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연결되었습니다] 미디어, 새로운 감각의 다리가 되어주려면?

Posted by GCF IVF GCF
2018. 11. 29. 15:10 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소리] 2018 다섯 번째 소리 - 1011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인터넷에 연결되었습니다]



▷ 인터넷에 연결되었습니다(1) - '유튜브' 세상으로 초대합니다!_오한웅

▶ 인터넷에 연결되었습니다(2) - 미디어, 새로운 감각의 다리가 되어주려면?_유지은

▷ 인터넷에 연결되었습니다(3) - 콘텐츠가 난무하는 시대에,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기_허'대리'

▷ 인터넷에 연결되었습니다(4) - 정보의 사사시대_김동문 

▷ 인터넷에 연결되었습니다(5) - 디지털 시민의식이 답이다_김형태









미디어, 새로운 감각의 다리가 되어주려면?





◆ 유지은(숙명여대93)

학부 전공은 물리학, 특기는 피아노. 지상파와 종편방송 교양프로그램을 수백 편 연출했지만 대표작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가 더 유명하다. 영상문화연구소 ‘필름포스’ 연구원, 독립저널 『영상이몽』의 발행인이자 영화제작 강사. 영화치료, 사진치료로 나와 타인의 내면과 조우하기를 원한다.  




2018년 영상강사의 어느 날


3년 전 2015년은 1995년에 개봉한 “백 투더 퓨쳐2”가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한 30년 후의 실제 미래였다. 영화를 재개봉하기도 했고, 30년 전에 예견했던 미래상이 상당 부분 가능한 기술로 실현되었다며 날아다니는 자동차, 저절로 조여지는 운동화끈, 피부재생 기술과 홀로그램 영화관 등의 장면을 실제 기술과 비교하기도 했다. 고도의 과학기술 발달이 가져다준 낙관적인 미래상에 동의하듯, 우리는 실제로 그런 미래를 맞이한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대부분의 기술력은 시도만 되었을 뿐 일상생활에서 상용화하기에는 요원하다. 2018년의 나는 한손으로는 운전대를 잡고 한손으로는 자꾸만 방전되는 중고스마트폰의 충전단자를 만지작거리며, 자칫 네비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될까 봐 쫄깃한 심장을 안고 출근길에 오른다. 


오늘은 한 중학교 방송반의 영상제작 수업에 가는 날이다. 스마트폰이 방전될 것에 대비해 태블릿을 꺼내 앱을 열어보지만 아차, 와이파이를 연결해야 한다.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는 인터넷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 와이파이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한 영상제작 수업을 해야 하다니! 온라인상으로 수시로 자료를 주고받고 검색을 해야 하는데, 중고생들은 데이터가 모자라 쩔쩔맨다. 이런 때를 대비해 휴대용 포켓 와이파이를 급하게 차량충전기에 연결하여 전원을 켜보지만, 젠장, 왜 모든 전자기기의 충전단자는 이토록 빨리 접촉 불량이 되는가. 


양 어깨 가득 장비와 소모품, 각종 케이블과 노트북, 배터리팩 등을 들쳐 매고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올라갔다. (학교 엘리베이터는 장애인과 급식용으로만 사용하라는 엄중한 경고문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헉헉대며 겨우 겨우 방송반의 문을 열었다. 그나마 방송반의 좋은 점은 기기 관리를 위해 에어컨이 빵빵하게 가동된다는 점. 땀을 식히며 방송반의 장비를 둘러본다. 전국의 학교를 다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지역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방송시설과 미디어시설은 낙후되어 있다. HD도 아니고 4k, 8k급까지의 영상기술 기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이런 시대에, 유물같은 SD급 기반의 방송시설을 가지고 있는 학교가 부지기수다. 제대로 된 방송용 카메라 한 대라도 갖고 있는 학교가 드물다. 지금은 가정용으로도 잘 쓰지 않는 핸디캠 스타일의 캠코더마저 고장 난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지역 미디어센터에 장비 대여를 요청했다. 하지만 지역의 공공영상 미디어센터마저 장비가 노후되어 반출이 불가한 제품이 상당수다. 하지만 기술력 갑인 친구는 어디나 한 명쯤 있는 법. 결국 그런 친구들의 개인 장비와 강사의 인력을 동원한 장비수급으로 단합력이 높아지면서, 제작수업은 초인의 기지를 발휘해 해피엔딩의 상영으로 마무으리! 이것이 영상제작의 몰입의 힘이다. 


