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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체험, 삶의 현장Ⅳ] IVFer를 넘어 TCFer로!_현승호

[소리] 2017년 여섯 번째 소리- 120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체험, 삶의 현장Ⅳ]


▷ 체험, 삶의 현장Ⅳ (1) - 나는 월급쟁이가 아닌 선생님입니다!_유홍렬

▷ 체험, 삶의 현장Ⅳ (2) - 우리 가족의 제주행(行)_차희철

▶ 체험, 삶의 현장Ⅳ (3) - IVFer를 넘어 TCFer로!_현승호

▷ 체험, 삶의 현장Ⅳ (4) - 간사와 장사, 그리고 학사_좌성훈








IVFer를 넘어 TCFer로!

 




현승호 ◆ 제주교대 97

제주에서 세 아이의 아빠로,  전국 TCF 공동대표로, 교육팟캐스트 ‘샘샘샘’의 진행자로, CCM찬양 ‘주님은 나를’의 가수로,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로 살고 있는 제주 촌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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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회. 내 항공권에 찍힌 대한항공 탑승 횟수다. 아마 다른 항공사의 탑승횟수까지 합하면 300회를 넘기지 않을까 싶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항공사와 관련된 사람도 아니고, 그저 초등학교 교사에 불과한 내가 어떻게 비행기를 이렇게 많이 타고 다녔을까?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제주도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내가 TCFer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제주교육대학교에 입학하고 교대IVF를 개척했다. 내가 교대IVF를 개척한 것이 아니고 교대IVF가 나를 개척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물론 나 자신조차 잘 모르던 내가 IVF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또 나를 찾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도 IVF를 통해 만났다. 그리고 대학 4학년 무렵에 한국기독교사회(TCF)를 알게 되어 그후로 16년째 IVFer를 넘어 TCFer로 살고 있다. 





  대학시절이던 90년대 말, 대학가에는 데모와 운동권이 사라진 시대였지만 유독 교대에는 데모가 많았다. 교대와 일반대 통폐합 문제와 교원임용 문제 등으로 수업을 거부하고 방학을 반납하며 투쟁이 이어졌다. 그런 덕분에 IVF에서 세계관 공부를 하던 나로서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80년대 선배들이 했던 고민을 조금은 맛볼 수 있었다. 일반대 학생들과 함께 LGM을 드리던 시절이었는데, “교육부 장관은 자폭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나, 기독교적으로 데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사대 통폐합은 성경적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더 나아가서 ‘인본주의 교육과정으로 가르치는 것이 맞나? 기독교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대안학교는 어떠해야 하나?’ 등,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고민으로 혼자 심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4학년을 앞두고 참가한 IVF 학사회 평생동역자 수련회 선택강의 시간에 서울 TCF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고 거기서 기독교사 신문도 보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사 신문에는 2000년 여름에 전국기독교사대회가 열린다는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그해 여름, 4학년으로 열심히 임용고시를 준비해야 할 때였지만 나는 제주교대 IVF 후배를 데리고 교원대학교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또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전국에서 기독교사로 살고 계신 교사 1800명을 만난 것이다. 나의 고민을 이미 삶으로 살아내고 있는 수많은 선배 교사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만났다. 그때 그곳에서 나는 기독교사운동으로 부르심에 확신을 얻었다. 지금도 나는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임용고시를 앞두고 수련회에 참가하여 두려워하고 있는 내 손을 잡고 기도해 주신 옆자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 기도가 나에게 큰 평안을 주었다. 주님이 나를 기독교사로 부르셨으니 임용고시에 지금 당장 합격하고 안 하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자신감까지 얻었다. 


  그러다 보니 공부도 많이 하지 못한 내가 바로 3월 1차 발령을 받은 것은 제주도에서 빨리 기독교사 운동을 시작하게 하기 위한 주님의 계획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2001년 함께 교직을 시작한 3명의 선생님이 작은 내 자취방에 모이면서 제주의 첫 번째 전문학사운동인 제주TCF가 시작되었다.





