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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나그네 길에서 동역자를 얻다_허성호

[소리정음] 깨끗하고 맑은 소리

나그네 길에서 동역자를 얻다





“뭐라카노?”하는 제 한마디에 소그룹 사람들이 “와하하하!”하며 쓰러졌습니다. 1990년 여름, 연대 원주 캠퍼스에 모인 전국수련회, 우리 소그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IVF 학생들이 저의 대구 사투리에 엄청 즐거워했지요. 2학년 때는 건국대에서 열린 ‘IVF 전국찬양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난생처음 서울에 와서 떨리는 마음으로 지하철을 탔던 기억도 납니다. 대구 토박이로 27년을 살다가 취업을 위해 상경하면서 저의 나그네 인생은 시작되었습니다. 



ⓒdownbeat (www.flickr.com)



서울생활은 모든 것이 생소하고 낯설었습니다. 대구에서는 토요일과 주일은 교회에서 사는 게 제 생활의 기본이었는데, 서울에서 제가 다니기 시작한 교회는 토요일은커녕 주일 낮 예배 이후에는 청년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구에서는 교역자 구하기가 힘들어서 전도사님 한분이 주일학교 전체를 담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서울에서는 심지어 청년 1, 2부 담당 교역자가 따로 있더군요. 저절로 부흥이 되겠다 싶었으나 꼭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향에서는 나름 명문대로 인정해주던 경북대를 어떤 서울 사람은 그런 학교는 처음 들어본다 했고, 경북대가 대전에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뭐, 경북대는 사실 대구에 있고 대구대는 경북에 있긴 합니다. 카세트테이프나 CD로나 들어볼 수 있었던 CCM 찬양가수를 서울에서는 교회나 콘서트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은 CCM에 흠뻑 빠져있던 저를 흥분시켰습니다.


대구에는 우리집과 가족이 있었고, 가족처럼 지내는 모교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대학생활 내내 신앙의 버팀목이 되어준 IVF 공동체가 있었기에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게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는 서울에 올라온 후에야 알았습니다. 자취를 하면서 의식주를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 했고, 도무지 모이려 하지 않는 낯선 교회에서 이것저것 봉사하느라 진을 뺐습니다. 무엇보다 동역자처럼 지내던 IVF 식구들이 옆에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 공동체의 부재가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구에 있을 때는 학생 신분이었지만, 서울에서는 권리나 자유보다는 책임이 더 많아진 직장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살면서 소위 “멘붕”의 시기를 꽤 오래 겪었습니다. 예전만큼 자유롭지도 않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받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그리고 과연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지 혼란스러운 그런 상황, 이런 내게 조언을 해주고 곁을 지켜줄 사람은 사라져버린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고 막막했을까 몇 년 후에 돌아보니, 공동체와 관계를 모두 단절당한 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계 맺을 만한 사람과 공동체를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지방에서 상경한 학사들까지 포함하는 모임이 없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봉사만 할 수 밖에 없으니 계속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천리안 IVF동호회에서 인하대 학사 임원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차례 참여했지만 그마저도 길게 가지는 못했습니다. 



ⓒPaul Friel (www.flickr.com)



다시 영적 고아처럼 방황하던 중에, 천리안 IVF동호회 게시판을 통해 ‘서울지역 연합학사예배’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학사는 누구나 와도 된다는 거였습니다. “이거다!” 하고 달려갔습니다. 말주변 없고 내성적이던 저였지만, 워낙 갈급한 마음이라 그냥 갔습니다. 중앙회관이 없던 때라 서교동의 한 교회에 7-80여 명의 학사들이 모였습니다. 마침 경북대 선배가 찬양인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이다 싶던 차에 기타 반주를 시키기에 군소리 없이 했습니다. 그날, “내가 찾던 모임이 바로 이것이다”라며 눈물 흘린 학사도 있었습니다. 2000년 가을, 서울지역 연합 학사예배. 이 예배가 그후 14년이나 제가 학사운동을 하게 된 시작점이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 이후 연합학사예배에서 이재천 간사님이 전해주시는 성경강해는 문자 그대로 광야에서 목말라 죽어가던 제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비록 소그룹 시간에는 ‘기타 지방’이라는 소그룹에 포함되어 처음 보는 사람들과, 그것도 매번 멤버가 바뀌는 바람에 제대로 소그룹을 할 수도 없었지만, 모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겐 복음이었기에 모임이 있는 날은 열일 제쳐두고 기타 하나 메고 홍대입구로 향했습니다. 