기적적으로 3일간의 수업을 마쳤다. 이번에도 무에서 유를 만든 느낌적인 느낌으로 몸과 마음이 허한 나는, 가족이 잠든 야밤에 못다 본 VOD를 다운받아 고칼로리 야식을 친구삼아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불빛의 은총에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멀티 리터러시 시대, 너의 능력을 보여줘!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고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문자화된 기록물을 읽고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리터러시’라고 했다. 그런데 리터러시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구두 언어나 비언어적인 것으로 소통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를 누리고 해석하는 능력을 포괄하게 되자, 리터러시라는 개념은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능력’이라는 개념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1) 이제 리터러시는 영상매체에 기반을 둔 ‘미디어 리터러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강조되는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으로 ‘디지털 리터러시’, 소셜 미디어의 등장으로 ‘소셜 미디어 리터러시’, 나아가 융합되고 결합되는 매체와 사회적 담론을 통한 복합적 소통능력이라는 뜻을 가진 ‘멀티 리터러시’로 진화하게 되었다.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이라. 우리가 언제 한번 적응하려 애써본 적이 있었던가. 글쎄다. 미디어의 변화는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할 만큼 올드미디어에서 뉴미디어로 충격적인 지각변동을 이루었지만, 실제로 대중이 체감하는 변화는 태풍처럼 비장하게 먹구름을 몰고 오지 않고, 그저 가랑비처럼 옷 젖는 줄 모르게 왔던 것 같다. 


90년대 초중반을 캠퍼스에서 보낸 나에게 최애 아이템은 ‘삐삐’였다. 나는 그 신문물을 손에 넣고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알바를 그리 부지런히 했던가. 삐삐는 곧 PCS를 거쳐, 폴더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던 시절을 지나 부지불식간에 사라졌다. 2000년대의 어느 날, 돌아다니면서도 검색을 할 수 있는 인터넷이 가능한 고가의 슬라이드폰을 손에 넣게 되었을 때의 그 고양감이란!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차안에서 메일 한번 보내려다가는 답답함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몇 년 후엔 영화도 3분 만에 전송한다는 LTE 기가급 이동통신 기술을 장착한 스마트폰의 시대가 올 줄이야. 서랍에서 나뒹굴던 그 많은 중고 핸드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빨라지는 기술의 속도만큼 우리의 신상 폰들은 2, 3년 아니 6개월 단위로 중고시장으로 직행한다. 이런 교체 속도에 이젠 크게 멀미를 느끼지도 않고, 굳이 얼리어답터가 아니더라도 서핑하듯 적당히 즐기며 주기를 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엄청난 ‘미디어 리터러시’를 보유하고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를 다른 용어로 설명하면 ‘미디어 능력(media competence)’이다. 변화하는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이 초기 리터러시의 필요성이었지만 점차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확대되었으니, 우리는 굳이 누가 교육하고 교육받지 않아도 어느새 적극적인 이용객으로 진화해왔다. 





TV, 영원한 벗과의 밀당


과거 미디어 리터러시는 문자언어가 중심인 시대에 영상언어가 새롭게 등장하여 해독이 필요해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초기 미디어 리터러시는 영상 미디어, 즉 텔레비전에 집중되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일컬었는데, TV를 넋 놓고 보고 있다가는 판단력을 잃게 되어 바보가 되고 말 것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텔레비전 리터러시의 시초가 된 단어인 셈이다. 그러나 어느새 사람들은 언론의 프레임 짓기와 상업적 지표에 의해 생산되는 방송의 코드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만큼 해석과 변주, 이용과 재생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언론과 미디어의 재생산 컨텐츠의 상호작용에 대한 해석이 활발하여 몇 년 전부터 공중파와 종편에 기존의 뉴스를 재비평하는 정치시사토크쇼, 뉴스의 이면을 취재하는 탐사보도 프로그램 등이 시청률을 확보했다. 또 두세 사람이 어떤 이슈에 대한 개인적 견해와 사적인 담화를 섞어 패러디와 풍자, 이슈의 사적화를 이루는 팟캐스트의 전성기를 지나, 이제는 사적인 공간과 잉여의 영역으로 몰입하는 1인 미디어의 거대한 흐름 속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두 가지 경향을 짚어보자면, ‘구술화와 미시화’이다. 재미있는 것은 문자문화의 종언 이후에 디지털 구술문화가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진중권 교수는 “나꼼수로 시작한 팟캐스트 문화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복귀시킨 새로운 구술문화”라고 했다.2) 이 새로운 구술문화에서는 객관적 기술보다는 주관적 상상이, 이성적 비판보다는 정서적 공감이 더 잘 어울리며, 문자문화가 무너뜨린 공동체 의식을 전자매체가 복원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의 시사토크쇼의 경향을 보면, 이미지보다 말이 주가 되는 구술형식으로 복귀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팟캐스트의 청취자는 함께 이야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연대의식, 같은 시간에 각기 다른 장소에서 목소리로 하나 되는 라디오 시대의 향수 같은 것을 작동시킨다. 공적이고 이성적인 카메라와 마이크가 사적이고 정서적인 관계 속으로 파고 들어간 것이다.


