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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THE' 생생한 수련회] '새벗 수련회'를 통해 이어진 하나님의 은혜_임유리

[소리] 2017년 네 번째 소리-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THE" 생생한 수련회

               



한국 IVF는 60년을 이어오는 동안 각 세대별, 지역별로 수많은 수련회를 열어왔습니다. 
특히 올 여름에는 17번째 동아시아 IFES 학생수련회인 "EARC"가 한국에서 개최됐습니다. 
그래서, 무더운 여름 날씨만큼이나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지난날의 수련회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그때의 열정과 은혜가 우리 모두의 '오늘'에 다시 한 번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새벗 수련회'를 통해 이어진 하나님의 은혜 



임유리(가톨릭대07)




마하반야 바라밀다


초등학교 다닐 때, 또래 중에 주일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자랑하듯 주기도문을 외우면 나는 그에 질세라 반야심경의 앞 구절을 외우곤 했다. 그렇다. 나는 7살 때 동네 큰 절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렸을 때 배운 것들인지라 배웠던 모든 것은 내 기반이 되었다. 유치원 생활 이후로는 부처님 오신 날에 등 하나 켜고 오는 게 신앙생활의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나의 종교는 불교라고 생각하며 20년을 살아왔다.

 

그랬던 내가 청춘이 꽃피는 대학에 들어와서 (비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꺼리는)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가다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만큼 그때의 내 삶은 갈피를 못 잡아 혼란스러웠고 마음은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재수까지 하고 대학에 들어왔건만 막상 대학에 와보니 지난날의 고단함을 보상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대학만 들어가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이전의 생활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이제는 전력질주 할 목표까지 사라진 상태인지라 나는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겉으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지만 매일 밤마다 공허한 마음을 붙들고 눈물 지을 때였다.

 

그러다 우연히 같은 대학교에 다니던 고등학교 동창의 제안으로 IVF에서 하는 신입생 환영 MT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술 한 잔 없이도 즐겁고 천진난만하게 놀고 티 없이 행복한 미소로 나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곳이라면 나도 저들처럼 웃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MT 이후로 소그룹 모임에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사실 성경공부보다는 서로의 삶을 나누자는 제의가 더 반가웠다. 알 수 없는 그 공허함을 털어 낼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새벗 수련회(그때 당시에는 해피 캠프라 불렀다)에 가게 되었다. 사실 그곳에서 뭘 하는지도 잘 몰랐다. 분명 리더 언니들이 설명을 해줬을 테지만, 기독교 문화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나는 들어도 뭐가 뭔지 몰랐다. 그냥 중간에 물총 싸움도 하고 다른 학교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는 정도가 내가 이해한 전부였다.

 

첫 날, 수련회 장소에 들어가니 우리에게 노란색 단체 티셔츠를 입혔다. 유치원 원복 같은 노오란 병아리색 티셔츠였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신입생이라고 적혀있는 듯했다. 우리가 모였던 장소는 형형색색의 풍선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리더들이 일렬로 서서 우리를 열렬히 환영했다. 병아리 같은 단체 티셔츠와 뜨거운 환대는 마치 내가 존재만으로도 사랑을 받을 만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삶의 어느 순간부터 더 어른스러워지기 위해 애썼던 것 같은데. 힘들어도 의연해지려 노력하며 환경이 안 좋을수록 더 이 악물고 살아야 한다는 세상의 메시지를 좇아서 힘들게 살았던 것 같은데, 그 수련회장에서는 그동안 내가 애쓰며 살아온 게 사르르 녹아드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나의 마음은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내 마음을 두드린 순간은 조원들과의 만남과 저녁 말씀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난생 처음 보는 다른 학교 리더 언니 2명과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동급생 친구 1명과 같은 조가 되었다. 우리 조원들은 나는요를 통해 각자의 아픔을 꺼내기 시작했다. 리더 언니들은 학창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 당한 경험과 이혼하신 부모님 아래에서 외롭게 지냈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나누어 주었고, 그런 것 때문에 무너진 자존감이 예수님을 만나고서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 또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리더 언니들의 나눔과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 그날 저녁집회 주제로 다뤄졌다. 저녁집회 시간의 설교 주제는 자기 인생에서의 세 가지 피였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지나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 설교내용을 되짚어보면, ‘세 가지 피란 친구들과 다투며 보았던 피, 부모님이 다투면서 보았던 피, 그리고 그 두 가지 피를 보면서 받았던 상처들을 씻겨주시는 예수님의 보혈이었다. 리더 언니들의 이야기와 간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며 내 모습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부모님은 심하게 다투셨다. 폭행과 욕설이 난무했던 가정환경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나는 늘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비난이 가득한 가정에서 내가 신뢰와 사랑을 배울 리 만무했다. 그런 내가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을 확률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종종 왕따를 당했고, 그때 느꼈던 수치심에 내 자신을 더 가리고 포장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에 와서 느꼈던 허무함은, 대학입시에 몰두하느라 가려졌던 나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수면으로 올라오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리더 언니들처럼 그리고 말씀을 전해준 간사님처럼, 나의 상처와 문제들이 예수님을 만나 해결될 수 있다면 나도 그분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어디 번호표 뽑고 들어가서 만나면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평생을 내 종교는 불교라고 생각했던 내가 이제 와서 종교를 기독교로 바꾼다는 것도 너무 낯설고 이상했다. 마치 저들의 착한 모습에 속아 사이비 종교인이 될 것 같은 얼토당토않은 두려움이 나를 휘감았다.

