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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THE’ 생생한 수련회] 우리 둘의 연결고리였던 수련회_신상훈


[소리] 2017년 네 번째 소리- 8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우리 둘의 연결고리였던 수련회

 

신상훈 총신대93

숭실대 97학번 김유진과 10년간 연애한 끝에 결혼을 하고, 지금은 예쁜 딸아이와 같이 오손도손 살고 있는 총신 IVF 학사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1999년 여름수련회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밀레니엄을 앞둔 세기말이어서, 세간에는 세상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거나 주님이 다시 오실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시지 않았고, 저는 기대와는 달리 보람차지도 않았던 2년간의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복학하기 전에 IVF 수련회에 갔습니다. 일반 수련회 리더로 가는 것보다는 군생활로 인한 어리숙함을 털어버릴 겸 새신자수련회(당시에는 EBS)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글쎄, 그 수련회에 제가 군에 가기 전부터 맘에 찍어 두었던 자매가 와있지 뭡니까! 제가 4학년 때(제가 이래 봬도 3학년을 마친 후 1년 동안 휴학하고 IVF만 했던 열성 환자였습니다) 그 자매는 푸릇푸릇한 후레쉬맨이었습니다. 당시 서울역 근처의 교회에서 남서울지방회 말씀사경회를 했는데, 그곳에서 처음 그녀를 봤습니다. 어찌나 예쁘던지! 솔직히 인정합니다. 외모에 끌렸다고요. , 처음에는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렇게 그 자매를 마음에만 담아두었는데, 지긋지긋한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친 직후 오게 된 첫 수련회에서 바로 그 자매를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왜 이렇게 중요하냐면 IVF 수련회는 종류가 많기 때문입니다. 일반 수련회도 아니고 새신자 수련회에서 보게 될 줄이야, 오 마이 갓!

 

새신자 수련회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아서 서로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몇 개의 소그룹이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 다른 소그룹이었지만 큰 방에서 같이 조모임을 하며 지내게 되었지요.

 

지금은 오래되어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용감하게 유진 자매를 불러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햇빛이 따사로운 오후였죠. 우리는 정원에 나란히 앉아서 관목을 보고 있었어요. 당시의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위에도 언급했듯이 따끈따끈한 예비역! 저는 자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혹시 저렇게 풀에 삐쭉하고 나온 거 있으면 부대에서 어떻게 하는 줄 아냐? 저거 다 조경 가위로 깎아줘야 한다! 엄청 힘들어.” 얘기를 마치고 나서 제가 , 이제 들어가자라고 했다는군요. (저는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아내가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당시 자매는 그 상황에서 제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답니다. ‘뭐지, 이 어이없는 시츄에이션은?!’ 그렇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생각해도 진짜 어이가 없네요. 인정합니다. 자매는 제가 같이 나가서 얘기하자고 했을 때, 뭔가 의미 있게 할 말이 있거나 중요한 것을 말할 줄 알았는데, 기껏 불러서 한다는 얘기가 잡초 얘기였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사실 저는 당시 자매가 이렇게 생각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만 수련회 내내 제가 속한 소그룹이 약간 미친 사람들처럼 즐거워하기에, 저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이 들긴 했다고 합니다.

  

수련회 이후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데, 어머, 그곳에 또 그 자매가 있었지 말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고 교회를 옮긴 게 절대 아니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성급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어느 주일, 전도사 형님이 저에게 이러더군요. “상훈아, 주일학교 교사 하지 않을래?”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유진이가 교사 하면 저도 할게요.” 이때 전도사님이 씩 웃으며 저에게 알았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저와 자매는 함께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 어려운 일을 제가 해내지 말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죠.

