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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좌충우돌 상경기(上京記)_허민

좌충우돌 상경기(上京記)






익숙한 삶의 무기력함


꿈과 소망을 품고 졸업을 했다. 하지만 막상 사회로 나오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많았다. 이력서에 이렇다 할 만하게 내세울 경력은 없었고 IVF 활동내역, 교회나 각종 단체 봉사활동, 해외여행 경험이 전부였다. 쓸모 있는 자격증도, 뛰어난 영어 실력도 없었다. 더구나 대구에서 내가 선택할 만한 직종이라고 해봐야 공장직원이나 텔레마케팅 정도였다. 외국어를 잘한다거나 특정한 영역에 재능이 있는 친구들이 마냥 부러웠다. 그들은 별다른 고민 없이 아무거나 골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구에서는 내가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을 해 볼 기회조차 별로 없었다. 6개월 동안 정해진 직장 없이 이것저것 기웃거렸다. 무한(?)하다 싶을 정도로 시간이 많아지고 약속이 없는 생활이 이어지니 사는 게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대학 시절 휴학을 했었는데 그때 어떤 책임도 맡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을 어찌 관리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댔던 기억도 떠올랐다. 또 집이 주는 안락함에 익숙해지는 것도 두려웠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부담감만 있었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내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고민만 깊어갔다. 다르게 생각하면, 내 길은 어떤 다른 친구들보다 더 다양하고 선택의 폭이 크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러나 위로보다는 스트레스와 고민이 훨씬 컸던 게 사실이다.



결심! 떠나자.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밥값은 하며 살 수 있을까? 가진 게 하나도 없는데 뭘 해 볼까? 많이 보고 배울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이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대학 시절 그 흔한 아르바이트도 한번 해 보지 않은 게 뼈저리게 후회스럽기도 했다. 그러던 중, 친구 하나가 서울에 ‘한국어교육자격증’을 이수하러 간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그 친구와 동행하기로 했다. 내게는 다양한 사회 경험을 위한 서울행이었다. 그러나 집을 떠나 몸을 쉴 만한 공간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서울행을 선택한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선교나 해외봉사라도 간다면 다니던 교회에서 축복기도라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서울행을 택한 내겐 사치였다. 무모했지만, 뭔가 모를 자신감은 있었다. 의지가 있고, 건강한 몸과 마음이 있고, 게다가 이십 대라는 창창한 나이가 있지 않은가.



타향살이의 설움



첫 거주지로 동대문구 이문동에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방을 얻었다. 친구와 함께 반지하방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갑작스레 결정한 서울행이었으니 부모님께 기댈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직업도 없는 우리에게 월세 30만원은 너무나 큰돈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손을 벌렸다. 우리는 서로를 위안삼아 어려운 서울 생활을 이어나갔다. 매달 꼬박꼬박 나가는 월세와 당장의 먹을거리를 감당하느라 하고 싶은 일은 제쳐두고 하는 수 없이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 시작한 일은 시간제 아르바이트 혹은 일용직에 가까운 잡부였다. 초기에 아르바이트만 고집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정규직이 아닌 만큼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만큼 뭔가 배울 수 있는 시간도 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당시 나는 사회문제와 사회참여, 그리고 미디어 관련 직종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쪽 분야를 계속 알아볼 요량이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각종 세미나와 아카데미에 참여하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야박한 시급제 아르바이트는 내 몸과 시간과 젊음을 갉아먹고 있었고,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는 편의점 수준의 음식만으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때 나는 정말 밥의 소중함을 직접 체험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중한 경험인 것과는 별도로 그런 삶이 나에게는 처절한 생존싸움이었다. 

