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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타향살이 10년차_김은희

타향살이 10년차




출가


저는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농촌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청소년 시절, 가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언젠가 출가는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거리에 대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집을 떠나리라고 예상했죠. 어차피 떠날 거라면 성적도 되겠다, 고등학생 때부터 독립하자고 결정해서 읍을 벗어나 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물론 여자아이를 타지에서 혼자 살게 할 수 없다는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저는 그때도 고집이 셌던 것 같습니다. 입학식 전날 하숙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짐을 다 내려 주고 되돌아가시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부모님 차를 타고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날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을 난생처음 느낀 날입니다. 





2005년 9월 서울행


고등학교 성적이 좋았다면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겠죠. 하지만 저는 전주에서 대학을 다녔고 그동안 남동생은 서울에 있는 친척집에서 대학에 다녔습니다. 저는 졸업을 하자마자 고민할 여유 없이 바로 서울로 올라와 동생과 자취를 하며 취업을 준비했습니다. 동생과 함께 살아야 부모님의 부담을 줄어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고, 졸업 전부터 서울에서는 면접 기회가 종종 생기는 반면 아는 사람 많고 친숙한 전주에서는 면접 기회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지인들과 친구들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들과 다른 걸 싫어하면서도 어떤 선택의 순간에는 전혀 다른 제가 되어 선택을 하는 성향이 제게 있는 듯합니다. 이때 서울행을 선택한 것이 현재까지 제 삶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끈 것 같습니다.


2005년 9월, 서울에 올라와 여기저기 이력서도 쓰고 지인의 소개로 몇 군데 면접도 보았지만 매번 쓴잔을 맛보았습니다. 지방대 출신에게 서울에서의 취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경쟁력 없이 종로의 학원가를 전전하며 6개월을 보냈더니 세상에서 점점 존재감 없는 잉여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아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정말 절실한 마음으로 새벽기도회에 나가 딱 한 가지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좋으니 일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말이죠. 제 삶에서 이때만큼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즐거운 나의(?) 집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는 친척집 신세를 졌습니다. 작은아버지 가족 네 명이 살기에 적당한 집이었는데 동생에다가 저까지 얹혀살게 되니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빨리 집을 구해서 나오려고 집을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수중에 가진 돈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방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코딱지만하다”는 표현이 실감났습니다. 훨씬 싼 가격으로도 넓고 좋은 방을 얻을 수 있는 전주가 그리웠습니다. 


우열곡절 끝에 첫 자취집을 구했는데 그나마도 도둑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큰일은 없었지만 불안해서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며칠 전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전세보증금을 올려야겠다고 하면서 준비해 달라고 했었는데 기한이 되어 연락을 한 겁니다. 계약기간이 끝나갈 때마다 치솟는 서울의 전세 값을 따라잡으려면 숨이 턱에 찹니다.





IVF 중앙회 입성

 

취업준비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 마음에 찬바람이 쌩쌩 불던 초겨울의 어느 날, 디아스포라로 중국에서 함께 생활했고 당시 IVF 중앙회 간사로 일하고 있던 친구가 중앙회에서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2003년 여름에 중국 디아스포라 준비모임을 하러 IVF 중앙회관에 처음 가보았습니다. 중앙회관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낯선 IVFer들과의 어색한 만남이 있었던 곳으로 기억할 뿐이었습니다. 학부 시절, 간사라는 직함은 참으로 무겁고 커 보이고 높아 보였기에 저는 친구의 제안에 손사래를 쳤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중앙회 사역은 캠퍼스 사역과는 다르다며 면접이나 한번 보러 오라고 했습니다. 늘 IVF에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참에 IVF를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하는 마음 반,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하던 절실한 마음 반으로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자기소개서와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를 가지고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았고, 2006년 3월부터 중앙회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고향 떠난 설움


