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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그들을 의탁하며_조성돈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그들을 의탁하며

[소리] 2013년 6월호(통권208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시간적 차이가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 편집주 





폭풍전야, 모두 안으로 움츠릴 때 폭풍 속으로 나아가 고요를 담다. (ⓒ이재웅)


"미안해, 사랑해..." 자살 유가족사투(死鬪)


꿈에서라도 겪고 싶지 않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마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을 "자살 유가족, 자살 생존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하루에 약 170~350명 정도의 자살 유가족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미 우리 공동체에도, 교회에도 자살 유가족이 많습니다. 그들은 죄책감과 분노와 원망이 뒤섞인 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침묵을 깨는 것이 상처 치유의 첫걸음이라고 하더군요. 자살로 우리 곁을 떠났으나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드러내놓고 마음껏 추억하고, 그리워하며, 잘 떠나보내는 작업이 이제 우리 안에서도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2012년에 대한민국에서 자살로 죽은 사람은 1만 5906명이었다. 이는 하루 43명이 자살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숫자로 나열하면 사람들이 잘 실감하지 못한다. 육군 1개 사단이 1만 명이다. 그러면 한 해에 육군 1.5개 사단이 자살로 사라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2년이면 3개 사단이 자살로 인해 해체된다. 요즘 초등학교에 가보면 한 반에 학생이 채 30명이 안 된다. 그렇다면 하루에 초등학교 1.5개 반 정도가 자살로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러면 좀 실감이 나시는가.


매년 9월이면 통계청에서 ‘사망원인통계’라는 것을 발표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사람들이 죽은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11년 통계를 보면, 자살은 전체 사망원인 중 4위에 있다. 1위가 암, 2위가 뇌혈관질환, 3위가 심장질환이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얘기다. 그 다음으로 당뇨병과 폐렴 등이 나온다. 심지어 교통사고는 9위이다. 


나이가 좀 들면 자주 접하는 질병이 당뇨병이다. 주변에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이 꽤 있다. 그런데 그런 당뇨병으로 인해서 죽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매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가끔 전광판에 전날 교통사고로 인해서 죽은 사람과 다친 사람의 숫자가 등장한다. 이 전광판에 ‘0’이라는 숫자가 나온 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교통사고로 인해서 다치고 죽는 사람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자살로 인해서 죽고 다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살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당뇨병 환자보다 더 많고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더 많다면, 우리 주변에서 자살사망자나 자살생존자들을 쉽게 접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당뇨병으로 인해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자살로 인해 죽었다면,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당뇨병 환자보다 많다고 보아야 한다. 즉 우리가 자주 보게 되는 당뇨병 환자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고자 하는 유혹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런 자살의 위험 가운데 처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만약에 없다면 그만큼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것이다.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없을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그들에게 말을 붙이지 못한 것이고, 그들은 우리에게 터놓지 못했을 뿐이다. 





살다 보면 교통사고를 직접 경험하거나 교통사고의 위험에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가다가 운전자가 위험하게 운전을 해서 말려보았다거나, 교통사고가 날 것 같은 상황에서 운전자를 도와 고비를 넘겼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 교통사고보다 더 많이 발생하는 일이 자살이다. 혹시 주변에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서 잡아본 적이 없다면 우리는 그만큼 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자살이 사회적 질병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죽어 가는데 그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다. 스스로 죽어 가는 그 많은 생명을 이 사회가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이다. 다른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특히 정부가 나서서 돕고 있다. 그러한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계몽하고 예방한다. 특히 건강보험을 통해서 그들의 질병을 도우려고 한다. 그런데 자살에 대해서는 냉담하다. 도우려는 마음도 없고, 심지어 외면하려고까지 한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는 자살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려 하지도 않는다. 마치 어둡고 사악한 주제를 끌어내는 것처럼, 신앙에 위배되는 불경한 것을 거론하는 것처럼 이 주제는 피해가려 한다. 교회가 이렇게 된 데는,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통설’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통설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자살하면 지옥 간다’가 개신교의 교리인 줄로 알고 있다.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자살한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지 않는 교회가 꽤 많다. 장례를 치러주더라도 담임목사가 집례를 하지 않고 부목사나 전도사를 시키는 경우도 있다. 담임목사 입장에서는 자신이 나서면 교회의 공식적인 장례가 되니 입장이 곤란할 수도 있고, 그 장례식장에서 죽은 이가 지옥에 갔다고 설교하기도 그렇고, 지옥에 가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꺼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목사나 전도사를 시켜놓으면 괜찮은 것일까. 담임목사도 답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부교역자가 설교할 수 있겠는가. 결국 장례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치러진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통설에 기인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절대 개신교의 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에 ‘자살하면 지옥 간다’고 명시한 곳은 없다. 단지 우리의 믿음 가운데 자신을 죽이는 것도 커다란 죄라고 우리가 믿는 것이다. 피조물인 우리의 입장에서 타인을 죽이는 것이 살인죄인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지어진 우리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죽이는 것도 결국 살인의 죄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우리는 명확히 보아야 한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용서 받지 못할 죄란 없다. 가톨릭에는 용서 받지 못할 죄라는 것이 있다. 그러한 죄를 지으면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성령 훼방죄’ 외에 용서 받지 못하는 죄는 없다. 성령 훼방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아니하는 죄가 아니고서는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그 어떤 죄도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한국교회 교인들은 자살한 사람만은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생각도 잘 하지 않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내어 그들을 저주하기에 바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다면 자살한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이냐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땅에 사는 인간이 한 사람의 구원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당을 가는지 지옥을 가는지, 그것은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긍휼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는 한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 어떤 죄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아무런 공로 없이 그분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것과 같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분의 구원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았듯이 우리의 어떤 행위로 그 은혜에서 우리를 제외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한 명이 자살을 하면 그 여파는 유가족을 비롯하여 약 20명 정도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자살한 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고 그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후회와자책의 상처를 떠안는다. 자살유가족은 보통 두 가지 감정에 휩싸인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죄책감과 분노이다.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떠난 것에 대한 분노가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놔두고 떠나갔다는 사실에 주변 사람들은 분노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죄책감과 분노는 유가족을 어려움에 빠뜨린다. 실제적으로 유가족은 자살의 위험에 가장 크게 노출된 사람들이다. 이러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스스로도 동일한 길을 걷기 쉽다. 그래서 자살유가족을 특히 ‘생존자’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언제라도 그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러한 아픔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그들을 정죄하려고만 하지 그들의 아픔을 껴안아 주지 못한다. 실제로 한 유가족 모임에서, 대부분의 유가족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 교회에서 주는 상처가 너무 심해서 견딜 수 없어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그나마 다른 교회에 가면 다행이고 대부분은 그 실망이 이어져 하나님마저 떠나게 된다. 이것이 유가족들이 전하는 실제 이야기이다. 