몇 년 후, 수도권학사회가 태동하던 때에 남아 있던 십여 명의 학사들(소위 “묻지마1기”) 중에 지방 출신 학사는 제가 유일했습니다. 그 당시 제게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지방에서 취업을 위해 서울이나 수도권에 올라온 학사들이 제법 많은데, 나처럼 처절하게 이런 모임을 찾아나서는 사람이 있는 반면 힘들어 하면서도 왜 어떤 사람은 모임에 시큰둥할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교회만으로도 충분히 좋고 깊은 교제가 이루어져서 필요가 없나 보다 생각했죠. 그런데 이 해석만으로는 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막상 재경경북대 학사들을 만나보면 이야기는 달랐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한참 걸렸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갓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직장초년생 학사들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삶의 방식, 문화,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어떻게 캠퍼스에서 배운 삶의 가치를 적용하고 실현해 나갈지 고민할 여유조차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때야말로 교회 청년부나 IVF학사회와 같은 신앙 공동체에서 실질적인 이슈를 다루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그룹이나 원투원 같은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세우며 살아간다는 것이 새내기 직장인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어떻게 세계관을 확립해 나가야 하는지, 어떻게 현실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훈련의 과정으로 감당해 낼지 배우고 격려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돌봄을 통해 캠퍼스 IVFer에서 세상 속의 하나님나라 운동원으로 자라나게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다가 비전과 소명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취업 등의 이유로 거주지를 옮겨 모(母)교회와 IVF 공동체와 단절될 수밖에 없는 학사들은 공동체의 부재로 인해 ‘잃어버린 양’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근 학사회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거주지 정보가 있는 조사 대상 12,000여 명의 학사 중 30%가 넘는 약 5,000여 명의 학사들이 출신 지방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살고, 이 중 약 3,000명의 학사가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습니다(그림 참조). 즉, IVF 학사의 1/3은 졸업 후 공동체와 단절된 상태에서 다른 지방에서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교회를 포함한 건강한 공동체와 연결되지 못한 학사들은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학사까지 포함하면 대략 4-5천명의 학사가 저처럼 지방에서 살다가 수도권에서 사회생활하면서 돌봄을 받지 못하고 혼자의 힘으로 공동체를 찾거나 만들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IVF 운동의 효율성 측면 이전에 연속성 측면에서 볼 때 위험한 상황이고, 학사 한 명 한 명을 바라볼 때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제 주변의 몇몇 IVF 친구들을 봐도, “세상 속의 하나님나라 운동? 그게 뭔데?”라며 그저 평범하고 착실한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학사들이 많습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한국교회 상황에서는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공헌(?)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4년제 대학을 다녀도 막상 기업에서는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채용 후 몇 년간 비용을 들여 재교육 한다고들 합니다. 우리는 짧게는 4년, 길게는 7-8년씩 캠퍼스에서 IVF라는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배우고 연습해온 소중한 미셔너리들입니다. 21세기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라는 야생과 같은 사회생활에 던져졌을 때, 나와 내 가족만 잘되고 좀 더 편하게 누리며 살고 싶다는 풍조에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일터와 가정에서 어떻게 영성을 지키고 일상 선교사로서 살 수 있을지 재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현재 학사회의 YGM(Young Graduates Ministry) 사역은 IVF 사역의 관점에서나 학사 개개인의 영적 여정에서나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3-4년의 암흑기를 거치긴 했지만 막 태동하던 수도권학사회를 만나 그나마 비전을 잃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저는 선배로서 지금의 신입 학사들은 그런 암흑기를 최소화해서 나그네의 여정을 함께할 동역자들을 만나고 소명을 발견하고 비전을 성취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땅에서는 영원히 나그네로 살아갈 수밖에없는 하늘 백성인 우리가, 서로 불안해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손 맞잡는 그런 공동체를 만나고 또 만들어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허성호│경북대90

경북대에서 전자공학과를 전공하고 현재는 세 번째 직장에서 기술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커리어로 재밌게 일하고 있는 19년차 공돌이 학사. 서른넷에 만난 착하고 예쁘고 지혜로운 아내와 마흔에 얻은 애교만점인 딸로 인해 날마다 행복하다는 팔불출.















no.216=2-14.10+11

타향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