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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워킹+맘= 죄인인가 신(神)인가?] 직장생활과 자녀양육은 행복의 씨앗_김진경

[소리] 2017년 두 번째 소리-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직장생활과 자녀양육은 행복의 씨앗

 

김진경 | 대구대 91

저는 여린 마음을 가진 첫째 딸 시은이와 당찬 둘째 딸 민지의 엄마입니다. 현재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대전직업능력 개발원에서 발달장애인에게 직업교육을 하는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엄마(워킹맘)”라는 단어는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나는 엄마의 자리보다는 직장인이라는 자리가 익숙하다. ‘엄마의 자리는 왠지 나를 작아지게 만든다. 열심히 한다고, 경력이 쌓인 다고 잘 할 수 있는 자리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생활 8년차가 되는 해인 30대 후반에 화려한(?) 싱글의 삶을 접고 결혼을 했다. 신혼 때는 남편의 임용 고시 준비를 위해 아이 갖는 것을 보류했다가, 결혼 3년차가 되는 해에 드디어 나는 엄마가 되었다. 오랜 시간 기다렸기에 더 감사했다.

  임신 초기에는 입덧이 심해 두 달 정도 병가를 번갈아 사용하며 근무를 해야 했다. 다행히 함께 일하는 교사들의 배려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내가 일하는 직장은 다행스럽게도 육아 휴직이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출산 후에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1년 휴직 기간에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은 너무나 행복했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주께서 생명을 통해 주시는 놀라운 신비에 흥분하고 감사하며 지냈다.

  이렇게 엄마라는 기쁨과 행복이 꿈 같이 지나고 복직의 날이 다가오면서 나는 고민에 쌓였다. 아이를 돌봐 줄 곳이 필요했다. 집은 대전인데 인사이동으로 대구에서 근무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2살 된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혼자 대구 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가까스로 영동에 있는 친언니가 아이를 돌봐주겠다고 나섰다. 나는 언니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직을 할 수 있었다. 

  복직하고 월요일이면 나는 대구로, 아이는 영동으로, 남편은 대전에서 각각 한주의 삶을 시작했다. 복직한 후 한 달 동안은 매일 저녁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엄마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으로 힘들었다. ‘아이를 두고 혼자 대구에서 무엇을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나 자신을 무력한 엄마로 만들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우리 가족은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것처럼 격한 만남을 가졌다. 주말이면 아이는 힘든 나를 위로하듯, 그윽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엄마, 난 괜찮아요!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조카를 친자식처럼 돌봐주는 언니가 있었기에 직장생활이 가능했다. 한국사회에서 가족의 지원이 없다면 워킹맘이 직장 일에 집중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해 겨울, 대전으로 인사이동이 있었다. 4개월의 이산가족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대전에서 함께 살수 있으리라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아이를 대전으로 데려와 어린이집에 보내겠다는 계획이 잘 추진되지 않았다. 당시 어린이집 사건사고 소식이 연이어 들려온 탓이었다. 주위에서도 어린이집보다는 이모 집이 아이를 위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나와 남편은 한 해 더 아이를 언니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렇게 우리는 또 다시 1년 동안 주말가족의 삶을 살아야 했다. 서운했고 아쉬웠지만 그래도 아이를 위해서는 이모 집이 최상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아이가 이모에게 엄마는 왜 나를 이모 집에 보내지? 엄마 미워!”라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부모로서 최상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에게는 아픔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미안했다. 가족의 도움을 받는 것도 아이에게는 최상의 선택이 아니었던 셈이다.

 

