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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THE’ 생생한 수련회] 지금의 나를 형성한 수련회 회고록_김용주


 

[소리] 2017년 네 번째 소리- 8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THE’ 생생한 수련회] 지금의 나를 형성한 수련회 회고록

 

김용주 서강대75

졸업 후 5년간 협동간사로 사역했고, 현재는 GLC+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남은경(이화76)과 결혼하여 세 딸과 손자손녀를 두었다. 잡다한 책읽기와 책 구입, 영화보기, 여행, 클라리넷, 골프연습등을 좋아하며 앞으로 글을 조금이라도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소리>에서 다룬 교회기획을 통해 산오름교회를 알게 되어 2016년부터 다니고 있다.




 

수련회와 한국 IVF


나는 19763, 2학년 때부터 19792월 졸업할 때까지 학부 학생으로 IVF 활동에 참여했다. 그 학창시절의 3년 동안 크고 작은 IVF 수련회에 셀 수 없이(?) 참석했다. 큰 수련회란 전도수련회(EC: Evangelistic Conference), 제자도수련회(DGC: Disciple Group Conference)와 같이, 보다 공식적이고 기간도 최대 56일 정도로 길며 전국 또는 권역 단위로 열리는 제법 큰 규모의 수련회를 말한다. 작은 수련회는 큰 수련회의 준비를 위한 조장훈련 수련회, 학교별 수련회 등, 필요에 따라 보통 12일 기간으로 열렸다. 학창시절에 내가 참석한 모든 수련회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고, 197712~197810월 기간에 내가 참석했던 IVF 수련회만 그 예로 들어보겠다. 이렇게 많은 수련회에 참석했던 이유는, 내가 특별히 열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에 어느 정도 성실한 IVF 리더라면 대체로 참석하던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1977

12.26.~12.30.

겨울 전도수련회 (용인 낙원수양관)

1978

02.08.~02.10.

02.15.~02.18.

03.24.~03.25.

06.06.

07.10.~07.14.

08.19.~08.20.

09.01.~09.02.

10.27.~10.28.


부산 개척수련회 (부산 동래 미화농원)

겨울 제자도수련회 (임마누엘수도원)

서강대 부활절/신입생환영수련회 (서울기도원)

여름 전도수련회 조장훈련수련회 (서울기도원)

여름 전도수련회 (용인 낙원수양관)

79그룹(79년 졸업생) 수련회

서강대 리더수련회 (서울기도원)

겨울 제자도수련회 조장훈련수련회 (임마누엘수도원)

 

이 기간은 한국 IVF의 역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1977년 여름, 한국 IVF는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그때까지 해오던 주일회관모임방식을 포기하고 그해 2학기부터 주중 온캠퍼스모임방식으로 운동 전략을 전 환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주일회관모임(서울지역의) 모든 IVF 학생들이 오전에는 각자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주일 오후에 IVF (서울)회관에 함께 모여서 예배와 성경공부, 기도회를 하는 방식이었다. ‘주중 온캠퍼스모임은 주중에 각자의 캠퍼스로 흩어져 각 캠퍼스의 상황에 맞게 전도, 예배, 성경공부, 기도회 등을 하는 방식이다.

 

애초에 주중온캠퍼스모임이 진정한 IVF의 운동철학 온캠퍼스(on campus)와 학생자발성에 부합되는 운동 전략인데 그때에야 비로소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모임 방식의 갑작스런 전환으로 그해 2학기는 IVF 학생들에게 매우 힘든 시간이 되었다. 어떤 캠퍼스는 모임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하였으나, 살아남은 캠퍼스는 제대로 된 모임이 세워져서 학생자발적인 리더십으로 성장하여 캠퍼스에 자리 잡았다.