  




대부분 교회는 자살자가 나타나기까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교인 가운데 누군가가 자살을 하면 그때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자살한 사람의 장례를 교회가 치러주어도 되는 것이냐는 논의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담임목사 혼자가 결정을 하지 못한다. 교인 중 누군가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갔고, 그런 사람의 장례를 교회가 감당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 교회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논쟁이 일어나고, 심지어 다툼도 일어난다. 그러는 사이 유족은 혼란에 빠진다. 자신은 인생의 가장 큰 수렁에 빠졌는데 도와주는 이는 없고, 자신의 문제로 교회에 분란이 일어난 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어느 유족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남편이 자살로 죽었다. 주일,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들린다. 아니, 그는 마치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한다. “남편이 그렇게 죽었는데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 더 이상 교인들이 공동체가 아니다. 그들은 아주 잔인하게 변해버린다. 

  

어떤 면에서 유족은 가장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품어줄 공동체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그 어느 순간보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공동체가 품지 못하니까 이들은 떠난다. 그 공동체를 떠나는 순간 이들은 하나님의 위로하심도 거절하고 만다.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라고 말하는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순이다. 


교회는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생명의 귀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예수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또한 그 사랑을 덧입은 자들이기에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공동체이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근거에 자리 잡았다. 따라서 교회는 자살이 만연한 이 사회에, 생명과 사랑에 근거한 생명운동을 벌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터전이다. 교회가 자살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한국에서 자살률은 눈에 띄게 낮아질 것이 분명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비관적인 입장에서 자살률이 떨어질 수 있겠는가를 묻는다. 그런데 한번 기억해보라. 예전에 <이경규의 양심냉장고>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이 교통문화를 바꾸었던 적이 있다. 그 결과, 오늘날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의 급감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우리가 인식을 바꾼다면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떨어질 수 있다. 바로 그 부분을 교회가 감당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아픔 가운데 있는 유족을 교회가 품고, 이들을 위로하고 감싸 안아야 한다. 죽은 이에 대한 정죄는 하나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해야 한다. 

  




2012년, 기독교자살예방센터 “Life Hope”가 설립한 후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타이틀로 자살유가족을 위한 위로예배와 문화행사를 각각 1회씩 진행했다. (2014년과 2015년에는 9월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가 열렸습니다. -편집주)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한국교회가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와서 함께 울어주고 그들과 아픔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생명을 살리는 한 걸음이 될 것이다.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사회학 교수

독일 킬대학교에서 신학석사를 그리고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다. 2005년부터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목회사회학연구소를 설립, 운영 중이다. 교회의 시민사회 참여에 관심이 많아 라이프호프 운영위원장으로, 기윤실의 교회신뢰운동본부장으로 섬기고 있으며 한국자살예방협회 학술위원, 수원시자살예방센터 자문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그들의 자살, 그리고 우리》, 《교회 다니면서 그것도 몰라》,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