  첫째가 3살이 되는 해에 둘째를 임신했다. 남편의 가족계획은 둘은 있어야 한다였고, 나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이 둘을 양육할 자신이 없었고,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은 더욱 자신이 없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모습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실 둘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우울감에 빠졌다. 돌발 상황 (?)을 해결할 답이 보이지 않았고, 준비되지 않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과 두려움뿐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다음 해, 둘째를 출산했다. 나는 두 번째 육아휴직을 했다. 두 아이의 양육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앞으로의 계획도 세워야 했다. 첫째에 대한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고 싶은 생각에 아이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다. 사회적으로는 출산을 장려하지만 직장에서는 육아휴직을 권하는 분위기가 아닌지라, 두 번째 휴직을 할 때는 동료 교사들에게 미안함이 컸다. 그래도 직장에 눈치가 보여 출산휴가 3개월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비하면 휴직을 한다는 것만 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첫째의 육아휴직 때와는 다르게 두 명의 아이를 돌보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둘째아이가 기질적으로 예민한 편이어서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일은 만만치 않은 노동이었다. 첫째아이는 월요일마다 가족이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엄마가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했다. “엄마! 나 이제 이모 집에 안 가는 거야?”라고 반복해서 확인까지 해가며 좋아했다. 첫째의 어린이집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엄마의 존재를 인지시켜 주었고 전업주부로의 역할에도 최선을 다했다. “시간아 멈추어다오!”를 외치며 달렸지만 어김없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다시 복직이었다. 6, 3살인 두 아이를 두고 나는 다시 직장에 나가야 했다. 이번에는 가족이 헤어지는 일은 결코 안 된다는 원칙으로 첫째는 유치원에, 둘째는 베이비시터에게 양육을 부탁했다. 감사하게도 좋은 유치원 선생님과 베이비시터를 만나 아이들이 잘 적응했다. 어린 자녀를 둔 워킹맘의 간절한 소망은, 좋은 양육자를 만나는 것이다. 좋은 양육자를 만나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나는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 아니어서 한정된 에너지를 적절하게 배분하여 사용해야 한다. 직장과 가정에서의 에너지 분배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장애인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키고 그 교육을 발판으로 취업을 해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이다. 일의 특성 상, 직장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진할 수밖에 없다. 퇴근 이후에도 학생과 보호자와의 상담전화로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집에 와서도 이어지는 직장일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줄어들게 만들었다. 귀가 후에는 철저하게 ‘ON/OFF’ 스위치를 바꾸라는 전문가의 말을 참고하여 급한 상담 이외에는 문자를 통해 안내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면서 아이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유치원 행사는 주위의 인력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남편과 서로의 시간을 조절하여 참석했고, 야근이 필요한 경우는 베이 비시터의 도움을 받았다. 부모가 좌충우돌, 허둥지둥 하는 사이에도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다.

 

  첫째가 초등학교 입학하는 해에 다시 대구로 발령이 났다. 일정한 주기로 타 지역 인사발령이 이루어 지는데 다시 그 시기가 된 것이다. 보살핌이 많이 필요하다는 초등학교 1학년. 나는 내가 과연 직장생활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직장이냐, 가족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또다시 서게 된 것이다.

  긴 고민 끝에 육아휴직을 하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대구 인사발령 직후 휴직서를 내는 것에 대해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선택할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휴직밖에 없었다. 휴직으로 인해 결원이 생겨 업무가 가중되는 동료 교사들을 배려할 마음의 여력도 없었다.

난 지금도 직장이냐, 가족이냐?’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 무엇을 선택해도 만족스럽지가 않다. 일하는 엄마로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스스로 행복하다 느끼며 사는 것이 여전히 나에게는 힘든 과제이다. 그것은 아마도 모든 것을 잘하고 싶은 과한 욕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나 답을 찾지 못해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싶을 때, 남편은 내가 하는 일을 격려해 주었다. 잘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라며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었다. 게다가 가사일과 양육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일을 통해 얻는 삶의 의미를 공감해 주고 지지해 주는 남편에게 항상 고맙다.

  육아휴직 기간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와 5 세가 된 둘째와 여행을 많이 다녔다. 동네 도서관도 같이 다니고 주요 시설 관람도 하고, 아이 학교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마음에 갖고 있던 엄마로서의 죄책감을 깨끗이 씻어 버렸다.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가 좋아?”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일하는 엄마가 좋다는 첫째와 집에 있는 엄마가 좋다는 둘째,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그러면 엄마가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집에 있으면 되겠다라고 말해 주었다. 일하는 엄마가 좋다는 첫째에게 고마웠다. 어린 시절을 이모 집에서 보내게 한 것에 대해 무거운 마음의 짐을 갖고 있었는데, 일하는 엄마를 격려해 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어느덧 첫째는 4학년, 둘째는 1학년이 되었고 나는 대전으로 발령을 받아 주말가족의 생활을 청산 했다. 여전히 나는 워킹맘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친정엄마의 많은 도움과 남편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육아와 일을 병행했던 지난 10여 년을 되돌아본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했고, 그곳에서 에너지를 얻었고, 자신감을 찾았다. 그것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퇴직이 아니라 휴직을 택하면서까지 나의 일을 유지한 이유였을 것이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주위 인력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직장 에서 이용할 수 있는 복지제도(휴가, 휴직, 시간제 근로 등등)를 최대한 이용하여 가정을 위한 시간을 반드시 확보하고 아이들에게 시간을 투자하여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하든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최상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이들은 행복한 엄마를 보면서 행복해 한다. 일과 자녀양육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씨앗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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