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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체험, 삶의현장Ⅳ] 나는 월급쟁이가 아닌 선생님입니다!_유홍렬

[소리] 2017년 여섯 번째 소리- 120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체험, 삶의 현장Ⅳ]


▶ 체험, 삶의 현장Ⅳ (1) - 나는 월급쟁이가 아닌 선생님입니다!_유홍렬

▷ 체험, 삶의 현장Ⅳ (2) - 우리 가족의 제주행(行)_차희철

▷ 체험, 삶의 현장Ⅳ (3) - IVFer를 넘어 TCFer로!_현승호

▷ 체험, 삶의 현장Ⅳ (4) - 간사와 장사, 그리고 학사_좌성훈







부산과 전북 그리고 춘천에 이어, <소리>는 네 번째 “체험, 삶의 현장”으로 제주를 방문했습니다. 

경치는 아름답지만 그 속에서도 거센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학사들의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제주 속의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의 삶이 여러분의 터전에 스며들어 위로와 도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바당과 보름, 쉼팡이 이신 곳. 여기는 제주도우다." (바다와 바람, 쉼이 있는 곳. 여기는 제주입니다.) | 이재웅(상명98)



 

나는 월급쟁이가 아닌 선생님입니다!

 

유홍렬 ◆ 제주교대05

초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제주TCF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기독교사 공동체의 귀중함을 깊이 느끼고 있다.



(필자와의 협의에 따라 학생들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제주도에서 교사로 살아온 지 어느덧 6년. 교직생활은 그냥 적당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미 교사라는 게 쉽지만은 않은 직업이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작년은 내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해였다. ‘교실이 이렇게까지 지옥이 될 수 있구나’하며 날마다 새로운 충격을 받았고, 겨우 잠들고도 새벽에 깨어나 미친 듯이 소리치며 기도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던 한 해를 보냈다.


 2공 펀치를 내 책상 위에 내려치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큰소리를 지르는 아이, 혜수. 혜수 안에는 깊은 상처가 있다. 혜수는 학기 초부터 수업을 거부하고 한 아이돌 그룹에 빠졌다. 수업 중에 각 멤버들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적는가 하면, 멤버들의 사진으로 책을 만들곤 했다. 타이르기도 하고 화도 내보았지만 아이의 고집은 완강했다. 


 하루는 “혜수야, 그 아이돌 사진 있잖아. 수업 중에 안 하면 선생님이 컬러 스티커로 뽑아줄게”라고 제안했다. 아이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방과 후에 출력해준다는 말이 솔깃했던 것 같다. 방과 후가 되자 뽑아달라며 다가왔고, 나는 혜수가 사진을 출력할 수 있도록 컴퓨터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러나 3장으로 제한했고, 급한 업무가 있을 때는 뽑아주지 않았다. 아이는 이에 불만을 가졌고 나와 늘 실랑이를 벌였다. 혜수를 따라다니는 친구 가영이도 수업 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공작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도 혜수를 따라서 수업을 듣지 않을까봐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어쨌든 이 문제를 이렇게 놔두면 안 된다는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7월이 되도록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혜수는 힘이 엄청 셌는데, 또 다른 친한 친구인 주희를 늘 때렸다. 퍽, 퍽 큰소리가 났고, 나는 그때마다 웃는 주희가 안쓰러웠다. 주희는 웃으며 “씨xx아! 그만해!”하고 말했다. 그러면 혜수는 “뭐? 이 못생긴 x이!”하면서 더 심하게 때렸다. 두고 볼 수 없어서 그만하라고 막으면 뭔데 참견이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어느 날, 혜수의 가방이 낡아서 가방 끈 부분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것을 발견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책가방을 하나 사서 혜수가 좋아하는 캐릭터인 가오나시(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나오는 유령캐릭터) 인형을 가방에 매달아 선물해줬다. 다음날 혜수는 내가 사준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왔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혜수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기대가 커서 실망도 컸을까? 나는 그때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했다. 혜수는 그 일을 잊지 못하고 그 이후부터 나를 복수와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용서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도 많이 후회가 된다. 