  한국기독교사회(TCF)의 시작도 그랬다. 1980년 서울 서대문 미동아파트 8층 IVF 사무실에서 IVF 출신 교사 6명이 모이면서 TCF운동은 태동했다. 당시 송인규 목사님이 IVF에서 훈련받아 졸업한 교사들을 모아놓고 기독교사 모임을 시작하라고 등 떠민 게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사 모임으로 자라났다고 한다. 이후 IVF 학사회 안에서 기독교사 모임으로 모이다가 OMF에서 파송 받은 호주 초등교사 출신의 나덕영 선교사님 소개로 호주 TCF를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TCF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학사운동이 개척되었다. 


  90년대에는 성장기를 거치며 서울, 대구, 부산, 전주 등등 전국 곳곳에 모임이 생겨났지만, 제주에는 그때(2001년)까지 TCF 모임이 없었다. 당시 제주에는 TCF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좋은교사운동 소속의 어떤 기독교사 단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CCC, IVF, SFC, ESF, UBF 등의 학생 선교단체가 있고 이런 선교단체들이 연합해서 2년에 한 번 선교한국대회를 연다.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TCF, TEM, GT, GVF, 기윤실교사모임 같은 기독교사 모임이 있고 이 단체들이 연합하여 2년에 한 번씩 기독교사 대회를 연다. 그 연합운동의 이름이 바로 “좋은교사운동”이다. 제주에는 그때까지 이런 연합운동을 하는 건강한 기독교사 단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대학시절 기독교사 대회의 맛을 본 나로서는 목마름이 있었다. 전국에 많은 교사 단체가 있는데 제주에는 없다니, 꼭 만들어야지! 물론 내가 IVF 출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TCF가 눈에 들어왔고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교단에 선다는 것은 아프리카 오지에 해외선교사로 파송되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TCF의 신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TCF 공동체를 제주에 만들고 싶었다. 처음에는 ‘후배들을 위해서 공동체를 만들어야지. 교대IVF 아이들이 졸업 후에 이런 공동체가 있으면 기댈 수 있는 있는 언덕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공동체를 만들고 나서 가장 큰 유익을 맛 본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아마 제주TCF가 없었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가장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준 것이 바로 TCF 공동체였다. 후배보다 선배 누나가 많았던 이 공동체에서, 나는 나의 온갖 어려움과 실패와 좌절을 나누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 


 제주 TCF 16년 역사 가운데 약 10년 정도는 내가 대표를 맡아 했던 것 같다. 워낙 사람이 없었기에 부득이하게 장기집권을 했다. 이후에 교대IVF를 졸업한 후배 교사들이 감사하게도 TCF 공동체를 찾아주었고, 또 시간이 지나니 이런 저런 방법으로 공동체를 알고 찾아오는 분들도 계셔서 지금은 후배들이 중심이 되어 든든한 공동체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TCF 사역에 발을 담그면서부터 나의 비행(?)은 늘어만 갔다. 사실 대학시절에도 제주IVF는 지방회로 독립되기 이전이라 늘 영남동부지방회나 광주지방회와 수련회를 같이 했고 그때마다 여름, 겨울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늘 수련회비보다 비싼 항공료를 지불하는 것이 생활화되다 보니 졸업해서도 비행기를 타고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TCF 수련회에 참가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제주 TCF를 잘 이끌어야 했기에 처음에는 여름, 겨울 수련회만 쫓아다니다가 언제부터인가 봄, 가을 리더모임에도 올라가게 되고 나중에는 매월 하는 훈련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결국 작년부터는 한국기독교사회 TCF 공동대표 간사를 맡아 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한 달에도 5~6번씩 비행기를 타고 TCF 사역을 한다. 이번 달만 해도 6번의 비행 계획이 있다. TCF는 벌써 36년이나 되었고 전국에 29개 지역모임을 갖고 있는 단체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교육에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가치에 헌신한 이 단체에, 나 같은 제주도 촌놈이 대표간사로 일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가문의 영광이 한 가정의 영광으로 직결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우리 가정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아들 그리고 또 아들이 있다. 아들만 셋! 아니 나를 포함 넷이 있다. 아내와 아들 셋을 놔두고 자유로운 비행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지금까진 그렇게 했다.) 게다가 초등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이 일을 해야 하기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올해는 휴직을 했다. 육아휴직을 받아 육아와 TCF 사역에만 전념하기 위해서다. 이 사역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휴직을 하고 전국 곳곳의 지역모임을 찾아 돌아다녔다. 한국지리에 꽝인 제주촌놈이 이젠 전국 곳곳의 지명을 다 외우고 다닌다. 충북과 충남을 구분할 줄 알게 되고 세종시가 어딘지도 가보고 알게 되었다. 


