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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카페 ‘그리고(Grigo)’의 여정

카페 ‘그리고(Grigo)’의 여정




그리고... and, then...

그리고... long for, miss

그리고... draw

그리 고... there Go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꿈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그곳으로 향하는 공간.

 




공간을 선택


목회자가 되고자 했던 학사로서의 꿈은 '조직'이라는 구조의 한계를 느끼고 수정되었습니다. 교회 속에서 복음을 외치는 것보다는 세상 속에서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제가 생각하던 본질에 더욱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래서 신학대학원이 아닌 ‘공간’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은 커피였죠. 지금에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커피를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아주 주요했답니다.


대학 졸업 후 연봉 60만원의 교회 찬양팀 간사로서 3년을 보낸 후, 사업계획서를 쓰고 부모님을 설득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작은 창업 자금에 맞춰 선택할 수 있는 자리는 골목길에 오랫동안 비어 있던 창고였습니다. 창업 자금을 아끼고자 중고머신을 선택했고 웬만한 인테리어는 몸으로 때워서 그토록 그리던 공간의 문을 열었습니다. 2010년 12월의 어느 날이었죠.



바리스타가 되고자


공간을 만들면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커피를 선택했던 것이지만, 고객에게 돈을 받으면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돌려주어야 하기에 건성건성 대충 할 수는 없겠지요. 오픈하기까지 부산에 있는 모든 로스터리 카페는 다 찾아다녔습니다. bar에 앉아 사장님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깨달음과 도전, 직면과 두려움, 학습과 용기... 꽤 오랫동안 수많은 생각과 다양한 감정이 뒤섞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혹시 카페 창업을 염두에 두신 분이 있다면, 가능한 한 창업기간은 여유롭게 잡고 준비하시길 권유합니다. 지금 커피 시장의 커피 경쟁력은 자본뿐만 아니라 주인장의 커피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까지 요구됩니다. 그만큼의 실력을 쌓으시길 권합니다. 


좋은 재료를 선택하는 안목은 커핑을 통해서 맛과 향을 분별할 줄 아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맛을 위해서는 재료의 특징을 살려 구현하고자 하는 맛이 잘 표현될 수 있는 로스팅이 필요하고요. 로스팅의 정도에 맞는 적절한 추출 방법, 혹은 손님의 요구에 맞는 적절한 추출 도구를 선택 할 수 있는 센스도 있어야 합니다. 손님에게 보이는 최종의 모습은 바리스타이겠지만요. 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roaster와 cupper의 역량까지 갖추어야 하지요. 그렇기에 커피는 어렵고 전문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주 된 프랜차이즈 알바도 바리스타라고 칭할 수 있겠지만, 이런 공부를 하면서 매일같이 커피와 씨름하는 바리스타들이 있기에 전문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나


오픈만 하면 사람들이 막 몰려들 것만 같았던 기대감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지고 냉혹한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핑크빛 사업계획은 깊은 한숨과 함께 날려 보낸 지 오래입니다. 이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까, 내가 꿈꾸고 기대했던 것들은 이런 모습이 아닌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습니다. 고민 끝에 교육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뜻밖에 수강생들이 있었고 교육이 진행될수록 관계도 더욱 긴밀해졌습니다. 마치 소그룹 멤버들과의 관계랄까. 손님(갑)과 사장(을)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바뀌면서, 커피가 아닌 다른 주제의 이야기에도 저의 의견과 생각에 힘이 실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바로 이런 것을 하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이 모여서 만든 “Alive Ministry”라는 팀이 있습니다. 이 팀이 한 달에 한 번 ‘그리고’에서 공연을 하는데, 좁은 공간 덕분에 여느 무대보다 관객과 가까이 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공연에서 불리는 노랫말은 세상에서 말하는 감미로운 음악에 진솔한 감정으로 전해집니다. 귀에 큰소리로 야단치듯 강요하지도 않고, 눈물을 짜내며 복받친 감정으로 호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관객들의 마음에 다가섭니다.


스치듯 지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매일 들르는 단골도 있습니다. 때로는 먹을거리를 주고받기도 하고, Grigo에서 택배를 받는 분들도 있답니다. 이렇게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다 보면 때로 어려움이 찾아오지요. 축 처진 어깨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손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이야기하다가 목이 마른지 잔이 비워질 때면 저는 옆에서 빈 잔에 커피를 채워드리죠. 이러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런 만남을 ‘Grigo 소그룹’이라 부르면 어떨까요.


