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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체험, 삶의 현장Ⅳ] 간사와 장사, 그리고 학사_좌성훈

[소리] 2017년 여섯 번째 소리- 120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체험, 삶의 현장Ⅳ]


▷ 체험, 삶의 현장Ⅳ (1) - 나는 월급쟁이가 아닌 선생님입니다!_유홍렬

▷ 체험, 삶의 현장Ⅳ (2) - 우리 가족의 제주행(行)_차희철

▷ 체험, 삶의 현장Ⅳ (3) - IVFer를 넘어 TCFer로!_현승호

▶ 체험, 삶의 현장Ⅳ (4) - 간사와 장사, 그리고 학사_좌성훈






간사와 장사, 그리고 학사 


 


좌성훈 ◆ 제주대 00

제주 토박이인 아내와 결혼하여 아이 셋을 둔 아빠. 

9년간의 제주IVF 간사사역을 마치고 현재는 제주특산품&기념품 판매장 ‘오달콤 제주’를 운영 중이다. 

제주도 서쪽 외곽지 '협재'에 5가정과 함께 모여서 대안공동체를 이루고자 6년 째 고군분투 중이다.




# 간사가 장사를 시작하다

 9년간의 IVF 간사 사역을 마무리하고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였다. 때마침 지역특산품을 판매하는 협동조합의 창립멤버로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나는 간사사역 마지막 학기에 6개월 동안 틈틈이 시간을 내어서 제주서문시장에 위치한 협동조합 특산품 판매장에서 일을 해보았다. 캠퍼스에서 신입생들을 만나듯 고객들을 만나는 일이 좋았고, 캠퍼스에서 복음을 소개하고 전하듯 다양한 제주특산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이 즐거웠다.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제주특산품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장사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 간사로 지낸 경험

 제주동문시장 부근에 괜찮은 조건의 매물이 나와서 임대차계약을 했다. 막상 특산품 판매장을 시작하려 하니 고민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가게 이름을 정하는 ‘작명’부터 난관이었다. 또한 가게이름과 컨셉에 맞추어 인테리어를 해야 하는데 나는 작명의 은사도, 인테리어나 디자인 감각도 없는 사람이었다. 간사시절 수련회 주제를 정하기 위해 간사들이 협력했던 시간이 생각났다. 그래서 간사사역하면서 가깝게 지내게 된 분들 중에 작명과 디자인에 감각이 있으신 분을 제주도로 모셨다. 영남동부 대표간사로 섬기셨던 정동철 간사님인데 현재는 ‘디자인잇다’를 운영하면서 ‘몸된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멘토와 같은 선배님이셨다. 이분은 작명, 디자인. 인테리어. 장사기법 등 나에게 없는 모든 것(?)을 갖춘 분이었다. 당시 목조주택을 짓는 일을 하고 있었던 내 남동생도 함께 머리를 맞대었다. 우리는 함께 모여 마치 간사사역 시절에 ‘어떻게 하면 신입생들을 IVF에 들어오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관광객들이 우리 매장에 들어오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여러 현장을 돌아다니며 회의를 했다. 





