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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케노시스(kenosis)적 자기하강을 통한 갑을관계의 역전_임왕성

케노시스(kenosis)적 자기하강을 통한 

갑을관계의 역전





2013년 대한민국 사회는 남양유업 사태를 시작으로, 포스코 에너지 상무의 항공기 여승무원 폭행사건, 모 제과회사 사장의 호텔직원 폭행,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 등 불평등하고 위압적인 갑을관계에 대한 폭로와 비판으로 뜨거웠다. 사실 갑을관계로 대표되는 계약관계에서의 불평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할진대 지금에 와서 그동안 침묵하고 있었던 을들의 분노가 터져 나오게 된 데에는 그간 쌓여왔던 고통과 분노가 한계에 다다른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갑을이란 본래 자유로운 계약관계에서 양 당사자를 일컫는 말이다. 관용적으로 갑은 계약관계에서 계약을 수락하는 위치에 있는 자를 가리키고, 을은 계약을 청원하는 자를 일컫는다. 하지만 갑과 을 사이를 규정짓는 힘의 관계가 출발선에서부터 불평등하게 설정됨에 따라 양자의 관계는 단순 계약 당사자가 아닌 상하주종의 관계로 왜곡되었다. 그리하여 갑은 계약과정에서 이미 우위에 있는 지위를 이용하여 불공정한 계약을 체결하거나, 더 나아가 계약과 무관하게 불공정한 행위를 강요하기도 한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한 막걸리 제조판매업체 본사의 경우, 계약서에 들어가 있는 ‘갑은 ~ 이유로 을에게 계약해지를 할 수 있다’ 조항의 항목으로 ‘당사 대리점주의 두발 청결 상태가 한 달에 두 번 이상 청결하지 않을 시’라는 항목을 넣는가 하면, ‘갑과 을의 이해충돌 발생 시 갑의 뜻에 따른다’라는 조항까지 넣는 횡포를 부리고 있다. 





이러한 갑을관계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국가와 국민, 자본과 노동, 임대주와 세입자, 프랜차이즈 본사와 대리점주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사이에도 갑을관계가 진하게 깔려 있다.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이들 간의 상식적인 관계가 사실은 왜곡된 형태의 갑을관계로 질퍽하게 오염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왜곡된 갑을관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갑과 을의 역학관계를 더욱 더 강화 내지는 악화시켜 간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갑 우위로 형성된 계약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갑은 더 강하게, 을은 더 약하게 만들어 간다. 


하지만 부당한 갑을관계에서 낙오된 우리 시대의 을들은 ‘억울하면 출세해서 갑이 되어라’라는 말에 세뇌되어 구조적인 불평등을 자기가 못난 탓, 가지지 못한 탓, 배우지 못한 탓, 연줄 없는 탓으로 돌리며 그 억울함과 분노를 되삼키고만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급기야 갑의 부당한 횡포에 밀리고 밀려 막다른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갑의 몸집은 거대한 괴물처럼 불어나고, 을의 몸뚱이는 최소한의 인간성마저도 확보하지 못한 채 그렇게 퇴화되어 간다. 단기적으로 보면 갑의 절대승리로 끝나는 듯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갑의 몰락 또한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을 없는 갑이란 존재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국민 없는 국가, 노동 없는 자본, 대리점 없는 프랜차이즈 본사, 더 나아가 자연 없는 인간, 여자 없는 남자는 존재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갑과 을 사이의 상호관계를 통해 작동하는 구조적 메커니즘 하에서 이처럼 왜곡된 갑을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것은 갑과 을 양자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뭔가 다른 관계 설정이 시급한 시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런 왜곡된 갑을관계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강준만은 갑을관계를 서열에 따라 먹고 먹히는 사슬관계로 이해하며 그 원인을 한국인의 서열주의에서 찾고 있다.(《갑과 을의 나라》, 인물과사상사) 그리고 그런 서열주의에 중독되어 있는 한국인들에게 있어 갑을관계는 이익 차원뿐만 아니라 ‘을 위에 군림하는 맛’이라고 하는 인정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삶의 기본적인 문법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고 보니 우리만큼 서열을 따지는 민족도 없는 듯하다. 우리는 처음 만난 상대방에게 스스럼없이 나이와 학번, 기수와 군번을 묻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열을 매기고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 서열에 따라 줄을 선다. 혹 그 서열이 무너지게 되는 일이 발생하면 난리가 난다. 동창회 모임의 좌석 배치, 만찬장에서의 자리 배치, 공개된 회의 장소에서의 자리 배치에 상당히 예민하며, 심지어 교회 주보에서 장로님들의 기명 순서마저도 예민한 문제가 된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 특유의 이러한 서열주의가 한국사회 안에서 왜곡된 갑을관계의 확산에 상당히 영향을 미친 것 만큼은 사실이다. 