19772학기 이후 수년간의 수련회, 특히 방학 중에 하는 큰 수련회들은 한국 IVF의 온캠퍼스운동 전략이 잘 뿌리내릴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었다. 큰 수련회는 각자의 캠퍼스로 흩어져 고군분투하던 멤버들이 모처럼 함께 모여서 그 분투의 열매(전도 또는 제자훈련의 열매)를 확인하고, 감사하고, 격려와 위로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캠퍼스와 다른 캠퍼스로의 확장을 위해 다음 학기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온캠퍼스 운동의 정착으로 이후 한국 IVF는 양적으로나 질적인 면에서 획기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제 나의 학창시절 수련회가 나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먼저 살펴보고, 나의 신앙과 인생 여정에서 큰 의미와 영향을 주었던 두 수련회를 회고해보겠다.



 

학창시절의 수련회는 책읽기와 같다


나는 책읽기를 좋아한다. 장르를 별로 가리지 않으며 잡다한 주제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읽을 때에는 자주 밑줄을 긋고 표시도 한다. 좋은 구절은 책 뒤편 내지에 메모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 내용을 따로 노트에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는 않는다. 다만 읽으면서 그때그때 표시할 뿐이다. 가끔씩 표시한 부분만 찾아가면서 대충대충 되새김질하기도 한다. 어떤 책은 시간 간격을 두고 여러 번 다시 읽기도 한다. 그때마다 처음 읽는 기분이 든다.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세부적인 내용(문장, 낱말 등)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느덧 그 책이 나의 정신과 영혼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처한 환경과 분위기에 따라 같은 책이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학창시절의 수련회는 나에게 마치 책읽기와 같았다. 그 시절의 수련회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수련회 체질(?)은 아니었다. 몸이 약하기도 했고 다소 내성적인 기질 상 여러 날 동안 24시간 내내 나를 다른 사람들 앞에 노출하는 것이 힘들었다. 이유 없는 피로감이 한 번씩 몰려왔다. 게다가 나의 회심은 수련회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학기 중에 했던 IVF 성경공부와 기독교서적(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 펄 리틀의 이래서 믿는다) 읽기를 통해서였다. 이런 책을 읽다 보니 어느덧 내가 구원을 확신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2학년 때의 일이었다.

 

비록 수련회가 나에게 회심의 경험을 주지는 않았지만, 내가 참석했던 많은 수련회는 훌륭한 텍스트가 되어 나의 신앙을 자라게 해주었다. 여러 가지 책을 읽듯이 그 많은 수련회가 나에게 다양한 텍스트가 되어주었다. 수련회에서 피로감을 느끼긴 했지만, 동시에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의 회심과 변화, 분위기, 강해 설교, 성경공부, 강의, 간증, 찬양시간과 찬양의 가사, 즐거운 촌극시간, 캠프파이어, 크고 작은 에피소드, 결단의 시간, 물놀이, 심지어 오후의 낮잠시간 등등, 수련회에서 함께한 그 모든 것들이 학창시절 나의 신앙을 이루는 데 책읽기만큼이나 도움이 되었다고 믿는다. 수련회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내게 일어났던 그 많은 일들이 다양한 텍스트가 되고, 등장인물이 되고, 삽화와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세부적인 것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어도 지금의 나 자신을 형성하고 나의 신앙을 이루는 데 크게 유익한 재료들이 되었다. 책읽기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재료들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가장 큰 그림(또는 큰 책)의 일부를 이룬 것이다.

 



수련회#1 거듭남의 감격

 

