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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 사춘기 자녀와 나의 성장기(記)

[소리] 2018 세번째 소리 - 0607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


▷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1) - 사춘기 시절을 돌아보며_익명

▷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2) - 사춘기 아이들 곁에서 보낸 7년_한민지

▷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3) -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_서정명

▶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4) - 사춘기 자녀와 나의 성장기(記)_김미혜

▷ 사춘기, 하나님의 선물(5) - '동료인간', 당신을 새롭게 알고 싶어요!_한영주








사춘기 자녀와 나의 성장기(記)








김미혜(동아대 83)

현재 테라노바 교육컨설팅 대표를 맡고 있다. 




 나의 40대는 세 아이의 사춘기와 맞물렸다.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터널의 끝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를 되돌아보면 거기에 남편이 있다. 신학연수 후 논문을 끝내지 못했던 남편은, 나의 의견과는 달리 IVF와 교회사역을 병행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사역했던 교회의 요구가 있어서 결국 교회 근처에 빚을 내어 집을 샀다. 그러나 2년 후쯤 갑자기 교회사역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이제 와서 그만둔다고 하자 ‘도대체 왜? 또!’라는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 뜻인지 남편 뜻인지 헷갈리고 불만도 생겼다. 그러다 몇 달 후 남편은 새로운 교회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의 설득 끝에 나는 또 남편의 의견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신앙과 교회 선택 문제는 큰 갈등을 가져왔다. 아이들이 출석하는 교회를 그만 다니게 할 수 없었는데, 남편은 새로운 교회에서 가족이 함께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선 남편의 새로운 교회에 대한 비전에는 동의가 되었지만, 이런 삶은 아이들에게 혼란과 반항을 일으켰다. 나도 청년들과 매주 집에서 밥해 먹고 놀던(?) 즐거움이 없어지고, 새로운 교회에서 예배도 기쁨이 되지 못하면서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증폭되었다. 매주 교회에 가기 전부터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자니 주일날이 ‘죽일(?)날’이 되었다. 결국 이건 아니다 싶어 아이들과 의논하여 막내만 빼고 이전 교회에 다니게 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전 교회 학생회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둘째 아이는 점점 교회생활과 멀어졌고 신앙과 관련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남편도 지금은 이 부분에서 잘못한 것 같다고 얘기하지만, 자녀들 신앙생활의 근간이 되는 교회 공동체 문제는 여전히 큰 숙제로 남아 있다. 지금도 남편이 10년간 사역한 교회를 그만둔 결정이 정말 잘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그 시기에 아이들은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했고, 나의 오춘기(?)까지 겹쳐버렸다. 아들은 외국생활 이후 한국의 학교생활에서 많은 아픔을 겪으면서 중학교 이후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밤마다 아들과 서로 안아주곤 했었는데 그마저도 줄어들었고, 나도 아이의 학습이나 성격, 일상 습관 등에 잔소리하며 참지 못하고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아들의 아픔을 알기에 많이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지만, 변해가는 아이들에 대해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사춘기도 없다시피 자라왔던 나는 변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말 순했던 아이가 어느 순간 돌변하는 모습에 당황했고 화도 많이 났다. 반항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라온 나는 아이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고,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아이들의 반항만 받고 있다는 생각에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다 보니 우울한 감정은 더욱 심화되었다. 아이들을 품고 받아들일 마음의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남편의 결정과 아이들로 인해 내 삶이 엉망진창이 된 것만 같았다. ‘왜 나는 남들처럼 쉽게 살지 못하는 걸까?’, ‘내가 그렇게 문제가 많나?’ 비교하면서 자괴감마저 들었다. 자녀들의 성장통과 함께 신앙도 바닥을 쳤다. 


 둘째 딸의 사춘기는 완전 다른 형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이마다 특성이 다르다는 것이 복병이었다. 딸은 아들보다 더 복잡한 감정 선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더구나 딸은 학교와 사회에서 경험하는 가치관 문제로 인해 상처를 자주 받았고, 또한 여동생과 외모를 비교 당하는 말들로 인해 마음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어른들의 가치관과 말에 거부감을 가지고 고집과 반항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부모가 신앙을 강제한다고 생각하니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다. 


