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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내가 이곳에 사는 이유 _박민아

내가 이곳에 사는 이유 




“네 후배 있잖아, 민아. 그래. 잘 지내고 있다. 지금 우리 9개월째 같이 잘 살고 있다.” 


설거지 중 떨어지는 물소리 사이로 학사님의 통화소리가 들렸다. 제주에 계신 학사님과의 통화였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구나. 문득 이 집이 새삼스러워졌다. 




난 왜 이곳에 왔을까? 


나는 남의 집에 산다. 서울에 온 지 어언 9개월. 가장 많이 들어본 질문 중 하나는 “어디 사니?”이다. 그때마다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남의 집에 살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누군가에게는 상식적이지 않다. 모두가 “뭐?”하며 되묻는다. 하지만 사실이다. 현재 나의 또 하나의 가족이 된 한병선 학사님 가정은, 딱 한 번 만나 본 ‘제주IVF 신입 학사’를 새로운 식구로 맞아 주었다. 이 모든 과정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집에 방이 하나 남는데, 올래?” 그 한마디였다. 사실 50만원이 든 통장과 짐만 달랑 들고 이곳에 불쑥 찾아온 나도 참 미스터리하다. 그만큼 나는 떠남이 절박한, 저 밖에 서 있을 것만 같은 진짜 내 모습이 너무나도 그리운, 그런 아이였다. 


작년 여름, 제주는 뜨거웠고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한 번 더 겪었다. 대학생활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스물다섯이라는 괜찮은 나이에 졸업을 했음에도 나에게 남겨진 건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다. 사실 제주에서도 내가 일할 수 있는 자리는 있었다. 인턴생활을 했던 신문사에서도 수습기자가 필요하다며 선뜻 정규직원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일까. 어려서일까.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밖을 향했다. 부모님의 영향권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나라는 사람이 진짜 누구인지 찾고 싶은 마음, 가족과 공동체를 떠났을 때 나는 과연 누구인지, 제주를 떠난 나는 진짜 어떤 아이인지 찾아보고 싶은 호기심, 학생의 신분을 완전히 벗어버린 내게 이 시간은 직장을 찾기 전 마지막 자유인 것만 같았다. 


갈망은 늘 현실에 부딪힌다. 고향을 떠나온 학사들과의 대화 속에서 늘 화두는 ‘집’이다. 난 이제껏 한 번도 내가 머물 곳에 대해 고민하고 염려해본 적이 없었다. 집은 언제나 당연했기 때문이다. 후배는 직장 근처에 있는 고시텔에서 혼자 자취를 한다고 했다. 사촌동생은 원하는 분야의 공부를 위해 가장 싼 고시원을 택했다. 친구는 대학원 준비를 위해 자취를 시작했고, 부모님께 보증금을 받는 대신 월세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고향을 떠난 우리들에게 집과 함께 더불어 오는 고민은 집세를 동반한 재정의 문제다. 고시원의 경우 월 30만원은 싼 편이고, 대부분 40만원이다. 원룸은 보증금이 비쌀수록 월세가 낮은데, 500만원의 적은 보증금으로는 매월 40만 원 이상을 부담해야 했다. 첫 월급은 기껏해야 120만원 안팎이다. 여기에서 헌금을 떼고, 식비, 차비, 핸드폰 요금까지. 엄마는 결혼자금을 위해 월급의 50%를 저축하라고 한다. 머리가 돌아간다. 수학과 담 쌓고 산지 10년이나 됐는데.  


내 경우, 학사님 가정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손에 든 여러 보따리 중 큰 짐을 내려놓게 된 거다. 모두가 나에게 “정말 다행이다. 돈 걱정 덜었네.”라고 말한다. 하긴, 나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행운아였고, 하나님은 내가 제주를 떠났으면 하셨구나 싶을 정도로 과정은 순조로웠다. 돈 백만 원 받는 것이 다행인 막내작가라는 직업과, 타향살이의 현실 앞에서 집세를 면제받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서울에 거처를 마련한 나는, 결정한 후 몇 주 되지 않아 서울로 짐을 옮겼다. 정리할 짐도 얼마 없었고 이제 살기만 하면 됐다. 앞으로의 길을 고민하고, 시내를 누비며 정보도 찾았다. 머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떨리고 재미있었다. 아, 무엇보다도 난 자유를 느꼈다. 아무도 날 재촉하지 않았고, 다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나에 대해 아무도 관여하지 않음을 느끼는 것이 내 바람이었다. 그 들뜬 기분을 누리며 난 내가 꿈을 꾸던 방송계 막내작가의 일을 구할 수 있었고, 이 역시 하나님의 인도였다며 신나게 떠들고 다녔다. 