 많은 논의와 아이디어 회의 끝에 지금의 ‘오달콤제주’가 탄생하게 되었다. 수련회 주제와 전체적인 프로그램이 어우러지듯 가게 이름과 인테리어, 판매상품들이 조화를 이루도록 신경 썼다. 그리고 IVF에 연결된 신입생들이 공동체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무언가를 계속 주려 했던 것처럼, ‘오달콤제주’에 찾은 손님들에게 어떠한 혜택을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캠퍼스 상황과 학생들의 필요를 살피듯 제주동문시장을 찾은 관광객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곳은 굉장히 주차하기가 힘들어서 대부분 유료주차장을 이용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부분의 렌터카가 우리 매장 앞을 지나게 된다는 것을 포착했다. 그리하여 나는 주변 유료주차장과 공영주차장을 찾아가 주차권을 구입해서 ‘오달콤제주’를 찾는 고객들에게 ‘무료주차권’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고객들은 좋아했고 ‘무료주차권’ 지급한다는 홍보문구를 보고 찾는 손님도 많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제 막 시작한 장사가 자리 잡을 리 만무했다. 손님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냥 나가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마치 신입생들이 IVF 선배가 밥도 사주고 같이 보드게임도 하면서 즐겁게 해줘서 좋았지만, IVF 활동은 안 하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빈손으로 나가는 고객들을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도 지었고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손님이 “여기에는 내가 찾는 000 상품이 없네요?”라고 이야기하며 나가는 모습에서 캠퍼스 간사 시절 “IVF 공동체에는 사랑이 없네요?”라고 말하며 공동체를 떠났던 학생의 모습이 겹쳐졌다.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우리 매장을 찾는 고객들과 짧게나마 대화를 시도했다. 우리 매장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찾는 물건이 있는지, 어떤 물건들을 찾는지 고객들에게 여쭤보고 초콜릿을 나눠주면서 조사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매장을 찾는 손님의 90%이상이 20~30대 여성고객이라는 사실과 감성적인 기념품을 많이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나는 다른 직원이 근무하는 동안 시간을 내서 제주도에 알려진 감성기념품 샵들을 돌아보고 감성기념품을 파는 플리마켓을 찾아다녔으며, 그러한 기념품을 우리 매장에 들여놓았다. 그랬더니 매출이 올라가는 게 아닌가! ‘할렐루야~~!’ 





# 대표간사로서의 경험

 나는 제주IVF의 두 번째 전임간사였다. 그만큼 제주IVF는 개척지부처럼 열악한 인프라로 사역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간사를 사임하기 전 3년간 대표간사로 섬기게 된 것도 선배간사님이 3년간 신학연수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신학연수도 하지 않은 저년차였던 내가 그 자리를 감당해야만 했다. 게다가 제주IVF는 재정을 담당해주는 사무간사를 세우기 어렵기 때문에 중앙회 재정담당 간사님의 도움을 받으며 대표간사가 일정부분 역할을 감당해야만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작은 규모이긴 했지만 수입 지출이 오가는 재정 관리 과정을 배우게 되었다. 장사를 시작하니 홍보, 마케팅, 매장관리, 신제품 컨택, 재정 관리 등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했다. 그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재정 관리였는데 대표간사 3년간의 경험을 도입하여 우리 지방회 재정을 관리하듯이 비슷한 포맷으로 재정 관리를 시작했다. 간사 시절 재정관련 전문적인 영역은 중앙회 간사님 도움을 받았듯이 내가 감당하기 힘든 재정관리 영역은 개인세무서의 도움을 받았다. 모든 경험이 이토록 깨알같이 쓰임 받다니, 참으로 놀라우신 하나님이다! 



# ‘오달콤제주’의 홍보대사

 제주특산품 매장 ‘오달콤제주’는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매장이 아니다. 즉, 제주도에서의 인맥보다는 타지역 인맥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와 비슷하게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사업체들은 타지역에 자신들을 알리고자 SNS나 인터넷 홍보 마케팅 비용을 많이 지출한다. 그런데 IVF는 전국구 단체 아닌가! 간사 시절에도 SNS를 애용했던 나는, 장사를 시작하고 나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SNS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전국 각 지역의 IVF 지인들이 ‘좋아요’나 ‘공유하기’를 한 번씩만 해줘도 금방 우리 매장이 알려지고 확산되었다. 사람 만나기 좋아했던 내가 IVF 간사로 섬기면서 각종 수련회, 세미나, 대회들을 통해 맺어진 전국 각지의 인연들(학생, 학사, 간사, 그리고 그분들의 지인들)은 대부분 타 지역 사람들이었다. 특히 대표간사로 섬겼던 마지막 3년간은 전국 각 지역의 대표간사님들을 만나 교제하며 다양한 지역의 학사님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으니, ‘오달콤제주’는 막대한 홍보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이 먼저이고 사람이 재산이다. 





# 제주도의 실상

 간사 시절에는 복음화 비율이 전국 최저인 ‘제주도’라는 독특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다. 성경을 연구했고 역사를 공부했다. 그러면서 4.3사건 당시 억울하게 죽어가는 제주도민들과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학살을 강행하는 무리들 편에 섰던 제주기독교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당시 제주천주교는 아픔과 고통을 겪는 도민들과 함께 하였기에 지금도 제주도민들에게 존경받으며 활발한 포교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 역사의 부끄러운 모습이 제주강정마을에서 반복되었음을 캠퍼스 학생들과 함께 현장을 찾아다니며 목격하기도 했다. 제주기독교는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많은 군인과 그 가족들이 거주하여 인구가 늘어나게 될 것이고 교회가 부흥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하고 다녔다. 강력한 군사력, 즉 힘에 의한 평화를 제주기독교 교계가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샬롬을 잃어버린 제주강정마을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을 외면하고 있음을 처절히 보게 되었다.


