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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말랑한 떡볶이와 책이 만나는 시간_주부학사 독서모임

[소리] 2018 첫번째 소리 - 0203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1) - 삶에 가까운 공부하기(아볼로클럽 창원팀 독서모임)_박소영

▶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2) - 말랑한 떡볶이와 책이 만나는 시간(주부학사 독서모임 "말랑, 책볶이")_한선미

▷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3) - 영혼을 위한 한 끼 집밥(북클럽 "나를 위한 저녁")_이혜원

▷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4) - 함께 책을 읽는 유익(광주지역 "책읽기 모임")_박시현

▷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5) - 상상과 실험의 공간을 만들다(진주지역 학사 독서모임)_류재한








말랑한 떡볶이와 책이 만나는 시간

- 주부학사 독서모임 “말랑, 책볶이” -






한선미(한성대99)

하루에 4만 마디는 해야 하는, 전천후 시끄러움 담당. 

늘 뭔가를 궁리하며 신나는 할머니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인 사람.





 2016년 3월 30일, SNS에 책모임 광고를 냈습니다. 유명인도 아닌 사람의 광고 글에 누가 반응을 하려나 싶었는데, 그동안 책모임에 목말라 했던 사람들의 댓글이 금세 이어졌습니다. 엄격한 심사와 신중한 절차를 통해 구성원을 선발해야 했기에 책모임에 지원하는 자격조건도 있었습니다. 자격조건은 아래와 같습니다. “떡볶이를 사랑하는 분.” 책모임 조건치고는 좀 의아하죠? 그러나 이 자격조건 때문에 입단을 포기하신 분도 계시니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순식간에 5명의 멤버가 결성되고 일주일 후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후 2년 동안 매달 세 번째 주 수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책을 읽는 엄마들이 모입니다. 


 우리가 하는 책모임의 이름은 “말랑, 책볶이”입니다. 모임에 이름을 짓는 일은 빠뜨릴 수 없는 소중한 순간입니다. 새 이름과 함께 새로운 결속력, 다짐, 애정이 솟아나니까요. 이름 풀이를 해볼까요. ‘말랑’부터 시작해보자면 ‘책으로 우리의 마음과 육아에 지쳐 굳어가는 뇌를 말랑말랑하게 해보자’는 의미와 ‘우리가 사랑하는 떡볶이는 떡이 얼마나 말랑말랑하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그래서 ‘말랑’은 포기할 수 없는 단어였습니다. 책볶이는 ‘책모임 후에 함께 먹는 점심은 1초의 고민도 없이 무조건 떡볶이로 하자’고 결의하였는데, 그래도 ‘책을 읽고 난 후에 먹어야 하니, 책부터 볶아 먹자’ 뭐 이런 의미였습니다. 이렇게 책모임은 거창하고 심각하지 않게 그리고 무겁지도 않게 시작되었습니다. 구성원 다섯 명도 주최자만 알고 지낸 사이지, 각자는 서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책과 떡볶이가 있으면 그 어떤 단절도 화평케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남북회담에서도 각 대표가 공통의 책을 함께 읽고 떡볶이를 먹으면서 평화를 이야기 해보면 어떨까요? 책에는 강력한 마법 같은 힘이 있으니까요. 