필자는 여기에 더하여 일제의 침략과 해방, 곧 이은 전쟁 그리고 냉전시대의 경험들 속에서 체득한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현실감각 또한 우리 사회 안에서 갑을관계를 공고히 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제국의 침략과 전쟁을 통해 을의 설움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 내가 강하지 않으면 결국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현실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갑에 집착하도록 만들고, 갑을관계를 정당화하게 되었다. 우리의 아픈 역사가 국민의식을 왜곡시킨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갑을관계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는 국가와 국민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갑을관계이다.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교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는 관존민비(官尊民卑)였다. 관존민비는 결코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관은 여전히 갑의 위치에서 민을 지배하며, 민에 대한 관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갑을관계에서 갑이 절대 우위의 위치에서 계약을 주도하고 결정권을 가지고 있듯 민에 대한 관의 결정은 예나 지금이나 절대적이다. 민의 입장에서 억울하고 일방적인 결정이라 하더라도 관이 결정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게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제주해군기지문제이다. 입지선정과정에서부터 정당한 절차를 밟아오지 못한데다가 시행과정에서 수많은 불법과 위법이 난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주민과 활동가들의 요구에 대해 시정은커녕 정부는 굉장히 가혹하게 응대하고 있다. 사업의 타당성을 떠나 국가의 결정에 반대하는 그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밀양송전탑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기본적으로 관은 민을 대화나 협상의 파트너로 보지 않는다. 관은 항상 결정하고 민은 관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관존민비의 정서가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갑을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본과 노동의 관계이다. 최소한의 삶을 위한 복지기반이 미비한 상황에서 노동소득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 취약성으로 인해, 우리 시대 노동은 철저히 자본에 예속되어 있다. 산업화 시기 노동의 강도 높은 수고와 희생을 통해 지금의 기업성장이 가능했건만, 오늘날 기업은 더 이상 노동을 자신의 파트너로 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실질임금 상승률은 생산성 상승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며, 2006년부터 2010년 사이 기업소득과 가계소득의 연평균 성장률 격차는 18.6 대 1.7에 이르고 있다. 결국 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기업과 가계의 소득격차가 빠른 속도로 증가해 가고 있다. 한편 주요산업 또한 노동중심의 제조업에서 기술 중심의 IT, 전자산업으로의 산업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노동의 설 자리는 더 좁아지게 되었다. 이처럼 지표상의 열악한 위치에 처하게 된 노동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절대반지를 낀 자본에 의해 을이라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요 근래 터져 나오는 자본의 갑질이 가능해지게 된 것이다. 