 

같은 조 멤버였던 동급생과 이런 혼란스러운 마음을 나누었고, 그 동급생은 나에게 같이 기도를 해보자고 했다. 이 친구도 같은 새벗이었는데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 그 친구의 마음에는 기도를 해보면 답이 나올 것 같았나 보다. 셋째 날인가 넷째 날인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야심한 저녁에 불 꺼진 집회실에서 둘이 손을 잡고 기도했다. 나의 첫 마디는 하나님이었다. 그때부터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눈물, 콧물 쏟아가며 겨우 겨우 한마디 더 내뱉었다. “저 많이 힘들었어요.” 머릿속에서는 여러 말들이 생각났지만 북받치는 감정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는 도중에 뭔가 내가 다 안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 뒤로는 더 말할 생각도 못하고 그냥 마구 울었던 것 같다. 이 정도 되면 예수님을 만났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초신자인 나는 쉽게 두려움을 거둘 수 없었다.

 

다음날 리더 언니와 원투원을 하는데 언니가 나에게 물었다. “예수님이 너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며 네가 문 열기를 기다리고 있어. 너는 문을 열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겠니?” 그러나 나는 예수님에게 문을 여는 순간, 내 인생이 내 맘대로가 아니라 예수님 맘대로 마구 휘저어질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다. 두려움에 말을 못하고 있을 때 언니가 말했다. “혹시 예수님이 너의 집을 마구 어지럽힐 거 같아 그러니?” 순간 나는 멈칫했다. ‘독심술이 있는 것인가?’라고 혼자 생각했다. 언니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란다. 너의 집을 더욱 깨끗이 청소해 주시고 네가 더 살기 좋은 집으로 가꿔 주실 거야.” 이미 독심술로 간파 당한 나는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리더 언니는 나와 영접기도문 같은 것을 같이 읽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 소식을 들은 간사님과 지부 리더 사람들 그리고 1학기 내내 나의 소그룹 리더였던 언니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해 주었다. 사람들이 기뻐하니 나도 기뻤고, 지금까지 고민했던 두려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첫 수련회가 막을 내렸다. 물론 그 수련회 이후로 더욱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들이 있었다. 그 시간들은 새벗 수련회와 다르게 아주 빡세고 하드코어한 자기 직면의 연속이었다. 20년을 이방인으로 살아왔으니, 이제 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를 잡아주는 사람들과 말씀이 있었고, 그리고 처음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었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1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거듭났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자신 없을 때도 많다. 하지만 처음 나를 만나주셨던 하나님이 있기에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를 기도하게 만들었던 나의 원가정은 결국 올해 초 부모님의 이혼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동안 부모님의 갈등을 마주할 때마다 수없이 기도했지만, 결국 가족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는 남편을 만나 새로운 믿음의 가정을 세우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가정의 긍정적인 면을 알아가고 배우고 있다. 기존의 가정을 통해서 누릴 수 없었던 평화를 새로운 가정에서 누리고 있다. 나의 친정아버지는 믿음이 없지만, 내가 세워가는 가정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시고 나와 내 가정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을 존중해 주신다. (원래 성경책만 봐도 화를 내시던 아버지의 지난날에 비하면 지금의 이런 모습만으로도 나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느낀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내 동생도 교회를 다니겠다며 이번 주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가족 중에 믿음의 동지가 하나 더 생기게 될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이 상황을 변화시키시진 않는다 해도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분인 것은 분명하다. 나를 주님의 자녀로 품으시고 변화시켜 주님을 알게 하셨듯이, 내 동생과 부모님도 그렇게 변화시킬 것이고 그렇게 주님의 나라가 우리 가족에게도 찾아 올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내 모든 여정의 시작이 되었던 새벗 수련회와 그 수련회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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