 모임의 규칙은 이렇습니다. 각자가 함께 읽고 싶은 책을 2~3권씩 가져 옵니다. 그 책들을 선정한 이유도 함께 준비해야 합니다. 후보로 오른 열권 남짓한 책 중에서 함께 읽을 책을 투표로 결정하고, 결정된 책을 가장 어울리는 달에 배치합니다. 어떤 책에 어울리는 달이 있냐고요? 그럼요. 방학 전후로는 아이들과 보낼 긴 시간을 위한 전투력을 든든히 갖추고자 교육서나 육아서를 읽습니다. 그러면 한번이라도 덜 소리 지르고 한번이라도 더 참아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설이나 추석이 있는 달에는 명절 증후군으로 힘들고 지칠 것을 고려하여 쉽고 가벼운 책이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책을 읽습니다. 혹은 ‘여자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싶은 생각이 몰려오는 시기니 페미니스트 책을 같이 읽으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해 경험이 녹아 있는 뜨거운 대토론의 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75세에 그림을 시작한 모지스 할머니 책을 읽고는 천가방에 그림책 표지를 함께 그린 날도 있습니다. 75세 할머니도 시작하셨는데 서른 중반쯤의 우리가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너무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평소에 너무 읽고 싶었던 고전인데 혼자서는 매번 포기했던 책도 함께 읽습니다. 책모임에서는 어려운 책이나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을 같이 읽으면서 포기하지 않는 용기와 압박을 줍니다. 그것도 힘들면 한 챕터씩 나눠 읽는 협동심도 발휘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인문교양서나 철학책도 읽을 수 있습니다. 무거운 운동 기구로 근력을 키우듯, 이런 책도 좀 읽어줘야 독서력도 늘어나기 마련이니까요. 이런 책뿐 아니라, 프랑스 여자들은 왜 다 예쁘고 날씬한지에 대한 책도 후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정보가 더 많은 사람, 지식이 더 많은 사람의 권위 있는 책 목록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책 목록을 통해 우리 모두가 책모임의 주인이 됩니다. 내 취향에 맞는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편견과 편식 없는 독서를 하게 됩니다. 나라면 절대 펼치지 않았을 책의 책장을 넘기며 때로는 감탄하고 때때로 실망하며 서른이 훌쩍 넘은 우리는 여전히 배우고 넓어져 갑니다. 


 책을 읽고 서평도 나눕니다. 서평은 절대 무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5줄 이상 쓰기’가 서평의 원칙입니다. 이 5줄은 A4 용지 한가득이 되기도 하고 핸드폰 메모장의 5줄이기도 합니다. 단, 핸드폰 5줄은 반드시 가로쓰기를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노트에 책 속의 인상적인 구절을 손글씨로 빼곡하게 적어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냥 읽습니다. 좋았던 부분, 공감되었던 부분,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들을 나눕니다. 누구도 우리의 밑줄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 귀와 마음을 열고 잘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줍니다. 책과 다른 현실, 달라지지 않는 현실 앞에선 목소리를 높여 함께 분통을 터뜨리고 더 나은 우리가 되자고 다짐합니다. 





 “말랑, 책볶이”의 멤버들에게는 역할 이름표가 여러 개씩 있습니다. 연주자, 사진작가, 마을 도서관 관장, 공동육아 선생님 등등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엄마’라는 이름표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실 엄마들이 자주 만나는 책은 그림책입니다. 우리는 정해진 책 한권과 그 달에 아이들과 읽었던 그림책 중 소개하고 싶은 책을 읽어주고 듣습니다. 세상은 넓고 그림책은 정말 많습니다. 그림책 바다의 대항해를 떠난 우리는 서로를 통해 매월 신대륙을 발견합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책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책모임을 통해 서점, 도서관, 어디에 꽂혀 있는지도 모르는 보물 같은 책들을 만납니다. 엄마 전문가가 엄선한 책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그렇게 매달 5명이 한권씩 추천하여 60권을 훌쩍 넘겼습니다. 그림책은 아이들만의 책이 아닙니다. 그림책을 나의 책으로 만나게 되면, 그 안에는 무릎을 탁! 치고 마음을 쿵! 두드리며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 책모임 이름처럼 우리의 마음이 말랑말랑해집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우리가 책이라는 통로로 연대하고 우정을 쌓아갑니다. 가끔은 강연회도 함께 가서 듣습니다. 좋은 저자의 강연회가 있을 땐 아이돌을 만난 팬 마냥 수줍은 얼굴로 책을 들고 사인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섭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돗자리를 들고 공원으로 나가기도 하고, 동네 유명한 떡볶이 집까지 찾아내 책도 읽고 떡볶이 탐방도 떠납니다. 