한편 부동산 시장에서의 갑을관계 또한 심각하다. 과거 가장 확실한 재테크 수단으로 작용했던 부동산 시장의 과열이 서서히 식어가면서 요즘 심각한 전세난을 맞고 있다. 부동산에서 더 이상 투자수익을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매매시장이 위축되게 되고, 그로 인해 주택 실수요자들이 전세시장으로 몰리면서 전세물건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전세 값은 심지어 50주 연속 상승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임대인의 지위 또한 절대갑의 지위로 치솟고 있다. 그리하여 임대인은 절대갑의 지위를 이용하여 임차료를 과도하게 인상하거나, 임차료 인상을 무기로 전세에서 월세로의 전환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등의 횡포를 부리고 있다. 더군다나 상가임대차계약의 경우 그나마 허술한 상가임대차보호법의 적용이 환산보증금 3억 원 이하에만 적용된다는 허점을 이용하여 재건축, 소유권 변경 등을 이유로 갑의 횡포가 상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처럼 우리가 몸으로 부딪히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의 영역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측면에서의 갑을관계 또한 심각하다. 대표적인 것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 남성과 여성의 관계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자연)를 인간 삶의 더 나은 풍요와 편리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어떻게든지 이용하고 조작하고 착취해도 무방하다는 사고가 우리의 의식 속에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어 무분별한 자연훼손이 발생한다. 또한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고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여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 혹은 부수적인 존재로 보아 여성을 차별하고 지배하려는 경향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그렇다면 과연 갑을관계는 소위 말하는 ‘세상’만의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 안에서 확인되는 갑을관계 또한 분명히 존재하며, 어찌 보면 교회 안의 갑을관계는 사회보다 더 심각하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있는 갑들은 종교적인 권위로 무장하거나 종교적인 레토릭(rhetoric)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아마 교회 안에 있는 갑의 전형은 ‘성공한’ ‘대형교회’ ‘남성’ ‘목사’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 요소가 함께 결합했을 때는 슈퍼 갑이 되는 것이다. 섬김의 왕이셨던 예수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교회 안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모순적인 갑을관계에 대해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남오성 목사는 ‘갑을관계가 아니라 갚을 관계’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갑을관계는 우리 삶, 의식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전 방위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왜곡된 형태의 갑을관계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갑과 을이 더불어 공존하도록 창조된 세계의 질서가 깨어지고 난 이후 세상은 철저히 갑이 을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삼키는 형태로 추락했다. 그런 상황 하에서 터져 나온 을들의 탄식을 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셔서 다시금 갑과 을이 평등해지는 거룩한 나라를 회복하길 원하셨다. 


그러한 하나님의 바람은 여전히 갑이기를 원하는 인간들의 제어되지 못한 탐욕으로 인해 좌절되는가 싶더니 섬김의 왕이셨던 예수님의 삶과 비전과 부활로 인해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그것은 바로 갑과 을의 평등을 넘어 이제는 오히려 갑이 을을 섬기는 나라로의 전환이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과 신분과 성별을 넘어 하나가 되었다(갈3:28)고 전했지만, 사실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급진적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막10:45)임을 말씀하시며 슈퍼 갑이셨던 지위의 케노시스적 역전을 스스로 보여주셨다. 이처럼 성경은 또 예수님의 삶과 비전은 지배적이고 주종적인 갑을관계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갑과 을의 평등, 공존 더 나아가 오히려 갑이 을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관계를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을의 탄식과 부르짖음의 소리가 하늘에 닿았을 때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고 응답하셨다.(출2:23~25) 그리고 갑의 횡포에 대해 분명하게 보응하셨고, 그 보응의 역사는 거룩한 백성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을로서 당했던 고통의 역사 그리고 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인가? 교회와 성도들이 아닌가? 그러할진대 교회 안에서조차 이러한 왜곡된 갑을관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도는 왜곡된 갑을관계를 바로잡는 회복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케노시스적 하강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갑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그 지위가 주는 힘과 영향력을 을들을 섬기는 데 아낌없이 낭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거룩한 힘의 낭비를 통해 우리 사회 갑의 횡포를 고발해 내고, 을의 자리를 회복시켜 주어야 아니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의 힘이고 성도의 힘이다. 교회와 성도들의 헌신을 통해 우리 사회 을들의 탄식이 그치는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뚜렷하게 이 시대 가운데 드러나는 때가 될 것이다.




임왕성│새벽이슬 총무

대학교 1~2학년 때 C.C.C.에서 훈련받고, 군 제대 후부터 새벽이슬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감투를 경험했다. 2003년 이라크전쟁 반대를 위한 기독인연대 공동대표, 2004년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장, 2004년 16대 총선 전국대학생 부재자투표운동본부 대변인 등을 맡았으며, 2005년부터 새벽이슬 간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