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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공동체성을 회복한 작은 교회

공동체성을 회복한 작은 교회


  지난해 한국교회 내부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잇따라 터져 나왔습니다. 기독교 외부에서 지탄의 대상이 된 것에 이어 속에서 곪았던 오랜 상처들이 드러난 것이겠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교회를 떠났다는 이야기가 공동체 내에서 더 이상 낯선 소식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필립 얀시의 책 제목과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자 고민입니다. 과연 학사들은 어떤 고민을 안고 교회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다양한 필자에게 현재의 고민을 나눠주십사 부탁했는데, 필진 전원이 익명으로 글을 싣기를 원했습니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벽의 높이와 고민이 지속되는 골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이번호에서는 우리의 현실을 마주하고자 합니다. 다음호에서는 교회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며 해결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소리]의 시도를 통해 교회에 대한 고민의 실마리를 얻으시면 좋겠습니다.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1) 교회의 진정한 유산(遺産)을 고민하며

(2) 오늘도 나는 교회에 갔다 

(3) ‘‘그 교회’는 가지 않지만 ‘이 교회’는 간다 

(4) 공동체성을 회복한 작은 교회




우리 교회는 3가정 11명이 모이는 교회다. 집에서 모인다. 부모들과 아이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설교는 부모들이 돌아가면서 한다. 목사님은 두 달에 한 번 다른 작은 교회들과 함께 모일 때 오신다. 우리 교회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왜 이와 같은 형태의 교회 생활을 하는가?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공동체에 대한 공부의 결론


우리 교회는 2008년 1월 1일, 송구영신 예배를 기하여 시작되었다. 형제들이 기독교 NGO에서 만나서 작은 공부모임을 하고 있었다. 2007년의 주제는 ‘공동체’였다. 공동체에 대해서 공부하던 중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회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우리는 공동체적 교회를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그것은 평신도* 중심의 작은 교회가 지향점이었다.




우리도 처음에 목사님이 안 계시는 교회를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신학교를 나온 전임 목회자가 있어야 교회가 성립한다고 볼 근거는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사회적으로 신뢰받는 목사님과 여러 선배들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받았다. 그리고 비슷한 형태의 다른 교회를 직접 탐방을 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하구나 하는 믿음을 얻었다.


하지만 결단은 쉽지 않았다. 한 형제는 30년 동안 다니던 교회를 나와야 했다. 모든 기득권을 버려야 했고, 오해도 무릅써야 했다. 어떤 형제는 목사님 집안이었는데 이를 가족들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단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았다. 하지만 한 발을 떼었다.




설교와 헌금


막상 교회를 시작하니 고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설교를 누가 할 것인가가 당장 문제였다. 이러한 고민들을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우선 설교는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다.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특별히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해도 한 사람의 설교보다는 모두가 참여하는 설교가 더 큰 유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목사님처럼 설교를 잘 하지는 못해도 정성껏 준비하는 과정에서 은혜가 임하고 진정성 있게 전달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도 설교 준비는 여전히 어렵지만 어렵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다음 고민은 헌금이었다. 기존의 십일조를 그대로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다른 방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십일조를 모으게 되면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통일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자칫하면 한 사람의 뜻이 과잉 대표될 우려도 있었다. 결론은 각자가 자신이 후원할 곳을 정하고 집행한 다음 그 내역을 교회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자의 뜻이 각자의 분량만큼 반영되도록 하되 투명하게 공개됨으로써 책임성을 높이도록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가정의 경제생활도 공개하기로 하였다. 재물의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전체를 하나님 앞에 책임 있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공동체라면 재물을 공유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도 했지만 그것은 쉽지 않고 위험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 위에서 각자가 사용권한을 가지되, 공동체 안에서 공개함으로써 책임성을 높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인 지수로 표현하는 ‘나눔 지수’를 개발하여 적용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총수입에서 필요경비를 뺀 나머지 중에서 외부로 후원한 금액을 비율로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좀 더 분명한 지수로 표현함으로써 재물의 욕심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함이다. 한편 교회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헌금에 포함하지 않고 별도로 관리하였다. 우리가 쓰는 것을 헌금 개념에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교회와 가정


우리 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가정과 교회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부모가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이 일단 중요하다. 이렇게 되면 설교를 할 때 가식적으로 하기 어렵다. 자녀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를 하고 나면 가정에서 그 말씀이 의식이 된다.


