 죄책감이 깊어질 수 있다. 자살한 사람을 향해 분노와 원망을 쏟아낼 수도 있으며 좌절감과 분노가 뒤섞여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런 불안정함 때문에 가족들은 서로에 대해 혹은 이웃에 대해 정서적으로 가장 의존해야 할 시기에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






공동체

  

그 사람이 속했던 공동체도 불안정한 시간을 겪는다. 어떤 사람이 예기치 않은 시점에,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죽었을 때, 우리는 미리 짐작해서 상실에 대비하거나 미진한 일을 처리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저렇게 했을 것이라는, 고통스러운 후회와 슬픔, 자책감을 가지게 된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왜 나는 그의 고통을 몰랐고 더 도와주지 못했을까?”

“그 전화가 마지막 연락이었다니...”

“그때 만나고 싶다는 말을 왜 그리 대수롭게 여겼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시달리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만 보다가 슬그머니 덮어두고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쉬쉬하면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것도, 그 가족을 대하는 것도 조심스럽고 주저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가슴 아파 어쩔 줄 모르는 슬픔의 와중에 있는 가족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일은 최소한 없어야 한다. “다른 죄는 몰라도 자살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던데.” 라고 운운하면서 수군거리는 일은 정말 금지해야 한다. 이 얼마나 잔인한 반응인가!






가족과 공동체  

  

자살한 이의 죽음 앞에서 이랬을까 저랬을까 애써 따져보던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가족에게도 공동체에게도 결코 순탄하지가 않다. 우선은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단지 지금의 상황이 이 순간의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족을 어떻게 대할까, 그들을 어떻게 도울까, 하는 고민보다 공동체의 받아들임이 먼저이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은 판단을 배제한 인정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주저함은 우리가 먼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상실을 받아들일 때 매우 중요한 요소는 경험의 공유이다. 이것은 ‘충분한 애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애도과정을 통해 남은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얻을 뿐만 아니라 그 기회는 다시 정서적 유대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애도가 없으면 많은 것들이 암묵적 비밀로 묻히게 되고 이것은 다시 개인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왜곡시킨다. 관계의 협력과 보호적 유대가 필요할 때 오히려 관계가 회피 되고 닫히게 되는 것을 본다. 상담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가족들 중, 어떤 부분에서 계속 막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가족이 있다. 그런 경우, 대개는 무언가 암묵적인 비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이런저런 탐색을 해보게 된다. 그러면 발견하게 되는 것이 가족구성원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몇 년 전, 한 내담자는 배우자가 가정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우울을 호소하며 상담실을 찾았다. 그러나 실제 그 가족이 안에 품고 있었던 것은 자녀의 죽음이었다. 아이는 사고사였지만, 장례 직후 아이는 그 가족에게서 즉시 사라진 존재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 일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여겼다. 하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담자의 형제들 중에서 자살한 형제가 있었고, 이로 인해 가족은 수치심과 자책감을 견디지 못해 오랫동안 거주하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십 수 년을 살아왔다. 세대에 세대를 넘어 상실에 대처한 방식은 그 사람의 존재를 무위로 돌리고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하면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인해 그들은 각자 혼자서 슬픔을 삭여야 했고, 상실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경험의 공유와 다른 관계에서 오는 사회적 지지망을 형성하지 못한 전형적인 경우였다. 상담 장면에서 호소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결국은 상실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일이 가족의 비밀을 만들어 소통을 막고, 가족의 파괴적인 대물림을 이어오게 만든 것이다.  

  




공동체는 사회적 지지망의 중요한 자원이다. 어떤 형태로든 그 가족과의 연결점/접촉점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서 그 가족에게 지지망이 되어야 한다. 가족과 접촉할 때 그 가족이 어떤 정서적 과정을 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사실을 부인하는 단계인지, 분노하는 단계인지, 우울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 어떤 사람은 슬퍼하고, 어떤 사람은 분노를 표현하고, 어떤 사람은 무감각할 수도 있다. 이런 다양한 반응을 수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가족이 마음을 열고 깊은 고통과 복잡하면서도 강렬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됨으로써, 슬픔의 표출을 통해 심리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어떤 면에서 자살과 같은 비극적인 죽음은 공동체가 함께 치르는 행사이다. 그래서 공동체가 먼저 애도하는 과정을 충분히 가질 필요가 있다. 가족이 비밀이라는 암묵적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공동체도 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떠나간 이와 함께한 그동안의 생활을 같이 회고하는 것, 서로의 다양한 생각을 나누는 것 등을 통해 애도가 차단되지 않게 해야 한다. 함께 찍은 사진이나 추억할 만한 것들을 찾아 기억을 되살리고 지나간 일이었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로 풀어놓는 일은 그이가 갑자기 사라진 존재, 회자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아니라 떠나보내면서 동시에 기억되는 존재로 공동체 내에 자리 잡을 수 있게 해준다.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은 가족은 대개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 비극적인 죽음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다거나 해야만 했었다고 하는 생각을 은밀히 간직한다. 이 일은 누가 어떻게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닌 데 말이다. 가족구성원들이 이런 부분을 나누고 그들의 책임과 그 상황에서 조절할 수 없었던 한계의 범위에 대해 타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구할 수 있었는데...’ 라는 자책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되돌릴 수 없다.

  

가족은 먼저 보낸 식구를 결코 잊지 못한다. 그 어떤 위로보다 함께 있어주는 것, 슬픔을 혼자 느끼지 않게 같이 나누려는 마음이 전달되어야 한다. 마음을 강하게 가져라, 용기를 내라 등의 말보다 앞서는 것은, 우리가 그이를 기억하겠다고 말하는 것, 따뜻이 손을 잡아주며 함께 기억하겠다는 우리의 진심어린 표현이 위로가 될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공동체는 가족들과 고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추모활동을 계획하거나 가족들로 하여금 고인이 없는 미래의 삶을 준비하게 하는 가교활동을 만들어갈 수 있다.






뜻하지 않은 죽음을 경험하면 남은 사람들은 그 죽음에 대해 납득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죽음의 원인에 대해 궁금해 하거나 이 일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등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납득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대해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한계를 수용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자의로 중단할 정도로 극심했을 그이의 외로움과 고통을 하나님은 반드시 보듬어주실 것이다. 또한 이제, 남아서 마음에 상처를 품고 그 시간을 이어가야 하는 가족들 역시 하나님이 품어 주실 것이라 믿는다. 그 눈물을 닦아주시며 이후의 여정에 함께 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공동체도 그 여정에 동참할 수 있다. 그 존재를 기억하고, 그이와의 관계를 간직하면서 말이다.






방현주◆동아대82

1992년 문춘근 학사(부산대81, 목사)와 결혼하여 아들(희찬)과 부산에서 살고 있다. 가족학을 공부하고 대학에 출강하며, 부산가정법원/고등법원, 건강가정지원센터 등의 전문상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