때는 바야흐로 4학년 여름방학이었던 1978710()~14(). 용인 낙원수양관에서 도피하는 현대인이라는 주제로 여름 전도수련회가 열렸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때는 19772학기에 온캠퍼스모임으로 전환한 지 약 1년이 되는 시점이었는데, 전환하기 이전보다 수련회 참석자가 많아져서 각 학교의 리더들과 간사님들은 상당히 고무된 상태였다. 전환 후 처음으로 1학기를 맞아서 학생 자발적인 리더십이 자리를 잡은 학교에서는, 신입생 전도와 유치 그리고 재학생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각 학교에 새로운 멤버들이 갑자기 많이 들어오는 바람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을 감당할 새로운 리더들을 양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수련회의 주요 내용으로는 송인규 간사님의 이사야서 성경강해, 그리고 여러 특강(강사: 권영석, 정옥숙, 주상윤 간사)들이 있었다. 이 수련회에 총 210명이 참석했으며, 이들 중 30명 이상이 거듭나는 열매를 맺었다. 나는 4조 조장이었고 우리 조원은 모두 8명이었다. 나와 부조장이었던 조한미(동덕3), 유영미(연세1), 양능우(성심1), 김남영(연세2), 이경희(숙명3), 오창건(고려1), 김미현(경희의3)이었다. 우리 조는 4명이 불신자였는데 성경공부와 일대일 면담을 통해 모두 예수님을 영접했다. 특히 두 자매가 조한미 자매의 인도로 마지막에 결신하게 되었다.

 

이 수련회에는 불신자 친구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예수를 영접하기로 결단했다. 마지막 밤에는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앞에 나와서 자신의 결단에 대해 간증하고 새로운 믿음을 공개적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격려를 받은 이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지난 1년 동안 각자의 캠퍼스에서 변화된 새로운 전략에 맞춰 애쓰며 학생 리더십을 일으켜 세웠던 각 학교의 멤버들과 리더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칭찬받고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무엇보다 이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결신자들이라는 열매와각 캠퍼스 모임의 양적, 질적인 성장을 통해 그동안의 수고를 인정하시고 갚아주신다는 사실에 모두들 감격했다.

 



수련회#2 나만의 여인을 만나다

 

나는 1979년에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협동간사로 사역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번에 얘기할 수련회는 학창시절의 수련회는 아니고 협동간사 초년시절의 수련회다. 바로 제 1IVF 동계선교수련회로, 198017()~12()에 경기도광주 충현 기도원에서 개최되었다. 주강사는 이동원 목사(히브리서11장 강해)였고 강사는 조동진 목사(선교 특강)와 하도례 목사(평신도 선교)였으며, 간사 특강은 주상윤 간사(불신 친구)와 현수일 간사(시간 사용), 박영덕 간사(장래 문제), 김용주 간사(이성교제)였다. 학생은 130(불신자 10여명 포함)이 참석했다.

 

나는 학생이 아니라 간사로서 학생들에게 캠퍼스에서의 이성교제에 대해 강의를 하게 되었다. 강의내용은 나의 연애와 실연의 경험, 성경적 지침, 선배의 조언, 미국 IVF 자료의 내용 등을 버무려서 정리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강의 내내 초집중해서 듣느라 자신들이 열기에 들뜬 것도 잊고 있었다. 거기에다 추운 날씨에 실내에 피워놓은 난로의 열기까지 더해서 강의가 끝났을 무렵에는 다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졸업직전까지 2년여 동안 한 여학생과 연애를 하다가 실연을 당했다. 언급한 이성교제 강의를 하기 1년 전쯤이었다. 수련회가 시작되는 스산한 월요일 저녁, 나는 마장동 버스터미

널에서 수련회 장소가 있는 경기도 광주행 완행버스에 올라탔다. 맨 뒷줄 좌석 중앙에 앉아서 버스가어서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객이 거의 없는 버스의 맨 앞쪽을 멍하니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때 운전석 맞은편 앞문으로, 일행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동시에 버스에 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몸

을 돌리며 내가 있는 쪽으로 얼굴을 향하는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아우라를 보았다. 나흘 후 그녀는 내가 했던 이성교제 강의를 들었다. 다섯 달 뒤 나는 그녀의 직장이 있는 도시로 그녀를 찾아가서 만났다. 나는 지금 그녀와 삼십 오년 째 만족스런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에게서 세 딸이 태어났고 손자손녀까지 얻어, 나는 행복한 남편이자할아버지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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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월 둘째주 IVF학사회 소리지 업데이트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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