한 달에 한 번씩은 작가들의 작품이 Grigo의 벽에 걸립니다. 갤러리에서 전시가 끝나고 팔리지 않은 작품은 작가의 방에서 그저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뿐이죠. 작가의 작품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 동네 작은 공간에서라도 좋은 작품을 만나는 것은 작가와 관람객 모두가 WIN-WIN하는 것이겠죠. 이렇게 만난 작가들과는 꾸준히 교류하며 삶과 마음을 나누는 특권을 누리고 있답니다. 또 우연한 기회에 부산문화재단과 연결된 것은 부산 사하구 지역의 여러 작가들과 플리마켓을 비롯한 각종 체험학습행사에 참여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관계는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롱보드 공동체


2014년 3월의 어느 날, 참을 수 없는 재미를 발견합니다. 바로 롱보드(longboard)입니다. 인근 가게의 바리스타들이 취미로 타던 그 롱보드에 처음 발을 올려놓으면서 사건은 시작 되었죠. 바퀴가 달린 탈것을 사랑하는 저에게 롱보드는 강력한 유혹이며 거부할 수 없는 순리였습니다. 탈것의 공통점은 혼자 타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타면 재미가 배가 된다는 사실이죠. 그렇게 롱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모여 ‘Grigo Crusing’이란 크루를 만들었습니다. 


롱보드라는 수단만 있다면 누구나 공동체에 속할 수 있습니다. 먼저 시작한 사람이 입문자를 가르치고, 재능이 있어 더 잘 타게 되면 다시금 그 친구에게서 배우기도 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학력, 직업, 재력, 종교, 성별을 떠나 판때기 하나만 있으면 공동체가 되는 이 크루에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보드 위에도 하나님은 계시더군요. 외로웠던 친구들은 서로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익숙했던 일탈의 행동은 배려함으로 수정, 보완됩니다. ‘금연상’을 만들어 상장을 수여했던 사건은 아직도 가슴 울리는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이렇게 Grigo는 공간을 넘어 펼쳐지고 있습니다.



공간을 채우는 사람의 향기

 

Grigo가 문을 연 지도 벌써 5년이 넘어가네요. 커피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아주 좋은 매개입니다.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이 만나자는 말로 대변될 만큼, 우리 사회에 깊이 자리매김 하고 있답니다. 공간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더 큰 공간을 지지하고 있는 기둥이 커피입니다. 그 공간 안에 만나고 모여서 공간을 채우는 것은 사람입니다. Grigo에서 근무하며 쌓은 인연, 매일 들락거리며 인사했던 인연, 세미나와 교육으로 만난 인연, 함께 커피를 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이웃 가게 사장님들… Grigo의 공간을 채우는 건 사람의 향기입니다.




 

생산자를 위하는 커피


커피는 생산지와 소비지가 다릅니다. 후진국에서 생산되어 선진국에서 소비되는 형태입니다. 공정무역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재화의 가치가 위치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르게 측정이 되지요.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 속에 있지만 관심을 갖고 지켜 볼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2013년 여름 인도네시아로 커피농장 투어를 다녀왔습니다. 체리 수확에서부터 가공, 분류, 포장의 과정을 경험하고 생산자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여행으로 또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Grigo는 이제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우리의 커피의 방향이 소비자만이 아닌 생산자를 향한다”라고 하는 뚜렷한 주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커피는 제품화되기까지 사람의 손을 매우 많이 필요로 하는 인력 집중 산업입니다. 그러하기에 한 잔의 커피를 대하면서 늘 누군가의 노력과 흘린 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 커피는 더욱 가치 있는 음료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앞으로 인도네시아 농장과 관계무역을 하고자 합니다. 꾸준한 무역으로 관계의 신뢰가 생기면 한두 명의 농부를 한국으로 초대하려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 보여주고, 커피에 대한 이론과 실무를 교육할 것입니다. 그 경험은 자국에 돌아가 수많은 스토리를 만들어내겠지요. 이것이 해마다 반복된다면, 인도네시아 산골 마을에는 '희망'이라는 무형의 자산이 자랄 것입니다. 스스로 전문성을 갖추는 노력을 할 것이고 세계 커피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씨앗이 자라 열매 맺는 것 같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그렇게 주렁주렁 결실을 맺길 기대합니다.


이를 위해서 생두를 볶을 로스팅 공장을 준비 중입니다. 로스팅 공장이 완성되면 본격적으로 생두를 수입 할 것입니다. 생산자를 향하는 우리의 커피가 또 다른 공간의 주인들과 만나서 이루게 될 시너지를 꿈꾸어 봅니다.






정홍원│부경대01

부산에서 꿈을 담은 공간인 카페 '그리고'를 운영하고 있다. 카페 공간을 넘어 사람과 소통하며 나아가 공정무역도 함께 그려가길 꿈꾼다.





















no.217=2014.12+2015.01

체험, 삶의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