 목회자 가정이라는 상황이 나를 더 짓눌렀다. 자녀의 문제는 오롯이 부모 문제라는 인식으로 나는 더 끙끙 앓았다. 어느 순간 이런 생활이 계속 반복되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학부모 교육과 무료 상담 강좌 등을 들으면서 나 자신을 이해하는 중요한 시간을 얻었다. 아이들과 관계에서 나의 쓴 뿌리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양육스타일과 미성숙한 반응이 관계를 더 어렵게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문지하모임(부산지역 IVF 출신인 세 명의 목사 부부 모임)’에서 제안된 “7Habit 리더십 교육”을 받고 나는 20년 전업주부 생활을 청산하고 강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녀들에 대한 나의 미숙한 대응과 시행착오의 아픔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돌아보니 청소년과 학부모 교육에 좋은 경험자료(?)로 쓰이고 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이런 것인가! 


 일전에 아들과 사춘기 시절을 얘기해 보니 자기도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청소년의 뇌는 인간이 아니므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그 시절은 ‘공사 중’이었다. 뇌 과학적으로 보자면 사춘기 시절은 전전두엽의 미성숙과 동시에 편도체를 비롯한 변연계가 발달하여 이성적 사고보다 감정이 앞서고 행동이 먼저 나가게 된다.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부정적인 감정 반응이 증가하게 된다. 럭비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듯 자신도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 한번 잘못 트인 물꼬는 그 방향으로 물을 쏠리게 만들듯이 뇌에서부터 생긴 메커니즘으로 인해 어떤 상황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이상하게 반응해 버리는 것이다. 부모 또한 아이의 반항에 긴장모드로 바뀌면서 방아쇠가 당겨지고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난다. 


 엄한 부모 아래 자라온 나는 자유로운 성격의 아이를 잘 몰랐다. 내 방식과 틀로 아이를 보니 사소한 것부터 갈등이 생겼다. 아이들이 십대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부모는 서서히 틀을 넓혀줘야 한다. 그런데 어릴 때와 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양육하면, 통제하려는 부모와 무엇이든 자기 맘대로 해보려는 아이 사이에 다툼이 생긴다. 또한 학습과 일상습관을 아이에게 넘기면서 스스로 하길 바라지만 부모 기대만큼 잘 해내지 못해 갈등이 커진다. 이 시기에 아이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알아서 할게요!(문 쾅!)”이다. 간섭하지 말라며, 자기가 할 거라고 하면서 말만 앞세우고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부모는 참지 못하고 잔소리를 한다. 


 누군가 관심과 간섭의 차이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간섭’은 요청하지 않았는데 다가오거나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다가오는 것이며, ‘관심’은 연민, 호감, 호기심이라는 감정의 토대 위에서 대상에 대한 판단 이전의 이끌림이라고. 부모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간다고 하면서 간섭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나 또한 간섭이 많았던 것 같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청소년기는 신체도 두뇌도 급변하는 시기라 아이들도 불안하고 힘든 시기를 보낸다. 그래서인지 부모 눈에는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하거나 엉뚱한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희희낙락 하다가도 집에만 오면 괜히 인상부터 쓴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의 이런 모습에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되고, 못마땅한 눈초리와 무표정으로 자녀를 대한다. 청소년 자녀가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봤을 일이다. 





 요즘은 우리 때보다 사춘기가 빨라졌다. 아이들은 우리와 다르게 물질적인 풍요 속에 소비지향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대학입시에 결부된 학업과 성적 스트레스,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불안 속에서 자라고 있다. 또한 디지털 세대로 영상매체의 홍수 속에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 속에 있고, ‘Me세대’로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한다. 우주의 중심에 자기가 있고, 기성세대와는 다른 소통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 부모와 자녀가 안 부딪히는 게 이상한 거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있듯이 인생에도 ‘지랄보존의 법칙’이 있다는데 청소년기에 소위 지랄을 하지 않으면 나이 들어서 한다고 한다. 부모는 아이가 지랄(?)을 할 때 부모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덜 상처받는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잘 독립하려면 무엇보다 부모와 함께하는 시기가 중요하다. 부모는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뭔가를 자꾸 해주려고 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혼자 해보도록 지켜볼 줄도 알아야 하는데, 성급하고 불안한 마음에 부모가 다 해주어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독립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부모는 무엇을 스스로 하게 하고 무엇을 도와주어야 하는지, 정말 아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것인지 불안해한다. 이런 부모의 불안이 어떤 형태로든 아이에게 전달되어 아이의 불안도 가중된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겪고 넘어가는 통과의례 같은 일이니 너무 혼란스러워 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아야 하는데 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해 내면의 힘을 잃었던 것 같다. 


