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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THE’ 생생한 수련회] 폭우와 함께 부어주신 은혜, 1993년 여름수련회_한종무

[소리] 2017년 네 번째 소리- 8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THE’ 생생한 수련회] 폭우와 함께 부어주신 은혜

1993년 여름수련회

 

한종무 동의대90

자칭 IVF의 돌연변이. 돌연변이도 모태가 같을 수밖에 없다며 IVF 학사임을 강조하며 살고 있다. 부산 IVF의 가장 아팠던 손가락 중 하나인 동의대 출신이다. 동의대는 90년에 개척을 시작했으나 94~95년을 거치며 활동이 없었고, 96년에 재개척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13년에 귀농한 어설픈 농사꾼. 수확철이 되면 IVF 스승들과 학사들을 괴롭혀 여러 가지 농산물을 강매(?)한다. 이와 함께통일 운동과 북한 연구를 병행하고 있으나, 운동과 연구 성과는 전무하다.

 

 



1993년 여름수련회를 앞두고

 

19912학기, IVF‘6개대 사태라는 큰 몸살을 앓았다. 내가 IVFer가 맞긴 했나 보다. 그 후유증이 오래 갔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끙끙 앓았다. 내가 속해 있던 동의대 IVF1990년 개척을 시작한 이후 2~3년 동안 놀라운 자발성과 운동성을 보여주어 다른 지부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나, ‘6개대 사태와 한기연의 분리 이후 부산지방회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간사님들과 성실한 다른 지부의 눈치를 봐가며 겨우겨우 IVF 생활을 연명하던 중에, 1993년 전국수련회 소식이 들려왔다. 주강사가 무려 존 스토트 목사님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존 스토트라니!

 

멀리 영국에 살고 계신, 사진으로만 본 적 있는 이분을 자신의 혈육처럼 가까이 여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는 신입생 때부터 간사님과 선배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당시 나는 지부에서 문서담당자였는데, 서적전시회에서 이분 의 저서를 언급하지 않았다가는 문서담당자로서의 역량이나 심지어는 IVFer로서의 정체성을 의심받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갖은 고난(?)을 겪으며 IVF에서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내가 IVF를 포기하지 않도록 한 데에는 존 스토트 목사님이라는 존재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1993년 여름수련회만큼은 무조건 참석해야 했다. 수련회 수개월 전부터 우리 지부 모두 참석해야 한다며 동생들을 협박하기도 했다.




 

출발과 시작, 만남

 

그리하여 당시 3학년이었던 나는 수련회에 참석했다. 개회예배 순서 중 하나를 맡은 풍물패 일원이었고, 소그룹 리더였다. 따라서 당일이 아닌 하루 전에 선발대로 출발했다. 수련회가 열리는 연세대 원주캠퍼스는 부산에서 아주 멀게 느껴졌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었고 낯선 곳을 여행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데 다른 공연을 준비하던 어떤 선배와 함께 출발했다.

 

수련회 당일, 부산지역 IVF 학생들을 태운 버스가 수련회 시작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수련회준비모임을 하며 함께 연습한 부산지역 IVF 풍물패를 데리고 공연장에서 리허설도 마쳤다. 그다지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으나 농활을 통해 단련된 부산지역 풍물패는 다행히도 수련회의 시작을 흥겹게 열었다. 공연을 보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그냥 온 몸이 땀에 젖도록 신명나게 놀았다.

 

개회예배에서 우리는 주제찬양을 불렀다. 바로우리가 이 땅에 그루터기라!”였다. 그랬다. 동의대 지부와 나에게 IVF신명의 존재였고, 동의대 IVF와 나는 그루터기와 같은 존재였다. 풍물공연을 하면서 4년간 지속해온 IVF 생활의신명을 고백했다면 주제찬양을 하면서 나와 동의대 IVF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우리의 상황을 놓고 기도했다.

 

수련회 핸드북을 받았다. “IVF 전국 선교수련회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제목이 왜 이렇게 어색하지? 예전처럼 그냥 IVF 전국수련회라고 하면 안 되나?’라는 의문이 생겼다. 수련회에 선교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이 IVF의 방향성에 쐐기를 박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것 역시 6개대 사태의 후유증이었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자고 내 마음을 다스렸다.

