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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연재] 소리지음

[다다익책] 놓치면 아까울 2014년에 나온 몇몇 책

[다다익책]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책 목록


놓치면 아까울 2014년에 나온 몇몇 책



새해에도 어김없이 시간은 쏜살같이 도망간다. 때로는 높고 때로는 잔잔하게 끊임없는 파도와 같이 밀려드는 업무와 일상과 씨름하는 사이, 지난해 일어난 온갖 커다란 사건들도 금세 우리 망각의 심해로 가라앉아 버린다. 정리되지 않고 해명되지 않은 채 사라지는 것들로 날마다 무감의 유리 장벽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결국 냉소와 좌절의 포로가 되지나 않을까 싶다. 이런 두려움이 유독 증폭되는 시절에, 지난해에 나온 책 서너 권을 여기 지면에다 흐트러뜨려 놓는다. 그 책들이 혹 아리아드네가 건넸던 실타래가 되어 준다면, 우리가 그 가느다란 선을 붙들고 미궁 속을 걸어 나가다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한 낱의 실마리가 될 수는 없을까 하고.


소설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내놓았다. 어느새 ‘사반세기 전’이라는 수식어를 새로 붙이게 되는 그때 5월 광주의 풍경을 오늘 다시 펼쳐 놓는 이 책은, 잔인한 4월을 겪고 나머지 한 해를 그 맴돌이 속에서 허우적대며 보내야 했던 우리에게 그 봄날의 황망함을 해석할 단서를 제공한다. 저자는 말한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이렇게 그때 5월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1월을 함께 짚어 보고, 4월이 피폭처럼 우리에게 오래 남을 것을 예고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끈질기게 물어야 하는 때를 살아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1월의 어느 날, 종교적 정체성을 핵심으로 삼는 집단이 한 언론사에 테러를 가했다. 그냥 두면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고 한때 여겨졌던 ‘종교’가 현대 사회에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점점 더 묵직해진다. 종교가 전에 없이 중요하고 또 골칫거리인데, 언론 지면을 곧잘 장식하는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정교하면서도 넓게 바라보고 현실 속의 바른 실천을 탐색하는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우리와 정황이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우파 기독교의 왕성한 정치 참여 이후 시대에 종교적 다원성과 충돌의 상황 속에서 제기되는 뒤엉킨 실 가닥들 같은 질문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기독교가 가야 할 길을 해명한다. 기독교의 고유한 본성들을 함부로 배제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도리어 그 고유성으로 사회 속에서 제대로 기여할 방식을 건실하게 탐색한다. 매력적인 빨간색 표지의 이 책과 함께, 까만 책 《무례한 기독교》(확대개정판, 리처드 마우 지음)를 읽으면서 머릿속으로나마 기독교의 공공성에 대해 그 방향이라도 한번 감 잡아 보고, 주변의 그리스도인들과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오늘날 야만이 기승을 떠는 또 하나의 주 무대는 자본주의 체제다. 수많은 이웃이 어느 감춰진 으슥한 골목들마다 비명횡사하고 있는데, 그 사인은 주로 자살로 위장된 타살이다. 땅에 고인 피가 하늘을 향해 외칠 것이라 생각하니 두렵다. 성석제의 소설 《투명인간》은 자본주의 속에서(그리고 또다시 ‘국가’ 속에서) 자기 존재감을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상실해 가는 사람들에 대한 동시간적 레퀴엠이다. 저자는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며, 투명인간이라는 탁월한 은유로 숨겨진 이웃들을 포착한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는 일말의 다른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고 천박하고 끔찍한 괴물로 진화해 가는 주류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대안적 상상력을 일굴 여지를 제공하려 한다. 주류 자본주의 경제학 바깥에도 나름 타당한 수많은 다른 경제학이 존재함을 알려주고 우리의 경제학을 선택해 보자고 초청한다. 과연 우리가 그 괴물의 행보에 슬쩍 딴지를 걸어 볼 수 있을까?


정보혁명 시대에 우리는 정보의 홍수에 잠겨 있지만, 오히려 그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 김용규는 《생각의 시대》에서 기원전 8세기에서 5세기까지 그리스를 무대로 삼아 펼쳐진 ‘생각’의 탄생을 풀어나가며, 인류가 문명을 건설할 때 사용한 ‘생각’이라는 도구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생각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동시에 인지과학, 뇌신경과학 등의 성과를 반영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래서 어떻게 이 시대를 생각하며 살아갈지 하는 문제를 풀어 갈 유용한 도구를 제시한다. 이 책은 ‘사유’에 대한 장대한 저술 프로젝트 제1권의 서문을 쓰다가 독립적인 한 권의 책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후속작들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지 큰 기대를 갖게 한다. 그때 인류가 그렇게 야만을 극복하고 문명을 세웠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나이가 들수록 질문이 늘어가고 책을 집어 드는 일도 더욱더 뜻깊은 일이 된다. 이제 나와 공동체를 돌아보겠다는 결의가 독서 행위와 좀 더 크게 얽혀 간다. 모든 책은 읽는 사람의 오늘과 대화하지만, 작년에 갓 출간된 이 책들은 더더욱 우리에게 현장감 생생한 이야기를 건넨다. 그래서 이 책들은 새해를 시작하는 내게 도전과 도움을 줬다. 현실의 미궁 속에 용기 있게 들어가 괴물에 맞서 싸우고 있는 하늘나라 동지들에게 내가 접한 몇몇 책들을 작은 실타래로 감아 건네 본다.




정모세연세대92
연말에 넷째가 태어난 것으로 일단락된 격동의 2014년을 보냈다. 올해가 향후 20년의 방향이 뚜렷해지는 출발선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래안․지안․다안․요안 네 명의 아이를 잘 키우는 게 그 20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라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본다. 10여 년 전에 일했던 IVP에 작년에 편집장으로 복귀했고, 혁명기도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분당두레교회 협동목사이기도 하다. 《회심》《복음주의 신앙선언》 등의 책을 번역했다.



















vol.218│2015.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