그러던 중, 그 자유로움이 극심한 외로움으로 바뀌는 순간이 왔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고, 나는 그저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사로잡기 시작한 건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쯤 됐을 때였다. 그동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외로움이란 인생에 몇 번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라며 쓸 데 없이 교만했다. 성향 상 나는 축제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힘든 일들도 많이 겪었지만 내 옆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가족, 친구, IVF, 교회. 그 탄탄한 기지 속에서 난 참 안전하게 살아왔다. 언제부턴가 답답해졌을 뿐, 알게 모르게 그 큰 유익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별 일도 없고 남들과 똑같은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뿐인데, 난 아주 급속도로 외로움을 타기 시작했다. 울고 싶은데, 전화해도 날 만나러 와줄 사람은 없었다. 이제 막 알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약한 모습을 보일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처음 관계를 맺어가는 시기에 겪는 긴장이 채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남들 다 겪는 일인데, 징징 우는 아이일 수는 없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편안한 공동체가 너무 그리웠다. 서울에 사는 학사들이 있을 텐데, 특별히 모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나님도 찾지 않았다. 의존할 만한 사람들과 공동체가 사라지고 나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빠른 속도로 무너져 갔다. 돌이켜보면 내 영적 생활의 문제점은 ‘의존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워야 할 성전을, 사람, 관계 등의 모래 위에 세워왔던 내 모습이 외로움 앞에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삶은 조금씩 병들어갔다. 


“타지에서 아프면 서러운데.” 


모두가 걱정하며 했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외로움과 낯선 환경이 스트레스가 되어, 제주에서 나름 건강의 상징이었던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퇴근 후 몸이 너무 아파 병원을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무작정 택시를 탄 적도 있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응급실이 있었고, 링거 한 병을 다 맞은 후에야 혼자 걸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 몸은 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응급실 해프닝 이후 자주 ‘피곤하다’고 느끼던 어느 날이었다. 월경 주기도 아닌데 피가 비치더니 이후 두 달이 넘어가도록 하혈증세가 점점 심해졌다. 병원에서는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출혈이라고 했다. 처방은 따로 없었다. “스트레스를 받지 마세요.” 미혼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몸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피는 쉽게 멈추지 않았고, 난 절망했다. 잔병치레 한 번 없었기에 더욱 이 모든 일이 혼란스러웠다. ‘가난하게도 충분히 살 수 있다’며 심심치 않게 큰소리치던 난 병원을 다니며 들어가는 비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난은 병을 가져오고, 그 병은 더 큰 가난을 부르는, 이 사회의 아픈 한 구석을 너무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이곳저곳 검사비를 들이며 병원을 옮겨 봐도 처방은 호르몬제뿐이었고, 결국 나는 1주일이라는 휴가를 받고 다시 제주로 내려가 차도가 있길 바라며 인내해야 했다. 





고향 집에 누워 쉬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굳이 서울에서 살아야 할까? 상경한 학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경 직후 1년이 고비라고, 그 1년을 잘 넘기면 살 만하다고 했다. 아픈 몸과 마음을 끌어안고 고민했다. 내가 제주에서 사는 게 더 좋은 이유, 포기하고 제주로 돌아와도 되는 이유, 요 몇 개월 간 감당해야 했던 부담과 고통. 명분은 충분했지만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왜일까. 힘들었지만, 사실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말이다. 졸업 후 방황하던 마음을 다잡게 하셨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 살게 하셨다. 아무 이유 없이, 이득도 없이 나를 받아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아무 경력도 없는 내가 방송국 본사에 들어가 일하고 있다. 우연히 나들목하늘교회를 인터넷 기사로 보고, 그렇게 사랑하는 목사님을 만났다.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다 세심한 인도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있을 거라는 확신도 뿌리칠 수 없었다. 난 왜 이곳에 왔을까? 분명 이유가 있겠지. 난 다시 2호선 지옥철을 타야만 출근이 가능한 이곳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몸은 많이 좋아졌고, 6개월이 지난 이후로는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며 물었던 그 물음이 이 글을 쓰며 조금씩 풀려가는 것 같다.  


이곳에 와서 난 내 집이 아닌 곳에서 사는 법을 배웠다. 내 힘으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학사님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이 내게 익숙함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고, 사람이 아닌 오직 그분을 의존하기 원하신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외로움을 겪어내면서 얼마나 예쁜 우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 알았다. 깊은 고독을 버텨내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도 배웠다. 몸이 아프면서, 내가 내 건강에 대해 얼마나 자신만만했으며 나는 내 생명을 하루도 연장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더 있다. 저 옆 동네에는 대통령이 살고, 또 그 옆에서는 투쟁을 한다. 이 동네 고시촌에는 아메리카노가 천 원인데, 저 동네 펜트하우스는 평당 6000만원이란다. 방송계 막내로 들어와 일을 하면서는 돈의 무서움을 본다. 사람은 그저 노동력이며, 보이지 않는 카스트가 계급을 나눈다. 





난 왜 이곳에 왔을까? 


떠남과 정착. 그 모든 선택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디든 나를 어떻게든 또 살게 하시는 은혜, 누리게 하시는 공동체가 예비되어 있다. 타지에서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모든 학사들이 존경스럽다. 언젠가 모두 만나 그 어려움 속에서 성장케 하시는 하나님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지… 묻고 싶다. 




박민아│제주대08

현재 EBS 한국교육방송공사 '다큐프라임' 작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는 것,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꿈이며 목표이다.

















no.216=2-14.10+11

타향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