과거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카메라 라인을 중심으로 출연자와 시청자가 철저히 분리되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TV 프레임 안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감독과 스텝의 존재는 제작자와 수용자의 경계를 허물고, ‘방송을 위한 방송’을 스스로 비판하며 프레임의 파괴를 시도했다(무한도전, 1박2일). 그리고 실제 삶과 일상을 그대로 노출시키는(것처럼 보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전성기를 가져왔다. 무엇이 리얼리티인가의 물음은 구조화된 관찰예능(군대, 학교, 정글, 육아 등의 닫힌 환경에 출연자를 던져 놓고 관찰하는 방식)과 극한의 압박감을 불러일으키는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오디션 프로그램, 매칭 프로그램, 최근의 방탈출 프로그램 등)을 거쳐 다시금 출연자를 원초적으로 카메라와 마이크 앞으로 불러 앉히는 방식으로 회기했다(마리텔, 1인 미디어). 시청자는 방청객과 같은 존재로 카메라 밖에 존재했다가, 제작자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권력을 가진 ‘빅브라더’3)로 카메라 위에 존재했다가, 이제 카메라 그 자체가 되어 동등한 소통을 나누고 감각을 공유하는 미시화가 진행된 것이다. 씹는 소리, 손으로 물체를 주물럭거리는 소리 등에 기승전결도 없이 몰입하며 쾌감을 느끼는 ASMR4) 방송을 하루 종일 틀어놓는 자녀를 보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또한 VCR을 틀어놓고 한 공간에서 모니터를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예능프로그램(미우새, 전참시, 나혼자산다 등) 역시 TV앞에 함께 오순도순 모여 앉아 시답잖은 참견과 담소를 나누는 가족, 친구의 관계를 대체하는 구술 공동체의 재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교실로


이러한 미디어와 이용자 속성의 변화 속에서 그들만의 길을 가는 그룹이 있는데, 바로 10대들이다. 그들은 일찍이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미디어 태교를 받았으며, 아기침대에 매달린 모빌보다 영상의 자극에 더 빨리 시야가 조정되고,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보다 모니터와 손가락터치가 능숙한 표현력이 장착되어 있다. 윈도우와 안드로이드 운영체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새로운 어플리케이션도 의성어 따라하듯 금세 익혀버린다. 이들을 대상으로 교실에서 미디어교육을 한다면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날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미디어키즈들이 4차 산업혁명을 논하는 학교현장에서 가장 앞서가는 교육을 받을 것 같지만, 모순적이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스케치북 대신 태블릿을 놓고 스마트펜으로 그림을 그릴 것 같은 세대이지만, 언감생심, 아직은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보여주는 영상자료 콘텐츠가 개발되고 있는 수준이지 아이들이 미디어로 상호작용하는 교실환경은 요원하다. 


제작수업에서는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을 할 것 같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뜻밖에도 영상교육의 속성이 협업과 공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조율하는 팀 작업이 이들에게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데 익숙한 아이들에게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하는 창의적인 작업은 생각보다 즐겁지 않다. 감독처럼 또래 속에서 튀는 역할은 아무도 하고 싶지 않고, 중고딩은 남녀를 불문하고 자기 얼굴이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저주에 가깝다고 느낀다. 영상 수업에서 얼굴을 찍을 수 없는 슬픈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이 전례 없는 미디어키즈 아이들의 잠자는 뇌를 깨우고 카메라라는 그들의 필기도구로 마음껏 그림을 그리게 하기까지, 뜻밖의 ‘미디어 낯가림’을 깨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세대가 갖고 있는 끈끈한 연대와 공동체적 몰입의 추억이 아이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 지극히 사적으로 소유하고 매우 친밀한 또래끼리만 소통하기 바라는 이들의 미디어 이용 특성은 어른들의 세계와는 또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최근의 기술사회의 쟁점은 기술의 발달 자체보다도 기술 사회에서 인간이 갖춰야 할 역량과 철학에 집중되고 있다고 한다.5) 어쩌면 빽투더퓨쳐의 새로운 예고편이 될 미래사회는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어떠한 기술적 진보보다도 그것을 활용하고 누리는 개개인의 인간의 역량과 삶의 질,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의 질이 얼마나 진보했느냐가 궁금한 지점일 것이다. 


마샬 맥루한의 정의처럼, ‘인간 감각의 연장이 되는 미디어’가 눈과 귀를 확장시켜 주는 것을 넘어 자칫 과잉 감각으로 인한 피로감, 또 다른 팔과 다리를 돌봐야 하는 불편함으로 돌아온다면 우리의 미래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 인간관계의 감각과 감수성의 결을 살피는 새로운 감각의 다리가 되어준다면, 우리가 미처 찾지 못한 미래세대의 답이 미디어의 진보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1) 김양은, 『소셜미디어 리터러시』, 커뮤니케이션북스

2) 진중권, 『이미지 인문학』

3)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소설 『1984년』에서 비롯된 용어로, 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관리 권력, 혹은 그러한 사회체계를 일컫는 말. (네이버 지식백과 빅브라더 [big brother], 두산백과)

4) 자율 감각 쾌락 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약자로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후각적, 혹은 인지적 자극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심리적 안정감이나 쾌감 따위의 감각적 경험을 일컫는 말.

5)  김양은, 『소셜미디어 리터러시』 커뮤니케이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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