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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연재] 소리지음

[파란만장 직장생존기] 얼음? 땡!

[파란만장 직장생존기] 직장에서 겪는 하루하루의 분투


얼음? 땡!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내 업무는 ‘청소년 교육’과 관련이 많아서 새 학기가 되면 늘 분주하다. 팀원들도 많이 바뀌었다. 함께 근무하던 2명의 선생님과 팀장님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셨고, 새로운 사람들이 추가로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기존에는 6명이 근무를 했지만 이제는 8명으로 불어나 덩치도 커졌다. 사람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업무까지 추가되어 요즘 사무실은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다. 새롭게 변한 사무실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낯선 근무지에 녹아들어야 하는 사람들도,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도 어색한 건 마찬가지다. 아직 서로에게 적응하지 못한 상태인데 일은 끊임없이 쏟아졌고, 날이 갈수록 얼굴에 피곤이 쌓여가는 듯했다. 끝내는 발령을 잘못 받은 거 같다며 다른 사무실로 옮겨가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그렇게 폭풍 같은 며칠이 지났을 무렵, 우리 팀 8명 모두 회의실에 모였다. 안 그래도 바빠서 정신이 없는데 또 회의라니, 시작하기 전부터 머리가 아팠다. 회의는 의견을 모으고 사업을 공유하기 위해 필요한 자리이지만, 어떤 날은 실속 없는 이야기만 오가다가 끝나기도 하고 때로는 답이 나올 리 없는 이야기만 반복되기도 했다. 업무를 덜 맡으려고 하거나 쉬운 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밥그릇 싸움도 잦았다. 이번에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무거운 분위기에서 회의는 시작됐다. 모두가 빨리빨리 회의를 진행해서 결론을 짓고 각자의 업무에 다시 복귀해야 한다는 초조함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오신 한 선생님이 갑자기 “잠깐만!”하고 외쳤다. “회의는 우리의 의견을 공유하는 자리잖아요. 저는 이 시간에 우리가 서로의 마음도 함께 열고 갔으면 좋겠어요. 마음이 연결되어야 소통도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비록 모두가 바쁘지만 충분히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진 후에 회의든 업무든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아이스 브레이킹을 준비했다며 카드 뭉치를 꺼내셨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팀은 공공기관에 소속되어 있어서 딱딱하고 관료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비 오는 날 기관장이 차에서 내리면 우산을 씌워 주기 위해 달려가야 하고, 회식 자리에서는 높은 분들에게 술 한 번 따르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런 곳이다. 직원들은 기관의 조직체계와 상하관계에 젖어 원리원칙을 지키고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회의를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시작하자’는 그 선생님의 제안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사실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50장쯤 되는 카드가 책상에 펼쳐졌다. 카드에는 다양한 ‘감정’에 관한 형용사들이 적혀 있었고,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카드를 3장씩 고르기로 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것을 바로 가져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한참 생각하느라 자신이 원했던 카드를 놓치기도 했다. 각자 카드를 다 고른 후에 자신이 왜 이 카드를 골랐는지 나누기로 했다. 카드를 고르면서 지금 자신이 어떤 감정 상태인지 돌아보았기에 왜 그 카드를 골랐는지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불안한’이나 ‘초조한’, ‘막막한’과 같은 카드들의 비율이 높았지만 동시에 ‘설레는’과 ‘든든한’, ‘마음이 놓이는’의 카드를 가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었고, 또 앞으로 함께 꾸려갈 사업에 대해서 기대를 다지기도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이야기를 진행하는 동안 짜증과 초조함으로 가득 찼던 내 마음은 이내 팀 안으로 완전히 녹아들었다. 유머가 흘러나왔고 긴장과 불안으로 어쩔 줄 모르던 분위기도 안정적으로 변했다. 누군가의 ‘업무’에만 머물러 있었던 내 관심이 ‘그 사람 자체’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카드를 고르는 행위는 내가 어떤 마음인지를 생각해 보고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은 촉매제에 불과했지만, 이 시간으로 인해 팀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고 어색하게만 느껴지던 팀원들도 왠지 반가워졌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이후로 진행된 회의의 내용은 제대로 나뉘지 않은 업무분장과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여전히 힘겨웠지만 우리는 모두 웃고 있었다.

  

그날의 경험은, 말하자면 회의의 혁명이었다. 여태까지의 ‘회의’란 단순히 업무를 논하는 자리였지만, 이제는 팀이 함께 모여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우리는 회의를 마무리하면서 다음 회의의 아이스 브레이킹 담당자를 정했고, 두 번째 시간에는 인생 곡선 그리기를 통해 서로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좀 더 창의적인 업무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공간의 인테리어를 바꾸거나 출퇴근 시간을 유연하게 바꾸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커다란 무언가를 바꾸기 이전에, 회의하는 시간에 쉼표 하나만을 넣어도 팀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 같다. 그 쉼표는 어쩌면 업무보다 더 중요한 ‘관계’를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학부 때 IVF를 하면서도 느꼈지만 공동체로 모인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어느 정도 서로를 받아들이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회사를 공동체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여태까지 내게 사무실이란 딱딱하고 업무적인 공간이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업무하는 동안에나 부대끼는 공적인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을 나서고 나면, 혹은 일터가 바뀌고 나면 명절 때에나 안부를 묻는 정도의 사람들을 ‘직장동료’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곳은 이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터로서의 공동체가 분명하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다. 비록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나아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아니지만, 나는 이 직장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회의 혁명으로 인해 내 마음을 나누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사적이라는 단어와는 가장 거리가 먼 ‘사무실’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사적이지 않은 ‘회의’시간에 작은 변화를 준 것뿐인데 커다란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물론 이곳 분위기는 여전히 딱딱하고, 때로 컴퓨터 자판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삭막한 곳이긴 하지만, 이제 적어도 회의 시간만큼은 웃음이 넘치는 즐거운 공동체가 되었다. 매일 쏟아지는 업무에 너무 지쳐 버린 직장인이 있다면, 그분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회의 시간이나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에 팀원들과 함께 모여 간단하게나마 마음 나누기를 진행해 보는 건 어떨까. 

  

3월인데도 아직 봄바람이 차다. 하지만 그 바람에도 얼음은 녹았다. 우리 사무실에 불어온 혁명의 바람이 관계의 얼음을 녹였듯이 말이다. 곧 내가 아이스 브레이킹을 진행할 차례가 돌아온다. 긴 겨울 끝에 봄을 기다렸듯 난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회의 시간을 기다린다.




김작가J대06

하나님나라를 청소년들과 함께 재미있게 살아가고 싶은 청소년 활동가. (필자와의 합의에 따라 필명을 사용합니다.)

















vol.219│2015.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