 

드디어 첫 조별모임! 수련회 때마다 정말 기대가 되는 시간이 바로 첫 조별모임 시간이다. 전국수련회라서 더욱 그랬다. 사람 만나고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게 나의 천성이라 전국에서 모인 IVFer를 만나니 가슴이 뛰었다. 이 글을 위해 그때 핸드북을 다시 살펴보았다. 핸드북에는 5명의 조원이 적혀 있지만, 정확히 조원은 6명이었다. 모두 92, 93학번 형제자매들이었다. 김희은(대구대 치료특수교육학과 93), 박윤주(고신대 식품영양학과 93), 전미순(울산대 일문학과 92), 이복현(강원대 축산학과 92), 이상한(영남대 토목공 92), 성명미상의 자매(동우대 간호학 92~93). 지금은 이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풋풋하고 신실했던 그들의 이미지가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보통 수련회에서 내가 조장이 되면 처음에는 조원들이 나를 매우 힘들어 한다. 왜냐하면 조원이 한명이라도 늦으면 밥도 안 먹었고 말도 많았기 때문이다. 조장은 잘 들어줘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 우리 조원들은 하루 만에 나를 편하게 혹은 만만하게 대했다. 까다로운 성격이 아니고 노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 조(307)와 함께 했던 형제자매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 글을 쓰 있자니 많이 궁금하다.



 

주제강해, 존 스토트 목사님

 

수련회의 백미는 아무래도 강해 설교 시간이다. 책으로 읽었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사상을 직접 들으며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설교는 책의 내용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책으로 읽는 것과 직접 만나 듣는 것은 달랐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 사회의 문제와 기독교의 답변, 자유주의자와의 대화그리고 그가 일부 관여한 로잔언약 ⅠⅡ」등이 내가 접했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저서다. 그가 쓴 저서와 문서는 근본주의적이고 편협했던 신앙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며, 복음주의 신앙으로 삶의 방향을 일러준 나침반과 같았다.

 

이 수련회는 주강사가 존 스토트 목사님이라는 것 때문에도 여러 사람의 기억에 남았지만 또 하나는 바로 날씨였다. 수련회 내내 날씨의 변덕이 심했다. 장마철이라 덥고 습했으며 때로는 비를 맞아서 추웠다. 특히 강해설교 시간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때 맞춰 내리는 비는 설교를 듣는 데 방해가 되었다. 우리는 노천극장에 앉아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고 설교를 들었다. 중요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갑자기 폭우가 내리기 시작하자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사님 : 여러분, 설교를 마칠까요?

회중 : NO!!!!

목사님 : 여러분은 나를 매우 놀라게 하는군요. 다른 나라에서는 설교하다가 이런 상황이 생기면, 학생들이 설교를 듣다 말고 그냥 흩어진답니다. 자연스럽게 설교가 끝나요.

 

이러한 상황이 두 번 정도 반복됐다. 비를 맞으며 설교를 듣는 우리가 목사님은 많이 안쓰러웠나 보다. 나는 조원들과 함께 앉아 설교를 들었다. 비를 맞아 한기가 들어 힘들어 하는 조원들에게 평생에 한번 만나기 힘든 인물로부터 듣기 힘든 설교를 듣는 거야. 조금만 힘내자라며 독려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도 끝까지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몸살이 나서 다음날 프로그램이나 모임에 빠지는 사람도 생겼다. 하루의 모든 프로그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모두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고, 신발까지 모두 젖어서 양말을 벗으면 숙소에 악취가 진동했다. 다른 수련회 같았으면 취침 전까지 노는 분위기였겠지만, 이때는 다들 피곤해서였는지 빨리 잠들었다.

 

셋째 날인가 넷째 날인가, 점심식사 후 자유 시간에 존 스토트 목사님이 학생들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내시겠다고 했다. 가까이서 대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참석자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하고 갔으나 생각보다는 적었다. 나는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다 .

 

: 연세에 비해 건강해 보이시는데, 평소에 어떻게 건강을 관리하십니까?

목사님 : 요즘 몸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많이 먹지 않습니다. 아침에 과일 몇 조각과 우유를 먹고,

수 있는 대로 적게 먹습니다.

: .

 

한두 시간 정도로 기억되는 대화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여러 질의응답은 강해설교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쓴 저서의 내용과 다르지 않았으나, 확고했다. 복음주의 신앙의 중요성과 이 신앙이 결코 편협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같았으면 같이 사진이라도 찍었을 텐데 아쉽다.

 

저녁강해 설교가 끝나면 기도회 시간이 이어졌다. 비오고 습하고 심지어는 춥기까지 한 상황에서 예정보다 기도회가 길어졌다. 회중들의 분위기가 설교를 들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설교 시간은 잘 인내하다가도 기도회가 길어지면서 불만의 목소리도 나왔다. 기도회를 마치고 숙소로 가는 길에 비를 쫄딱 맞은 한 사람이 불만을 쏟아냈다. “기도회 좀 빨리 끝내 주지. 간사님들 너무해!” 나는 거기에 맞장구를 치며 맞아, 간사님들이 갈수록 모 선교단체와 비슷해지는 것 같아!”라고 받았다. 성숙한 설교에 미성숙한 적용이었다. 나는 학창 시절을 그렇게 보냈고, 여전히 그렇다. 그래도 환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요즘도 나 같은 환자가 캠퍼스에 분명히 존재할 텐데, 이런 사람들을 위해 애쓰시는 간사님들의 수고와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청년 정신을 배우고, 청년 정신으로 놀다

