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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F/IVP

[시심 12월호 영혼의 창]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 날 - 논쟁의 하루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 날 -논쟁의 하루 (한병선)


그 런 날이 있다. 종일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 그런 날이면 끝까지 일이 꼬여버리고 만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오늘따라 회의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일을 할 때면 서로 입장 차이가 종종 생기기 때문에, 그 입장을 설명하다 보면 논쟁이 일어나는 건 다반사다. 논쟁의 승패는 항상 감정 조절이 관건이다. 감정의 동요 없이 잘 설명하고, 설득하고, 기다리고, 들어주고. 그 과정이 길고 힘들어서 그렇지, 잘 하고 나면 그럭저럭 기분도 괜찮다. 그러나 그만큼 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 일에 평정심이 드는 것은 좋지만, 기운이 달리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날따라 회의를 늦게까지 하고 집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었다.




정말 쉬고 싶은 그 순간, 갑자기 아침에 널어놓은 빨래가 생각났다. 그런데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보니 딸이 기특하게도 빨래를 다 개어놓고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잘했다고 칭찬 세례를 퍼부으며 예뻐했을 것을, 그날따라 피곤했던 탓에 나도 모르게 시큰둥했다. 딸이 내 반응에 실망한 듯 말했다. “엄마, 왜 칭찬 안 해줘? 엄마 칭찬 기다렸는데.”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엄마는 20년 동안 빨래해줬는데! 그럼 왜 엄마에게는 고맙다고 안 해줘?” 했다. 나도 일하면서 칭찬을 받고 싶었나 보다. 집안일을 하면서 그리고 밖에 나가 일하면서 누구에게도 칭찬을 듣지 못하는 삶이 조금은 서글퍼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결혼하고 매일 집안일을 해왔다. 20년이 넘게 밥을 했고 청소와 빨래를 했다. 하루 이틀 못한 적도 있지만 거의 매일 꼬박꼬박 집안일을 했고 가족들에게 사랑을 주려고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필요를 채우고, 그들에게 충족감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내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칭찬이나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었나 보다. 그런 내가 그날은 좀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딸에게 예쁜 말을 하지 않았다. 딸이 말했다. “엄마가 예쁜 말을 하지 않네. 나는 칭찬받고 싶어서 빨래도 개고 엄마를 기다렸는데 엄마가 칭찬해주지 않아서 슬퍼.” 딸에게 많이 미안했다. “아이고, 미안하구나.”




그런데 사과를 하고 끝날 줄 알았던 그날 하루, 더 큰일 하나가 남아있었다. 딸은 요즘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 계속해서 내게 말했다. 그 이야기는 적어도 한 달 가까이 듣고 있었는데, 나는 그날따라 들어주지 못했다. 며칠 전에도 듣고 조언을 해줬는데 또다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니, 나는 그만 “대학 생활이 원래 힘들어. 엄마도 그랬어.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해. 계속해서 징징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고 약간은 다그치듯 말해버렸다. 물론 딸은 나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을 테다. 그냥 자신을 받아주길 바랐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받아줬을 텐데, 그날 있었던 논쟁 때문에 피곤해서 혹은 더 이상 같은 이야기를 듣기가 싫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이해해주지 않고 어깃장을 놓았다. 결국 그 말 때문에 두 시간을 더 이야기하게 되었다. 엄마에게 섭섭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딸의 말을 나는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해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네가 독립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렇게 2시간의 논쟁 끝에 서로 납득이 되었다. 그날의 가장 중요한 소득은 평정심을 갖고 서로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울거나,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고 대화로, 계속해서 기다리고 들어주며 그렇게 설득했다. 긴 하루였다. 자식을 인격적으로 키우기가 정말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국 견딘다. 그것이 부모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