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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정치색(色)]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그리스도인_김근주

[소리] 2013년 여섯 번째 소리 -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확 끼얹는 대화 주제의 으뜸은, 아마도 '정치'가 아닐까 합니다.

서로의 생각이 뚜렷한 만큼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얼굴만 붉히고 돌아선 기억이 한 번쯤 있으시겠죠.


우리의 맨 얼굴을 살펴보아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골치 아픈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 정치색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었던 학사들의 사례를 모으고 우리와 비슷한 단체의 선례도 들어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정치에 대한 언급조차 꺼려지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서로의 다름에 대한 인정과 소통의 물꼬가 트이면 좋겠습니다.


- 2013년 12월호(통권 211호) 소리정음 中



시끄러운 세상 속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 이재웅(상명98)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그리스도인



김근주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전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어진 경전으로서의 신구약 성경을 후대에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 뿌리에는 공평과 정의로 부름 받은 삶, 하나님 백성의 기본적인 틀로서의 희년에 대한 관심으로 대표되는 복음의 공공성이 놓여있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쳤고, 현재는 하나님 나라의 구현과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을 추구하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전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특강 예레미야》(IVP)가 있다. 





"... 대한민국의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이다. 한자 자체는 ‘자본이 중심인 사상’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는 기독교인들이 크게 반발할 것 같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데 비슷한 방식의 표현이지만 특이하게도 기독교인들이 대단히 싫어하고 거부하는 표현으로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번역되는 “휴머니즘(humanism)”을 들 수 있다. 말을 풀자면,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던 대부분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인본주의’에 대해서는 사탄의 대명사쯤으로 생각하고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거부하고 공격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자본이 주인이 되는 것은 크게 상관없는데, 사람이 주인이 되는 꼴은 못보겠다’라고 할 수 있겠다. 정작 주님은 하나님을 대신해 버리는 것으로 “재물(헬라어로 맘몬)”을 언급하셨지만(마 6:24), 오늘 우리 교회는 ‘자본주의’보다는 ‘인본주의’가 훨씬 더 무섭다고 여기고 있는 셈이다” 


- <복음과 상황> 273호 커버스토리에 실었던 ‘사람답게 성경읽기’의 한 부분 



예수님 당시 로마 시대는 여러 종교에 대한 대단한 관용의 시대였다. 그로 인해 수많은 종교가 범람하고 번성하였다. 그 종교들마다 사람의 마음을 끌고 잡아당기는 측면이 있었겠지만, 복음서에는 타 종교에 대한 심판과 정죄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삶을 위협하는 단 하나는, 위에 인용한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타 종교가 아니라 바로 “맘몬”이었다. 수많은 종교마다 이런 저런 논리와 주장, 신화들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자기네 종교를 믿고 따르면 부귀영화와 존귀, 번영을 누리게 된다는 것, 그것을 이 세상에서 누리든지 아니면 죽음 이후에 누리게 된다고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재물을 의미하는 “맘몬”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대신하는 가장 큰 우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 숭배임을 기억할 때, 시대를 불문하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맘몬을 배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재물이 어떤 식으로 우리의 삶을 파고 들어오는지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검토하고 이해하는 것이 신앙 공동체의 급선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재물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는 ‘자본주의’ 세상이라면, 자신을 끊임없이 확장하며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재물의 논리에 올바르게 맞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사탄 혹은 공중 권세 잡은 이가 그 힘을 가장 잘 드러낼 영역도 바로 이 재물, 자본을 중심에 두는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은 구체적으로는 자본과 재물의 논리를 이해하고 맞서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단지 입술로 그 이름을 고백하며 주변에 널리 증거하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본과 재물의 논리에 대적하고 맞서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본과 재물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도록 하신 것도 바로 그와 같은 목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을 한번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은 흔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의 약속과 연관하여 기억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늘 창세기 12:1-3에 있는 세 가지 복이 단골로 언급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복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점은 창세기 18:19에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 명령을 수행할 주체, 그리고 이 명령을 수행할 공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며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시고 그것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땅과 자손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관계의 핵심이 아니라, 진정한 핵심인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을 위한 배경이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땅과 자손의 복은 부르심의 핵심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다. 부르심과 선택의 주된 목적은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이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이 특별한 땅이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특별한 땅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은 그 곳을 무너뜨리시고 그 성전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신다.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인 것처럼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시고 그들을 이방 땅에 흩어버리신다. 그들에게 핵심은 땅과 자손이 아니다. 예루살렘과 아브라함의 자손 됨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이 특별한 것이며 중심인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 가운데서 의와 공도의 삶을 살지 않은 채, 교회 건물을 자꾸 짓고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식의 말을 내뱉게 될 때, 반드시 하나님은 그 건물을 허물어 버리실 것이다. 예수를 고백하는 것을 특별하게 여기며 믿는 자는 천국이요 불신자는 지옥이라는 말만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이들로 전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개역개정판 성경에서 번역 용어를 자주 바꾸는 바람에 우리는 ‘의와 공도’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표현인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얼마나 자주 성경에서 반복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서는 ‘의’로 번역되었지만 개역개정판에서 종종 ‘공의’로 번역되는 ‘쩨다카’는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의 근본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이들과 함께 웃는 것으로 요약해볼 수 있으며, 이를 가리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창세기 구절에서는 ‘공도’로 번역되었으나 개역개정판에서 대체로 ‘정의’로 번역되는 ‘미슈파트’는 ‘재판을 통해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 바로 잡혀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재판은 지도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업무 사항이라는 점에서, 미슈파트는 법적 제도적 영역과 연관된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쩨다카가 우리가 늘 대면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의 관계를 가리킨다면, 미슈파트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을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쩨다카와 미슈파트,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찾으신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손이 이렇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살 때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의 내용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은 열방의 복을 위하여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으로 부름 받은 존재이다.