 

그 수련회에서 권영석 간사님의 주제 강의 또한 기억에 많이 남는다. 제목은 복음의 능력과 우리의 대학, IVF 운동의 역할이었다. 잘 정리된 지식과 역사의식, 시대를 읽어 내는 능력이 돋보이는 강의였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설교보다도 기억나는 것이 많다. 핸드북을 펼쳐 봐도 여러 강의 가운데 가장 열심히 메모가 되어 있다. 간사님의 강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보편적이면서도 젊은강의였다. IVF를 시작할 때 받았던 도전을 다시 떠올렸다. 보수나 진보, 전도와 사회참여를 떠나서 나의 좁고 편협한 시야를 깨뜨리고 넓혀 주었다. 강의를 듣고 나의 절친 이성현(동아대 90)과함께 피드백을 나누었는데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 강의 이후 권영석간사님을 기억하고 있다가 페이스북을 통해 페친이 되었고, 2~3년 전 쯤에는 직접 뵙기도 했다. 선교단체 축구 대회가 있어서 여러 간사님들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선수로 뛰고 계셨다. 가끔 권영석 간사님의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는데 여전히 청년 정신을 지니고 계시고 몸도 젊으신 것 같다. 그 수련회로부터 20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공동체 한마당에 대한 기억도 남아있다. 계속 비가 와서 진행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날씨가 좋아져서 함께 노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비가 온 탓에 운동장 상태는 엉망이었고 참석자들은 적극적이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동체 한마당 행사는 진행되었다. 그런데 차전놀이를 하던 중, 우리 지부의 새내기 최무훈(이후 부산외대로 편입하여 계속 IVF를 함)이 대장으로 동체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아찔한 사고가 났다. 높이와 떨어지는 모양새로 봐서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지켜보던 모든 간사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멀리 있던 나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오랜만에 열린 전국 IVF 행사를 중상자로 인하여 망칠 뻔했으나, 최무훈 형제가 유연했는지 비가 와서 땅이 물러서였는지 크게 다치지는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행사를 하면 잘 놀아야 하고, 그에 앞서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후, 나는

 

1993년 여름 수련회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석한 전국 수련회다. 존 스토트라는 귀한 분이 주강사로 오셔서 말씀을 전해 주셨고, 여러 간사님과 목사님들로부터 좋은 강의를 들었으며, 조별모임을 하며 짧지만 아름다운 만남을 누렸다. 편안한 잠자리와 좋은 먹을거리도 누렸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당시에도 어린 IVFer들이 자라는 것을 돕기 위해서 보이지 않은 곳에서 섬기는 간사님들이 계셨다. 나이가 들고 아는 것이 생겨 돌이켜 보니, 수련회를 진행하는 것이 영육 간에 얼마나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작은 수련회도 그러한데 전국 수련회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예상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철저하게 준비하고 열악한 기상조건과 부족한 상황을 이겨내면서 수련회를 진행하셨듯이 간사님들은 각 지부의 IVFer들을 양육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당시 우리 동의대 지부를 맡았던 박철진 간사님을 비롯하여 부산지역의 김성식 간사님, 문춘근 간사님, 지성근 간사님, 전태영 간사님, 박태선 간사님,여진경 간사님, 정수애 간사님, 서진미 간사님 등 대부분의 간사님은 지금도 내가 스승으로 모시고가끔 연락하며 지낸다. 부산지역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 스텝으로 뛰었던 김종호 간사님, 신현기 간사님, 이철민 간사님, 신응종 간사님은 당시에는 서로모르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알게 되어 만나면 기쁘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산다. 아울러 존 스토트 목사님은 1993년 전국수련회를 통하여 한국 IVF의 중심을 잡아 준 큰 어른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당시에 수련회를 섬겼던 간사님들 또한 앞으로 IVF의 중심을 잡아 줄 어른이 되실 분들이고 이미 그 역할을 하고 계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분들은 그때의 존 스토트 목사님보다 훨씬 젊다.

 

1993년 당시의 IVF는 어려운 시기를 겪어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철이 없어서 간사님들을 무던히도 힘들게 했다. 애먹이던 자식과 제자가 나중에는 더 잘한다던데, 20년이 지나고 중년이 다 되어서도 나는 이 모양이다. 뭐라도 보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염치 불구하고 아직도 스승님들께 배운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만 말씀드린다. 여전히 부족한 나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는 믿음이 있다.“밤나무, 상수리 베임을 당해도 우리가 세상의 그루터기라는 것, 복음의 발걸음이 땅끝까지 끝날까지 이어지리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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