 장사를 하면서 경험한 제주도의 실상은 더욱 참혹했다.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국내 최고의 여행지에 살고 있는 제주도민들은 여행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 5년간 전국 최고의 부동산 상승률을 기록했다. 제주시내도 올랐고 외곽지는 관광지여서 같이 올랐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부동산 투기꾼들이 제주도에 달라붙었으며, 중국투기꾼들은 제주도를 구워먹고 삶아먹고 있다. 그런데 제주도는 근로자 평균임금 수준이 전국에서 제일 낮은 곳이다. 국내외 관광객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관광객들로부터 번 돈은 당일 송금되어 제주도를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곳이 제주도의 대기업 면세점들이다. 그들은 그날 매출을 당일에 본사로 송금한다고 한다. 대규모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세워놓은 숙박, 식당. 면세점, 폐쇄형 특산품매장을 돌리면서 돈을 벌어들인다. 도민들은 대부분 그들의 업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주살기를 하겠다며 서울에서 오신 여러 사모님들은 외제차를 끌고 다니면서 제주 외곽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 안주인 행세를 한다. 우리 공동체 식구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도 아담하고 작은 학교인데 학생들의 60%가 타 지역에서 오신 분들의 아이들이다. 생각과 가치관이 바로잡혀 있는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화가 난다. 제주도민을 먹여 살리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름다운 자연환경인데,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며 자연유산인 구럼비를 시멘트로 뒤덮어 버렸다. 사드 때문에 주춤했지만, 밀려드는 중국 관광객들을 받아야 하기에 공항을 지어야 한다며 마을 사람들을 한순간에 내쫓는다. 곶자왈과 같은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들이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무참히 짓밟히고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관광객들이 버리고 가는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도 도민들이 감당한다. 제주도민들은 개발의 주체도 되지 못하고, 개발 이익을 나눠 갖는 일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미개한 원주민 취급만 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주도에서 저임금으로 살아가는 학사들의 삶은 참으로 팍팍했다.





# 간사와 장사, 그리고 학사 

 작년 11월 장사꾼이 되어가고 있던 나에게 제주학사회 회장이라는 역할이 주어졌다. 그 누구도 선뜻 회장으로 섬기려 하지 않았다. 교회생활도 힘든데 IVF 학사회는 왜 필요한지 질문을 던지는 학사들이 많았다. 그렇다. 일상생활도 힘들고 주일 교회생활에서도 많은 갈등과 고민이 넘쳐나는데 IVF 학사회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우리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부터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임원들과 여러 차례 만나며 우리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묻고 답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통해 제주지역교회가 감당하지 못하는 많은 영역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 학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제주도에 이주해서 살고 있는 IVF 학사들도 함께 하기 위한 시도들도 해보기로 했다. 제주도라는 지역성을 활용하여 ‘지역학사그룹’을 형성했고 한 달에 한 번은 지역모임으로, 한 달에 한 번은 큰모임으로 모여서 제주지역교회가 다루지 못하는 이슈들을 담았다. 학사들이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이슈들이지만 교회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고 쉬쉬하는 이슈들 말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이뤄가는 것처럼, 제주도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학사들이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도록 플랫폼 역할을 학사회가 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10년 정도 꾸준히 해볼 생각이다. 캠퍼스 시절은 짧았지만 우리가 터 잡고 살고 있는 곳에서는 꽤 긴 시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해결되지 않더라도 당장의 가시적 성과를 바라지 않고 길~게! 반복적으로 시도하기로 했다. 캠퍼스 시절에는 졸업하면 학사가 되지만, 학사를 졸업하는 때는 죽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한 번 살다 죽을 인생, IVF를 통해 품은 하나님나라 소망을 펼쳐보기 위해 시도하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이 땅을 떠나는, 그런 학사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