 ‘청소년들과 성인의 표정 인식에 대한 실험연구’가 있다. 한국인의 얼굴 표정을 보고 감정을 읽어 내는 비교실험이었다. 얼굴 표정에서 부정적 감정(화, 두려움, 슬픔, 무표정 등)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청소년들이 성인 집단에 비해 감정적 흥분도가 높게 나온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청소년들의 경우 다른 사람의 슬픈 표정이나 실망스러운 표정을 자신을 향한 혐오 표정으로 잘못 인식한다는 사실이다. 또 부모가 특별한 표정을 짓지 않고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청소년들은 그 표정을 좀 더 부정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아이들 사춘기 시절, 당시 내 표정은 거의 슬픈 표정이었으니 아이들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중 하나가 자녀를 믿고 기다리는 일 같다. 막내딸은 공부에 대한 실패감과 자신감 하락으로 중학생이 된 후 꿈이 없다고 말했다. 공부를 안 할 거라고 선언했고 중학교 내내 시험기간조차도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이미 청소년 교육 강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꿈과 진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목회자 가정, 강사로서의 체면, 그리고 나의 자존심까지 섞여서 아이의 이런 모습을 받아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결국 아이를 위해 강아지 ‘해피’까지 입양하게 되었다. 나는 원래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데 딸을 위해 키우다 보니 털과 냄새로 인해 내 안에 스트레스가 더 쌓였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책임감으로 똥을 치우고 산책하고 먹이도 주었다. 해피는 내가 이런 마음으로 자신을 대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동물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귀신같이 안다. 해피에게 해준 건 내가 더 많은데 해피는 나보다 딸을 더 따르고 좋아한다.  


 해리 할로우의 ‘원숭이 실험’이 생각났다. 당시 모든 사람들은 새끼가 어미를 따르는 것은 어미가 젖을 주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실험을 통해 새끼들은 포근하고 따뜻한 품이 그리워 어미를 찾는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자녀를 위해 여러 가지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정서적인 따뜻함 즉 친밀감이다. 마르다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우선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이 일방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열심히 해주다가 결국 자녀의 어이없는 반응에 혼이 나가고 참담한 심정이 들 때가 많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교류분석에서 말하는 ‘어버이 자아’가 너무 높았던 나는 ‘감정 코칭’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 나의 당위적 사고와 과한 책임감은 아이와의 관계의 이해의 폭을 좁게 만들었다. 먼저 아이의 마음을 이해했어야 하는데 잘못된 행동만 보고 진짜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또한 잘못된 언행을 훈육할 때는 아이의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는데 아이의 자극에 대해 잘못된 반응을 하여 결국 그 문제가 내 문제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따라서 청소년기는 부모의 틀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시기이자 아직 공사 중인 시기이니, 말이 안 되는 행동이나 말을 해도 잘 받아주어야 한다. 일단 “그래 네 말이 옳다”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이 마음을 여는 열쇠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먼저 감정을 받아주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뒤에 이성적인 훈계나 가르침을 행해야 한다. 또한 청소년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과 아직 준비되지 못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스스로 불안하고 힘들어져 짜증을 많이 낸다. 유아는 젖을 떼고 이유식을 거쳐 점점 딱딱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사춘기를 ‘심리적 이유기’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청소년을 미숙하고 성인이 되는 준비를 해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시도하는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 청소년과 성인은 동반자다.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아슬아슬한 시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의존된 시기에서 성인으로 가기 위한, 좀 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한 개인으로 나가기 위한, 희망적이고 활기찬 긍정적 기간’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하듯이 자녀들을 이해하기 위한 여러 가지 지식들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 물론 지식은 매 순간 몸에 배는 연습이 필요하다. 

 

 유진 피터슨이 ‘사춘기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부모들이 본인도 모르게 자녀를 자기 뜻대로 키우다가 하나님 뜻대로 자녀를 키우도록 내려놓게 하는 시기이며, 부모들도 이 시기를 통해 성장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여러 믿음의 가족 이야기를 볼 때마다 ‘왜 성경은 이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나열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콩가루 집안 같은 이야기들이 널렸다. 그러나 동시에 위로도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나가신다. 물론 때로는 거침없이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우리의 행위대로가 아니다. 때로는 병 주고 약주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늘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한이 없다. 세 자녀들을 통해 나를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자녀가 어떤 존재인지, 나는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멀어진 둘째 딸과의 관계와 신앙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연습하고 있다. 이렇게 부족한 나를 쓰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