제가 맡을 분야는 재정파트였는데 난생처음 회계를 접했습니다. 낯선 곳에서 처음 하는 업무에 대한 긴장감과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출근하고 한 달 만에 덜컥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지하철에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움직이기가 힘들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족과는 떨어져 있고 동생은 출근한 상태이고, 도움을 청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중앙회까지 기어오다시피 해서 왔습니다. 울면서 걸어가던 그 길, 몸이 아파서도 그랬겠지만 혼자라는 생각에 몹시 서글펐습니다. 병명은 급성A형 간염이었고 결국 3주 동안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질병이기도 했지만, 엄청 지저분하던 중국에서 생활할 때도 안 걸렸던 병이 왜 하필 그때 걸렸나 생각해보면, 몇 개월 동안의 타향살이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약해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빠름 빠름 LTE급 서울


가끔 전주에 사는 친구가 서울에 놀러오면 늘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서울이 너무 복잡하고 정신없다더군요. 지하철을 타러 가면 복잡한 노선과 분주하게 걸어가는 인파에 어디를 어떻게 가야할지 몰라 당황할 때가 많고, 버스를 타도 출퇴근 시간도 아닌데 길이 막힌다고 합니다. 밤에도 고요한 맛이 없고 잠자리에 누우면 땅이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참 예민하다고, 서울 사람들은 다들 이러고 산다고 말하면서도 나 역시 서울에 대한 첫인상이 이랬습니다. 처음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는 마치 내가 두더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놀라웠던 것은 거리에 비해 출퇴근 시간이 너무나 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 두 세 시간은 기본으로 길거리에서 보내야 한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고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서울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빨리 걸어 다니는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속도가 빠른 서울에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보물을 얻음


지금 저는 8년의 중앙회 사역을 일단 마무리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업무 역량을 더 키워서 다시 중앙회로 돌아와 더 많은 기여를 하길 기대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졸업한 지 10년 만에 다시 신입생이 되었습니다. 다시 모든 게 낯설어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대학원 선배들이 학교시설 사용 방법과 수강신청 및 공지사항 확인방법은 물론, 해당 과목 교수님의 수업 스타일에 대한 정보도 잘 알려주었습니다. 


개강을 하고 보니, 서울 온 지 얼마 안 되어 처음으로 수도권학사회 모임에 참석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교회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배의 권유로 수도권학사회에 참석했었죠. 쭈뼛거리던 저에게 먼저 말을 건네주고 환대해 주면서 따뜻하게 손을 내민 리더와 소그룹 사람들이 고마웠습니다. 수도권학사회를 통해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교회도 정하게 되었고, 말씀과 나눔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위로를 얻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새신자 소그룹에 속해서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교제했던 게 여러모로 힘이 되었습니다. 3주 동안 입원했을 때는 목사님, 교회 친구들, 또 서울에서 알게 된 지인들이 병문안을 와주었고 심심하지 않게 책과 맛있는 쿠키를 전해 주었답니다. 그들은 서울에 온 어리바리한 나그네의 설움을 감싸 안아 주었습니다. 이제는 아주 친숙해진 이 사람들이 제 인생의 보배입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라


고향을 떠나든 떠나지 않든, 누구나 한번쯤은 새로운 환경을 접하고 삽니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낯선 타인이었지만 정착하는 기간을 거치면 대부분 자기가 나그네였음을 잊고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당연해지면서, 전에 가지고 있었던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다른 이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마련이죠. 돌이켜 보면, 그 정착하는 기간에 저는 혼자 있지 않았습니다. 제 노력으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기간 동안 나그네였던 저를 환대하며 제 곁을 지켜준 제2의 고향 사람들을 떠올리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서울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를 겁니다. 혹시 주변에 다른 지역에서 서울로 공부를 하러 오거나 일하러 온 사람들이 보이시나요? 그들에게 가벼운 안부 문자나 몇 마디 인사를 나눈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에게 위로와 힘을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요삼 1:5~8)

 



김은희│전주대00

2006년부터 IVF 중앙회의 중앙지원부에서 IVF의 살림(회계)을 맡고 있다. 일처리의 꼼꼼함과 사람을 대하는 넉넉한 마음을 함께 지닌 '능력자'로 불린다. 현재는 담당 업무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14학번 새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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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