 그 일이 있던 날 아침, 혜수는 내가 사준 가방을 메고 자리에 앉았다. 내 기대대로라면 혜수는 아이돌의 사진을 꺼내면 안 되었다. 그러나 혜수는 그날도 역시 사진을 꺼내 가위로 오리기 시작했다. 나는 “혜수야, 사진하고 가위 넣어줄래?”라고 말했다. 아이는 내 말을 무시했고, 나는 순간적으로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아이의 책상을 뒤엎었고, 내가 사준 가방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아이에게 소리쳤다. “너 이렇게 할 거면 학교 오지 마! 나가!” 아이는 굉장히 당황스러워했고, “내가 왜 나가요? 싫어요!”하면서 교실 뒤에 서서 버텼다. 반 아이들은 다 고개를 돌리고 나와 혜수를 바라보았다. 난 혜수를 끌어내서 일단 교실 밖으로 보낸 다음 들어오게 할 심산으로 나가라고 계속 소리쳤고, 혜수도 여전히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혜수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냈다. 아이는 거세게 저항했고, 아이의 주먹이 내 가슴을 내리쳤다. 혜수의 힘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셌다. 나 역시 굉장히 당황했지만 여기서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혜수를 뒷문 밖으로 끌어냈다. 혜수는 다시 앞문으로 들어왔고, 끝까지 버텼다. 


 나는 그날 바로 혜수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혜수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선생님이 실수하신 것 같다고 하시고 혜수는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아이라 이번 일이 굉장히 상처가 되었을 거라고 걱정하셨다. 그날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혔다. 문제 해결을 위해 아이와 함께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교장선생님은 나에게 일을 보러 나가라고 하셨고, 교감선생님과 혜수가 상담을 하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2학기가 되자 혜수는 더 적극적으로 수업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혜수를 중심으로 주희, 가영이도 수업을 거부하고 공작활동과 잡담에 집중했다. 이제는 수업시간에조차 들어오지 않았고 여자화장실에서 버텼으며 나는 늘 들어오라고 소리쳐야 했다. 혜수, 주희, 가영이는 계속해서 수업 중에 떠들었고, 수업에 피해를 주었다. 몇몇 아이들은 “조용히 좀 해. 선생님 말씀이 하나도 안 들리잖아!”라고 할 정도로 힘들어했고, 혜수는 그럴 때마다 “네가 뭔데 지랄이야?”라고 대꾸를 했다.


 그때까지 관계가 좋았던 아이들에게는 “선생님 좀 도와줘. 선생님이 혜수랑 다시 관계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렴”이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 아이들은 점점 더 수업을 듣지 않게 됐다. 수업에 들어오지 않겠다며 화장실에서 버텼고, 떠들고 욕을 하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남자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갔다. 이제 수업 중에 수업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 그리고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 소수의 학생들뿐이었다. 그 중 한 아이가 “제발 수업 좀 듣게 조용히 해줘!”라고 소리치면 “뭐? 이 xx야. 보라돌이 키다리 같은 x이!”하면서 욕이 돌아왔고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혜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혜수는 내 자리에까지 나와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이 씨x. 내 연필 왜 가져 가냐고! 내 팔목에 멍든 거 사진으로 가지고 있어. 책임지라고 씨x!”, “우리 엄마가 핸드폰으로 녹음한 거 다 들었어. 우리 엄마가 너 싸가지 없다고 했어.” 방과 후마다 한 시간 정도는 나를 자극했고, 옆에서 다른 친구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이런 광경을 녹화했다. 혜수는 “내가 너 열 받게 해서 네가 나 때리면 경찰에 신고해서 너 잘리게 할 거야”라고 말했다. 아이가 방과 후와 쉬는 시간에 날 자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혜수가 자기 분을 참지 못하고 2공 펀치를 교사용 책상에 내리치며 거품을 물고 욕하던 그 모습이 여전히 잔상으로 남아 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을까? 아이가 욕을 하면 “미안하다. 선생님이 상처 줘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혜수는 되레 더 성질을 부렸다. 도저히 못 견딜 때면 “그만해! 조용히 하지 못해! 선생님한테 ‘니’가 뭐야?”하며 소리도 쳐보고 다시 죄책감이 들어 “혜수야. 선생님이 미안하다. 선생님 너무 힘들다. 이제 그만하자”라고 사정도 했다.