 

새로 일하게 된 곳에서 한 달 정도 지난 후, 인터넷 강의를 촬영하는 일을 해 볼 기회가 생겼다. 이 일은 그나마 내가 관심을 가졌던 영역의 일이었다. 관련 종사자의 이야기도 듣고 업무가 돌아가는 상황도 보며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이 일 역시 파트타임 직종이라서 월세와 생활비를 채우기에도 버거웠고, 생활은 하나도 나아지는 게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후 지인의 소개로 작은 무역회사 인터넷 담당 업무를 맡게 되었다. 소개받은 일은 으레 그렇듯 기대만큼 일을 잘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예상하지 않게 임시로 경리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업무에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한 채 수습기간 6개월만 채우고 그만두게 되었다.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잘 모르는 분야의 일을 억지로 배워가면서 무진장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건 핀잔과 질책뿐이었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돌아온 건 권고사직이었다. 자존감은 무너져 내렸고 살고 싶은 의지나 살아야 할 의미도 땅에 떨어져 극단적인 생각까지 자주 들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다니던 교회마저도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며 암울하게 지냈다. 주변에 아무 것도 없었다. 삭막한 회색도시와 차가운 시선과 분주한 사람들의 발걸음뿐…. 나라는 존재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의미 없이 생명만 연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은 우울과 침체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고 나니 오히려 내게 한 템포 쉬어가라는 여유를 준 귀한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밀려오는 업무의 스트레스와 상사의 기대치를 채우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다 보니 차라리 퇴직이 좀 더 여유로운 삶의 피난처로 작용했던 것 같다. 내게는 가장 힘든 서울에서의 시간이었지만, 되돌아보면 시련과 고통 속에서 그만큼 나는 단련되고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나그네이나 선교사처럼 

  

작은 무역회사에서 정규직으로 번 돈은 퇴직 후 쉬는 기간 동안 버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늘 월세가 문제였다. 다시 수많은 직장에 이력서를 내면서 구직활동에 전념하던 중에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이전 직장에 다니면서 구입했던 카메라를 처분하려고 알아보던 중, 현재의 직장에서 올린 구인 광고를 보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라 지체하지 않고 연락을 했고 면접을 보러 갔다. 그후 나는 현재까지 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벌써 4년이 지났다. 이 직장에 다니는 동안 힘들었던 서울생활에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안정적인 소득으로 재정상황이 나아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좀더 여유로운 삶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변에 나와 비슷한 처지로 상경을 한 지인들을 만나 함께 삶을 나누며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공유할 수 있었고 마음에 위안을 받았다.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누군가에겐 고향이고 삶의 터전이며 익숙하고도 안락한 공간이지만, 나처럼 타향살이를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서울 생활은 아직도 너무나 낯설고 힘든 야생의 삶 같다. 어떤 이에겐 마치 또 하나의 선교지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나는 서울에 정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도 지나가는 삶의 여정 중에 머무는 하나의 장소일 뿐이고, 나는 또 다른 미래를 꿈꾸며 준비하는 나그네와도 같다. 거칠고 메마른 타향살이지만 이곳에서도 그리스도를 닮은 선교사처럼 살고 싶다. 


지금 나는 나와 같은 처지의 학사들이나 후배들에게 밥 한끼 든든히 대접할 만한 여유(?)가 생겼다. 또 두세 명 정도는 재울 수 있는 작은 우리집과 행복한 가정도 꾸렸다. 그냥 지금의 직장과 집과 가정에 안주하고 싶진 않다. 이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의미 있는 것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애써 구한다. 여기서도 대구에서 그랬듯이 동역자를 찾고 그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타향살이, 쉽지는 않지만 해볼 만하다. 혹시 나와 비슷한 삶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면, 먼저 거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분명한 가치관과 용기, 지혜를 갖추기를 충심으로 조언한다.




허민│계명대02

서울에서 사랑하는 아내(한미향, 강원대01)를 만나 세상 속에서 올바른 기독교인의 삶이 무엇인지 찾고 있으며, 대안적인 삶의 방식(혹은 공동체)을 고민하고 꿈꾸고 있다.
















no.216=2-14.10+11

타향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