그런데 정의와 공의는 단지 사람이 행하는 윤리적 덕목인 것만은 아니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시 89:14);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들렸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시 33:5)



개역개정판 성경이 번역을 조금씩 달리 하였지만, 위 세 구절에서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나란히 함께 쓰였다. 이에 따르면 공의와 정의는 왕이신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칙이요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은 단지 인간적인 덕목이나 윤리적인 삶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 통치를 본받는 삶,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그분의 통치에 따라 우리 역시 세상 가운데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와 공의를 행한다는 말은 추상적이거나 정신적인 데 그치지 않는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이 용어의 구체적 의미를 뚜렷하게 풀이한다.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렘 22:2-4);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공정한 저울과 공정한 에바와 공정한 밧을 쓸지니”(겔 45:9-10)



이스라엘은 정성 가득하고 극진한 예배와 예물로 하나님께 다가가지만(사 1:10-15),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에 대해 매우 단호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을 심으시고 그들에게 찾고 기다리고 기대하신 열매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정의와 공의”의 열매였다(사 5:7; 또한 사 1:16-17). 


이것은 하나님과 연관하여 이 표현이 사용된 다음과 같은 예에서도 도드라진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사 5:16)



우리네 교회에서 하나님의 높으심을 기리고 찬양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통해 그분의 높으심과 거룩하심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하나님의 높으심과 거룩을 지나치게 종교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교회 내부의 어떤 것으로 좁혀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듯이, 하나님의 백성 된 이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그 때에 열방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오며(사 2:1-5), 열방이 다윗의 후예에게로 돌아올 것이다(사 11:1-10). 다윗의 후예가 정의를 땅 끝까지 세우니 땅 끝의 섬들이 하나님의 법을 앙망하게 될 것이다(사 42:1-4). 즉 정의와 공의의 삶이야말로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근본적인 지점인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이제까지의 우리네 선교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기준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교는 세상을 향해 예수 믿고 구원 얻으라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명하셨다(마 28:19-20).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마 6:33). 즉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의 원칙으로서 그의 의(쩨다카)를 구하는 삶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의 본질적 측면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명을 받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모색과 고민의 출발점은 어디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할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이 시대 가운데 어떻게 정의가 구부러지고 있고 공의가 훼손되고 있는지 분별하고 파악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현실 사회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정치 이야기는 말고 성경만 풀어달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마치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채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신앙이 진공 가운데서 ‘예수 믿으세요’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정치와 경제, 가난한 사람과 그들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정의와 공의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 응답하는 삶이다. 불의와 가난을 조장하는 정치와 경제 구조를 하나님의 통치에서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정의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경제를 살피고 정치 현실을 살핀다. 열방을 회복하는 부름을 받은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현실의 정치, 경제,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일은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본질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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