 그 시절이 기억난다. 교실이 처참히 붕괴되었던 시절,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았던 시절.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으나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재정적인 책임을 지고 있던 나는 그만둘 수도 없었다. 운전하며 한라산 자락을 넘어가면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던 그때, 학교에 도착할수록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커지던 그때,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골고다 언덕에 올라갈 때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는 것 같다는 교만한 생각이 드는 그런 때였다.


 바로 그 시절에 딱 한번,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며 위로를 받았던 사건이 일어났다. 12월 중순쯤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내 수업을 준비했다.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며 최대한 아이들과 마찰 없이 보낼 방법을 연구하느라 날밤을 샜다. 너무 힘들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사고가 터졌다. 


 다운 받아 놓은 ‘펭이와 솜이’라는 자연 다큐멘터리가 오류가 생겨 중간에 멈추면서 문제가 생겼다. 수업시간은 20분 정도 남은 상태였다. 나는 어찌할지 몰라 허둥댔고, 곧이어 아이들이 불만을 쏟아냈다. “무서운 영상 틀어주세요!” 아이들이 잇달아 뭘 틀어 달라, 뭘 틀어 달라 하며 아우성을 쳤다. 나는 일단 아이들이 보여 달라는 영상을 먼저 봤다. 하지만 너무 잔인해서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원성을 쏟아냈다. “틀어주라고, 틀어줘!” 한 학생이 외치자 혜수가 앞으로 나왔고, 또다시 교사용 책상에 있는 2공 펀치를 두드리며 “너 나와! 내가 틀면 되니까!”하며 소리를 쳤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던 중에 하교시간이 되었고 급하게 가정통신문을 나눠줬다. 혜수는 자기 분을 참을 수 없었는지 내가 나눠 준 가정통신문을 동그랗게 말아 내 얼굴에 던졌다. 너무 큰 충격이었다. 아이들은 웃었다. 나는 무력한 나 자신에 대한 창피함보다, 분노보다,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그냥 넘어갔다. 이미 수없이 교장, 교감선생님께 이야기했고 주변에 있는 동료 선생님께 이야기했지만, 내가 거듭 확인한 것은 그들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고 내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뿐이었다. 교감선생님은 “선생님은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 같아”라고 했고, 교장선생님은 “교권 침해한다고 뭐라고 하지 말고 너부터 학습권 침해하지 마!”라고 했다. 교권보호위원회를 열어달라고, 학생선도위원회를 열어달라고 말해도 결국 의미 없는 말에 불과했다. 동료 선생님들은 내 상황을 안타까워했지만 자신이 맡은 학급을 건사하기에도, 또 많은 업무를 처리하기에도 이미 에너지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교감선생님이 “그래도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나서 민원 내지 않는 게 다행이다”라고 했을 때, 학부모들이 문제 삼지 않으면 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일개 교사 한 명이 잘못을 했고 학생을 함부로 대했으니, 학년이 끝날 때까지는 무력하게 학생들로부터 상처받고 무시당하고 짓밟혀도 그냥 가만히 밟혀야 하는 게 마땅한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게는 하소연할 수 있는 TCF 공동체가 있었다. 내가 힘든 이야기를 털어 놓을 때 같이 울어주며 기도해준 공동체였다. 혜수에게 돌돌 말린 가정통신문으로 얼굴을 맞은 날, 나는 멍한 상태로 모임에 왔다. 나는 비참하게 울며 힘든 상황을 이야기했고, 공동체 지체들은 나의 등과 머리에 손을 올리고 함께 기도했다. 사실 나는 잘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에 대해 의심한다는 게 아니라 기적이라는 것을 잘 믿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구차하게 주님께 기적을 간구했다. ‘주님, 진짜, 조금이라도 우리 애들이 나아지게 해주세요. 내 눈으로, 조금 나아지는 것이라도 보게 해주세요.’ 





