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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연재] 소리지음

[다다익책] 시를 만나고, 시가 되기를

[다다익책]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책 목록


시를 만나고, 시가 되기를




나에게 선물을 줘야겠다고 생각하거나,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끼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긴 한데 방향 없고 건조한 기계적 반복인 것 같을 때, 이따금 나는 돌발적으로 서점에 들어가 시집을 한 권 골라서 나에게 선물한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독서에 보통 따르는 어떤 의무감이라도 떨쳐 버린 채, 앞에서부터 또는 아무 데나 펼쳐서 시가, 언어의 향연이 펼쳐진 면 위로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즐긴다. 


독특한 단어들 하나하나와 그 단어들의 개별적인 구성, 그리하여 엮이는 우리 삶 구석구석에 감춰져 있던 진실의 순간들이 나를 쓰다듬고 시공간을 넘는 여행을 떠나게 한다. 갑자기 봄이 되었다가 갑자기 절망이 되기도 하고, 인생의 황혼기를 미리 체험하게 만든다. 아마도 한 끼 밥값으로 만날 수 있는 최대한의 스펙터클이 아닐까 싶다. (자학 모드에 빠져 있을 때는 심지어 괜히 밥을 굶고 딱 그 돈으로 시집을 사기도 한다.) 그래서 시집을 사서 읽어 보시면 어떻겠냐고-편의상, 마치 한 번도 시집을 사본 적 없는 사람에게 권하듯이-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처음에는 이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만일 서점에 갈 수 있다면, 그리고 제법 커다란 서점이어서 시집 매대나 베스트셀러 코너가 따로 있다면 거기서 한 권을 골라 보는 거다.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나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같은 시집이 여전히 놓여 있겠지만, 요즘은 유명한 시인이 엮은 선집들을 여럿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안도현이 엮은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나 함민복이 엮은 《절하고 싶다》 같은. 그리고 시인 하면 떠오르는 윤동주, 서정주, 정지용, 천상병 같은 이들의 시집도 좋고, “한국/세계의 명시 100선”과 같은 종류도 좋다. 이 경우 최소한 이 책을 왜 샀나 하는 자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아주 드물 것이고, 보통은 어렵지 않게 시의 매력에 빨려들어 갈 좋은 계기가 될 거다. 









그 다음에는 서가에 일렬로 꽂혀 있는 시선집 시리즈들을 쭉 훑어보면서 오늘, 내게, 불현듯 다가오는 시인의 이름과 제목을 골라 보길 권한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문학과지성 시인선”이 1977년 이래로 여태까지 470여 권, “창비시선” 400여 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외에도 보통은 출판사별 출간순으로 모아두기 때문에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시리즈들을 서가에서 찾을 수 있다. 외국 시인들의 시집으로는 “민음사 세계시인선”이 눈에 띌 것이다. 이미 알고 좋아하는 또는 호기심을 갖고 있던 시인이 있다면 그리로 손이 갈 것이고, 아니라면 그리 길지 않은 제목들 중 하나가 나의 삶 또는 마음의 한 지점을 콕 찌르는 걸 경험할 수 있을 게다. 


내가 가장 최근에 고른 시집은 황동규의 《사는 기쁨》이다. 내가 만일 노년에 책을 내면서 “사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내 옆에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속삭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없이 많은 내용을 담은 목소리가 간단한 제목에서 들려왔다. 이렇게 한 권을 빼들면 보통 뒤표지를 보고, 날개에 있는 시인 소개를 보고, 서시를 본다. 그리고 몇몇 페이지 속의 몇몇 문장을 살펴보면 내가 좋아할 만한 시집인지 파악된다. 《사는 기쁨》의 맨 앞에 있는 시인의 말은 “죽어서도 꿈꾸고 싶다”라는 한 줄이고,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샀다. 오래전 황지우 시인의 시집도 서시 때문에 골랐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 그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때, 지는 태양을 반사하는 은빛 찬란한 바다가 눈앞에 선했고, 괜히 울컥했던 것이 떠오른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라는 시구도 여전히.

권하고 싶은 시집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추천하고 싶은 게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중에 엮은이가 엮은 시집이 몇 권 있다. 문지사 창사 10주년을 기념하면서 만든 시집인, 48번 《앵무새의 혀》(1985년 초판). 좋아하는 김현 선생이 엮었고, 내가 대학 신입생 때 한 국문과 선배가 잠시 나와 이야기를 하더니 면지에 몇 마디를 적어서 선물해준 책이어서 더욱 좋아한다(내게 고정희와 같은 진지함과 끼가 있다고 적어 주셔서, 덩달아 고정희의 시를 찾아 한참을 읽어보았다). 김현 선생이 뒤표지에 ‘시’에 대해 적은 것, 책머리에 “어려운 시대에 문학을 한다”라고 하신 것, 결국 그래서 시선

집 제목을 “앵무새의 혀”로 한 것도 깊게 와 닿았다. 또 이 시리즈가 한 모퉁이를 각각 지날 때마다 그것을 기념하여 만든, 김주연이 엮은 100번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1990년), 성민엽·정과리가 엮은 200번 《시야 너 아니냐》(1997년), 박혜경·이광호가 엮은 300번 《쨍한 사랑 노래》(2005년), 홍정선·강계숙이 엮은 400번 《내 생의 중력》(2011년)을 권하고 싶다. 이 시집들은 백을 단위 삼아 그때까지 출간된 시집들에서 어떤 주제들을 가지고(예를 들어, 200번은 서시, 300번은 연애시, 400번은 ‘시인의 초상’) 시들을 추려 모은 것이라, 우리 시대의 정서를 갈무리 하는 탁월한 문장들을 두루 만나기에 좋다.


시는 우리가 사는 생애의 좀더 깊은 면과 좀더 다양한 편린들을, 그래서 그 속의 진실을 일별하게 도와준다. 아마도 오늘을 돌아보기 위한 가장 좋은 방식 중 하나가 아닐까. 내/우리 삶의 복잡다단함을 발견하고 어떤 위로와 의미와 소망을 얻기 위한. 그러므로 서점에 들러 시집을 한 권 고르고(그 과정 자체를 누리고!), 읽으시길 권한다. 


글을 나가며 짧게, 우리의 시, 성경 속의 시편을 새삼 진심으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시 읽기가 시편 읽기로 이어진다면 서로가 서로를 무척 풍성하게 할 것이다. 시편은 그 자체로 가장 훌륭한 시이고 세속시에 대한 해독제(!)이고 또 계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시편을 읽고 시가 되셨다(톰 라이트의 《땅에서 부르는 하늘의 노래, 시편》을 추천한다). 그처럼 당신의 하루하루, 시가 되기를!




나도 안다, 우리는 아직 여행을 끝내지 않았다.

내가 찾던 평생의 길고 수척한 행복을 우연히

넓게 퍼진 수억의 낙화 속에서 찾았을 뿐이다.

- 마종기, ‘북해의 억새’






정모세연세대92
연말에 넷째가 태어난 것으로 일단락된 격동의 2014년을 보냈다. 올해가 향후 20년의 방향이 뚜렷해지는 출발선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래안․지안․다안․요안 네 명의 아이를 잘 키우는 게 그 20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라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본다. 10여 년 전에 일했던 IVP에 작년에 편집장으로 복귀했고, 혁명기도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분당두레교회 협동목사이기도 하다. 《회심》《복음주의 신앙선언》 등의 책을 번역했다.



















vol.219│2015.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