 책과 책모임이 우리에게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한 시간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이런 시간을 누리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매달 모일 때마다 적게나마 회비를 걷어 왔는데 그 돈으로 책을 접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책을 보내자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중 소년원에서 문학치유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의 글을 봤습니다. 아이들이 책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일면식도 없는 선생님께 왕언니들이 책을 사주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원래는 연말에 거하게 떡볶이 파티를 하려고 모아둔 회비를 싹싹 긁어 보냈습니다. “꽃다운 너희들아, 책과 함께 활짝 피어라”라고 전했습니다. 그 돈으로 선생님이 어떤 책을 얼마큼 사셨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시 선생님이 자기가 볼 책도 슬쩍 끼워 넣으셨을까? 그런 의심이 고개 들 틈은 없습니다. 책으로 받은 위로와 격려가 어여쁜 그들에게도 전해지길, 그들도 우리처럼 책이라는 좋은 친구와 더불어 지낼 수 있게 된다면, 그 맛을 알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책모임을 하고 나면 누가 읽든 말든 꼭 후기를 SNS에 공유합니다. 부끄럽지만 셀카도 찍습니다. 함께 읽었던 책을 올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책 읽어주는 모습을 올립니다. 언제부터인가 후기에 이런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진행하면 되나요?”, “말랑, 책볶이에서 올린 책 같이 읽고 있어요.”, “우리 모임에서도 이 책 읽어 보려고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책모임이지만, 그 안에 찍힌 행복한 우리 얼굴을 보고 누군가는 용기 내어 책모임을 시작합니다. 함께하기 힘든 사람들은 이렇게나마 책으로 연결되어 가끔 후기도 나눠줍니다. 작은 씨앗들이 여기저기에 뿌려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디딤돌이 되고 마중물이 됩니다.





 한참 육아에 집중하는 시간들을 보낼 때 엄마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하는 말이라곤 “그래쪄여, 아이구 잘했네, 하지 마, 그만해”가 전부인 그런 날도 있습니다. 영향력을 미치는 삶, 하나님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럴 듯해 보이는 삶’의 단어들은 내 삶과 멀리 떨어져 상관없어진 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작고 다정한 책모임을 통해 우리는 때때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됩니다. 외롭고 힘들게 육아라는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줍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고 우뚝 선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한 질문과 대화가 아닌, 함께 손을 잡고 보폭을 맞추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같이 고민합니다. 흔히 말하는 수다 떠는 시간 같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보석을 캐내고 있습니다. 함께, 말이죠. 

 

 “말랑, 책볶이”는 이렇게 세 번째 해를 맞이합니다. 중간에 새로운 친구가 왔다 떠나기도 하고, 새로운 일 때문에 잠시 쉬어가기도 합니다. 올해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다시 모집하려고 합니다. 세 번째 해를 맞이하는 친구들과는 좀 더 깊이 있는 책을 읽고 싶기도 하고 우리만의 기록을 잘 남겨두어 작은 소책자도 만들고 싶습니다. 이태 동안 읽어왔던 책 목록을 정리해서 공유도 해보려고 합니다. 삶이 분주하게 돌아가기에 가끔은 시간 내서 책을 읽고 준비하고 참석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쉬이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도 열심히 말랑말랑한 책과 떡볶이를 볶아보려고 합니다. 사실 삶이라는 것,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지지고 볶는 일이니까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는 엄마들이 이렇게 함께 모여 책을 읽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림책 읽으며 함께 울고 웃고, 책 목록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모습 말입니다. 성취감도 느끼고 서로가 대견해지는 삶을 지내다 보면 우리도 좀 더 자라나 있지 않을까요? 




[말랑, 책볶이 비법 전수] 

- 사람을 모은다. 최소 3명~ 최대 6명까지가 적정선.  

- 날짜는 매달 고정으로 정해둔다. 아이들의 유치원, 학교생활도 고려한다. 

- 시작 시간과 끝나는 시간을 정확하게 지킨다. 

- 함께 읽을 책 목록은 모두가 참여해서 정한다. 그래야 주인의식이 생긴다. 

- 서평은 꼭 준비하되 양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 어른용 책 한권과 그림책을 함께 읽는다. 그림책은 자유롭게. 

- 책모임 하면서 주변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좋은 강연이 있는지 찾아보고 참석해본다. 

- 회비를 걷어서 책이 필요한 다른 그룹의 누군가를 돕는다. 

- 후기를 꼭 기록한다. 

- 그리고 서로 마음껏 용납하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