 

사실 그 당시 자매 주위에는 자매를 좋아하는 형제들이 적어도 다섯은 있었을 겁니다. 지금 제 아내는 극구 부인하면서 아니다. 한 명밖에 없었다!”며 정색을 하지만요. 그 한 명은 저한테 들켰던 적이 있거든요.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 동안에도 자매에게 관심을 보이는 형제가 있었지만 어찌어찌 잘 해결(?)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제가 자매 곁에서 저의 비루한 존재감을 알게 모르게 어필한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주일에는 자매가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왔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무슨 일이야, 괜찮아?”라며 걱정했는데 그날 자매는 교회에 오면서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가 손가락 다친 걸 보고 걱정해주는 형제가 있다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요! 오오!

 

이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면서 자매에 대해 결정적으로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또 다른 수련회였습니다. 그해 겨울, 우연히 둘이서 IVF 수련회 소망나누기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아끼던 멤버들이 잘 있나 보러 간 것이죠. 수련회에 가는 두어 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저는 자매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자매가 오빠, ‘보노보노알아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모르는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엄청 재미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매는 성대모사 급으로 동화구연을 시작했습니다. 캐릭터인 포로리, 너부리, 보노보노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내면서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풀어놓는데, 저는 소망나누기에 가는 내내 빵 터질 만큼 재미있었습니다. “너부리야, 너부리야, 나 때릴 거야?”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모르는 분들은 유튜브에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엄청 재밌습니다.) 그날 저는 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이 자매와 같이 살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 이 자매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자매 주변에서 질척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매에게 조금씩 다가가면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기 시작한 거죠. “밥을 사주면 뭔가 소그룹에 도움이 되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제안도 하면서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 같았습니다. 자매는 뭐 이런 선배가 다 있나라고 생각하면서 저를 불쌍히 여기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했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잘해줘도 모자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왜 그랬나 싶습니다. 마치 어린애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에게 못되게 구는 모습의 파편인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면 거리를 두거나 도망갈까 봐 무섭기도 했나 봅니다.


약간의 썸을 타는 기간이 지나던 어느 날, 자매가 저와 거리를 두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빠, 우리 생각할 것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문자를 받고 다음날 결단을 했습니다. 선물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당시 가난했던 저는 집에 있는 썬키스트 유리병에 곰탕을 담아 자매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한 선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저는 자매에게 프러포즈인 듯 아닌 듯 먹고 기운을 차리라며 곰탕을 주었습니다. 거절당할까 봐 겁을 먹은 저는, 애매하게 우리 서로를 같이 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매는 내심 멋있고 용기 있는 프러포즈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저의 이 말을 듣고 짜증이 확 났다고 하네요. 저는 그때 왜 그랬을까요?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짜증이 난 자매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저에게서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숨바꼭질이 시작되었죠. 저는 자존심을 모두 버렸습니다. 제발 나와 사귀어 달라고 두 달 동안 필사적인 구애를 한 끝에 드디어 교제에 성공하게 됩니다. 자매는 못 이기는 척 받아주었습니다. 그 후 10년 동안의 기나긴 교제 끝에 결혼에 이르렀고, 지금은 예쁜 딸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교제하기 전의 에피소드보다 10년 동안 사귀면서 벌어진 일들이 훨씬 더 스펙타클합니다.

 

혹시라도 제가 적은 이야기로 인해 상처를 받거나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에피소드이고, 독자들의 삶에는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부족하고 보잘 것 없던 제가 어떻게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자매를 만나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나누었습니다. 그 속에는 거의 매번 수련회라는 연결고리가 자리 잡고 있었네요. 이 글은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을 드릴 수 있는 글은 아닙니다. IVF를 하면서 많은 꿈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달려오신 형제자매들에게 이 글이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부족한 저도 먹여 살리시고 지난 날 제 삶을 인도해주셨던 것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긴 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멍청했던 한 남자가 꽤 괜찮은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차근차근 인생에 대해 배웠습니다. 자매를 만난 이후로 지금 저는 예전보다 좀 더 나은 남자이자 아빠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게 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살아가기 힘든 순간에 직면해 있는 모든 분들과 눈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지체들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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