  사실 TCF는 정말 많은 사역을 하고 있는 단체다. 전국 29개 지역모임 운영 - 온라인 디아스포라 TCF - 여름겨울 3박4일 수련회 - 여름 R국, 겨울 아프리카 MK 학습캠프 - 정기적인 해외교육탐방?- 기독특수교사모임?- 1박2일 봄, 가을잔치?- 격월 소식지 발행?- 팟캐스트방송 샘샘샘?- 티시핑스쿨(리더십학교)운영?- 말씀과 성장학교 운영?- 학교 기독학생회 및 신우회 지원?- 수업 전 10초 기도운동 ? 기독교사를 위한 PBS 교재 발간 등, 그외에도 수많은 사역으로 TCF는 ‘교육에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 중에 특히 요즘 내가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사역은 다름 아닌 예비교사 사역이다. 지난여름에는 일부러 IVF 학생수련회를 찾아다니면서 TCF를 알리고 홍보했다. 막상 사역을 하다 보니 많은 예비교사들이 TCF를 모르고 있었고, 심지어 교대나 사대 IVF 출신 학생들은 졸업 후 적절한 공동체를 찾지 못하여 각개전투를 벌이거나 새로운 단체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도 주변에 TCF 모임이 없는데 그렇다고 자신이 개척을 하기는 부담스럽거나 TCF 지역모임을 찾아갔다가 실망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TCF는 IVF처럼 지방회 성격이 매우 강한 단체이며, 무슨 훈련이나 커리큘럼이 빡빡한 단체가 아니다. 지역모임이 없다면 지역을 개척하면 된다. 그러면 TCF가 가서 도와줄 것이다. 기존의 TCF모임이 실망스럽다면 다른 방안을 제시하고 바꾸어 나가자고 하면 될 것이다. TCF 선생님들에게는 젊은 신규들이 모임에 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함께 바꿔 갈 수 있다.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IVF출신의 교사들은 소비주의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쇼핑하듯이 모임에 갔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으면 다른 마트로 가는 그런 신앙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드리는 제안이다. 인구절벽, 임용절벽의 시대에 나는 모든 IVF 출신 교사들이 TCFer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TCF 사역이 내가 배운 IVF 사역의 연장선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온라인 ID는 ‘IVF1997’이다. 비밀번호는 바뀌어도 아이디는 늘 똑같다. ID 즉 나의 ‘정체성’은 IVF 수련회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1997년, IVF라는 공동체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 정체성은 제주교대IVF가 개척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IVF에서 4년 동안 배운 것으로 나는 40년 동안 교사사역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속한 TCF사역은 IVF 학사운동의 일환이다. 나는 감히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교?사대를 나온 IVFer들이 모두 다 나와 같이 TCFer로 살아가길 원한다. ‘캠퍼스와 세상 속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교실 속의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가길 소망한다. 


 오늘 저녁에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TCF 모임에 IVF 학사운동 하러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