 모임을 마치고 집에 가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기도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내와 매일 두세 시간씩 통화하지 않으면 그 상황을 버틸 수가 없었다. 주말부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상황이 너무나도 잔혹하게 느껴졌다. 아내는 꿋꿋하게 성경말씀을 적어 아침저녁으로 문자를 보내면서, 주님이 위로해주실 거라고 구원해주실 거라고 말했다. 아내는 나의 히스테리적인 모든 외침을 다 받아주었고 평안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날 저녁도 역시 쉽게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악몽을 꾸며 새벽 3~4시경에 눈이 떠졌다. 나는 컴컴한 거실로 나가 미친 듯이 외치며 주님께 기도했다. 너무 힘들다고, 버틸 수 없다고, 제발 구원해주시라고, 그렇게 반복해서 외치며 기도했다. 눈물이 나오고 성령께서 함께하심이 느껴졌다. 


 다음날인 금요일 아침, 나는 목격했다. 주님이 살아계심을 말이다! 전날 목요일 종례 시간에 가정통신문을 전달하러 왔던 6학년의 한 아이가 우리 교실의 붕괴된 모습, 내가 돌돌 말린 가정통신문으로 얼굴을 맞는 모습을 목격했고, 다급하게 교감선생님께 뛰어가 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교감선생님은 문제가 되는 여자 아이들 몇 명을 개별적으로 불러 다른 선생님과 일대일로 상담하게 하는 등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해주셨다. 곧바로 교장선생님도 학부모들을 단체로 불러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을 해주셨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만약, 다음 주에도 애들이 여전히 문제를 일으킨다면’이라는 조건이었다. 이날 처음으로 ‘학교 공동체가 나의 문제 해결을 도와주고 있구나!’라는 마음이 들었다. 늘 상처가 되는 말을 하셨던 교감선생님은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선생님이 정말 마음고생이 심하셨겠네요. 상황이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날 처음으로 살아볼 만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고, 곧이어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TCF공동체에 메시지를 발송했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을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다음 주 월요일에도 아이들은 잠잠했다. 1주일 정도는 교실이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목격했던 것 같다. 그후 아이들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갔지만 나는 그때 하나님이 내 상황을 그냥 놔두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이 나를 그냥 월급쟁이가 아니라 교사로 부르셨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죽을 때까지 마음에 간직하게 될 기억이자 값진 보물임을 깨닫게 해주셨다. 


 전에는 아이들 때문에 힘들다고 하시는 선생님들의 말에 공감이 되지 않았다. 속으로 은근히 ‘왜 힘들지? 그냥 한번 윽박지르면 될 텐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힘들어하는 선생님을 보면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와드려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다. 학교 안에 팽배해 있는 교실이기주의, 문제 발생 시 담임교사의 책임으로 모두 돌려버리는 부조리한 현실, 비합리적인 절차와 구조 등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고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하고, 전문성으로 무장하여 준비해야 하며, 그리고 주님이 날 위해 돌아가신 그 마음으로 교단에 임해야 함을 깨닫게 해주셨다. 지독하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내 힘으로 버텨보려고 했던 내가 내 연약함을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사사기를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저렇게 미련하게 주님을 잊어버리는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말씀이 바로 나를 향한 말씀이었다.


 올해는 새로운 작은 학교에서 8명의 아이들과 여전히 씨름하며 나의 연약함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작년의 경험은 더 이상 나를 월급쟁이에 머물지 않도록 해주었다. 우리 아이들 8명을 정말 사랑하고, 아이들의 영혼을 세심히 배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너무 부족한 것을 깨닫고 있다. 그래서 더욱더 하나님 안에서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힘으로 하고자 할 때 모든 힘을 잃었던 경험이 깊게 자리 잡고 있기에 늘 주님께 기대어 있으려고 한다. 이 글을 쓰며 작년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게 정말 어려웠다. 그냥 덮어두고 잊고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며 깨닫게 된 게 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걸 말이다. 이 기억이 있으므로 주님이 나를 교사로 부르셨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유혹의 고리와 맘몬의 권세에 놓여 정신이 흐릿해질 때면 혜수를 포함한 우리 5학년 3반 아이들이 콕콕 가슴을 찌른다.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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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험, 삶의 현장Ⅳ (1) - 나는 월급쟁이가 아닌 선생님입니다!_유홍렬

▷ 체험, 삶의 현장Ⅳ (2) - 우리 가족의 제주행(行)_차희철

▷ 체험, 삶의 현장Ⅳ (3) - IVFer를 넘어 TCFer로!_현승호

▷ 체험, 삶의 현장Ⅳ (4) - 간사와 장사, 그리고 학사_좌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