예배 후의 오후 시간은 서로 간에 깊은 나눔을 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부부 갈등에 대한 나눔이 많았다. 몇 명 되지 않는 인원이었지만 오후 6시까지 나누어도 늘 시간이 빠듯할 정도로 할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느끼는 것은, 결국 가정에서 인격의 밑바닥이 다 드러난다는 것과 진정한 영성은 가정에서 증명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나눔을 통해서 우리를 포장하고 있는 껍데기들을 벗고, 그 안에서 치유를 경험하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가정이 세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나아가 가정을 돕는 것을 우리 교회의 사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 같이 온누리교회에서 진행하는 ‘하나님의 가정 훈련 학교’에 등록해서 훈련을 받았고, 차후 이를 응용하여 다른 가정을 초청하여 섬기는 캠프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마침 교회 식구 중에 교사가 있어 학생과 부모를 초청하여, 맛있는 것도 먹고, 강의도 듣고, 대화도 하고, 이벤트를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캠프를 열었는데 부모님들이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도 이 사역을 확대 지속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은 교회의 작은 이점들


우리 교회 예배 시간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주일 헌금과 더불어 각자 감사제목을 기록한 노트를 제출한다. 한 주일 동안의 감사하는 마음을 제물로 드린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을 다 낭독한다. 작은 교회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것을 통해서 감사의 훈련도 하게 되고 서로의 삶을 알 수도 있다. 그리고 매주 특송도 한다. 특송을 준비하는 과정이 또 하나의 가족 문화가 된다.


작은 교회의 장점은 또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함께 어디든 갈 수 있다. 주로 집에서 모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당장 야외예배도 가능하고 다른 교회를 탐방하기도 한다. 의사결정도 쉽다. 아니, 쉽다기보다는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구조가 된다. 의사결정은 만장일치로 하되 필요하면 다수결로 하기로 했지만 실제 다수결로 결정한 것은 식사 메뉴를 정할 때 빼고는 없었던 것 같다. 각자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 모두 함께 공부하는 구조도 쉽게 만들어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사가 웬만하면 다 받아들여진다.




작은 교회의 약점들


지금까지 장점 위주로 이야기했는데 약점도 있다. 무엇보다 이단 시비다. 그래서 드러내놓고 밝히기가 조심스럽다. 다수의 고정관념을 바꾸기는 어렵다. 또 실제로 목사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한계에 갇히거나 잘못에 빠질 우려도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최근에 다른 교회와 연합하여 두 달에 한 번 연합 모임을 가지면서 지도와 자문을 받고 있다.


또 하나의 약점은 자녀가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작은 교회에서는 채우기 어려운 부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가 성장하면 큰 교회로 보내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큰 교회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불안정성도 문제다. 소수이다 보니 한 가정이라도 변동이 생기면 어려움이 있다. 세 가정이 있다가 한 가정이 직장 관계로 부득이하게 헤어져야 했는데 이때가 위기였다. 고민 끝에 두 가정이라도 계속 가자고 해서 지속되긴 했지만 좀 불안정하긴 하다. 보다 근본적 불안정성은 관계의 어려움에서 발생할 수 있다. 소수이다 보니 관계의 문제가 훨씬 크게 다가올 수 있다.


또 새로운 사람이 쉽게 입문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도 문제인 것 같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새 식구를 맞아들일 준비를 한다면 극복 가능하리라 본다.




큰 교회 하나보다 100개의 작은 교회가 낫다


지난 6년 동안 우리는 작은 교회의 큰 유익을 경험하였다. 큰 교회에서 누리지 못한 교회 공동체의 비밀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큰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역할에 따른 분화가 필요하다. 큰 교회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작은 교회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내가 볼 때 큰 교회는 교회를 안 다니던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나 큰 행사를 개최한다든지 하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런데 큰 교회의 결정적 문제는 교인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경향에 있다. 큰 교회에서 성숙한 성도는 핵심 인원만 남고 대다수는 작은 교회로 분화하여 나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1000명의 교인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교회보다 10명의 교인으로 이루어진 교회 100개가 낫다고 본다.


목사님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탁월한 설교자는 중요하다. 그리고 교회의 다양한 사역이 활성화되기 위해 전임 사역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평신도들이 각자가 목사님과 같은 책임감을 가지고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좋은 설교를 듣는 것도 좋지만 각자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큰 은혜가 임할 것이다. 목사님의 상담과 심방을 받는 것도 좋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상담자가 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십일조를 교회에 위임하는 것도 좋지만 각자가 어디에 헌금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건강한 자율성과 책임성을 키워줄 것이다. 자녀들을 주일학교 교사에게 맡기는 것보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가정과 교회가 함께 사는 길이 될 것이다.


나는 간혹 동네의 큰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릴 때가 있다. 그럴 때 한 번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 조용히 앉아서 설교를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저 분들이 각자가 설교를 준비하여 나눈다면 얼마나 역동성이 살아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가슴이 벅찼던 적이 있다. 당장 장로님들부터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집을 열어서 네다섯 가정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서로의 삶을 나누고 기도하는 모임이 된다면 얼마나 생명력이 있을까? 그게 구역모임이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완전히 다르다. 그 자체로 독립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 번씩 고향 교회로 모여도 좋겠다. 서로의 교회 이야기를 나누며 축복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할 것인가?


나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추락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교회의 회복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해답 중의 하나가 평신도 중심의 작은 교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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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도라는 말이 이미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잘못된 개념에 기초하고 있어 없어져야 할 용어이지만 일반적인 이해를 위해 사용하기로 한다.
















소리 no.212=2014. 02+03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