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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F/IVP

세상에 대한 신학, 삶을 위한 신학 - 김종철




세상에 대한 신학, 삶을 위한 신학 - 김종철  

   

 


삶을 위한 신학

저자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출판사
IVP | 2014-04-0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지성에게 듣는 현실과 맞닿은 신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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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스무 살 무렵에 기독교 


대학에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나이 스물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기독교를 합리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기독교는 흔히 합리성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말해지곤 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어 복음주의의 세례를 받으면서 그동안 내가 가졌던 입장이 비판받아 마땅한 반지성주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나의 과제는 기독교가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탐구하고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책은 상당 부분을 기독교의 합리성에 대해 할애한다. 

아니, 이 책에서‘신학’이란 말은‘기독교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저자는 기독교가 합리적인 이유를 “우리가 태양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태양으로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다”라는 C. S. 루이스의 유명한 비유를 따라, 기독교적 관점에 의할 때 세상이 더 잘 설명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손전등의 성능은 깜깜한 밤에 켜 보았을 때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물을 비추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즉 빛이 얼마나 밝은지는 빛을 내지 않는 사물에 비추어지는 밝기에 의해 평가되는 것처럼, 어떤 세계관의 합리성은 그것으로 세상과 인간이 얼마나 잘 설명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회심의 한 요소는 우리가 세상을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에 빛이 비추어져서 다른 관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든(C. S.루이스), 우리의 인지 기능이 치료되어 돌이 금이 되는 것처럼 변화되었기 때문이든(조지 허버트) 말이다. 

기독교의 관점에 의할 때 어떻게 세상을 더 잘 볼 수 있는가? 저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후에 그 세상 속에 두셨기 때문에“기독교 신학이 지시하고 확언하는 세상에 대한 관점이 실제로 관찰된 것과 상당히 만족스럽게 조화”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이 근대 과학의 기초가 되었고, 무신론적 진화론의 결정적인 한계인 인간의 정신과 자연 질서 사이의 조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존 폴킹혼). 






내 나이 서른 즈음에 기독교 


나이 서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적 관점에 의할 때 세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좋은 신학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기독교의 합리성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우리의 정통적인 가르침 모두가 합리성이라는 기준을 통과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서른 살이 넘어서 알게 된 것은 경건주의든, 복음주의든, 자유주의든 계몽주의 내지 모더니즘이 설정한‘합리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기적과 같은 기독교의 일부분을 떼어 내더라도 계몽주의가 설정한 합리성에 기독교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시도였고, 복음주의는 계몽주의가 설정한 합리성에 의하더라도 기독교가 합리적이라고 하는 사실상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진행시킨 것이었으며, 경건주의 역시 계몽주의의 합리성에 대한콤플렉스로 인해 반지성주의로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계몽주의가 설정한‘합리성’자체가 문제였다. 자신도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 기준에 부합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을 통과한 지식이라는 것은 거의 의미 없고 쓸모없는 그런 것들이었다. 기독교의 합리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합리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누구의 합리성인가?”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의 합리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계몽주의가 말하는 합리성의 기준은 옳지 않다. 합리성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고, 새로 정의된 합리성에 의할 경우 기독교는 합리적이다’라는 전제에서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단어 선택에 있어서 아주 조심스럽다. 기독교 세계관과 세상의 존재 방식이‘부합한다’고 하지 않고, 그 둘 사이에‘조화가 있다’고 하거나, 기독교적인 관점에 의할 때 이 세상이 잘‘설명된다’고 말한다. 죄가 많아 인지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다가 원래부터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아무리 회심을 했다 한들 어떻게 세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성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합리성은 그러한 세상의 존재 양식에‘부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더 잘 설명’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지도가 산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산을 잘 설명하고 등반을 더 잘하도록 도우며 여러 지도끼리 비교가 가능하듯 말이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도킨스 등의 소위 공격적인 무신론에 대한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그 비판의 핵심은‘너희는 기독교가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합리성이라는 기준 자체가 이미 폐기 처리된 계몽주의의 합리성이고 그 엄격한 합리성의 기준에 의할 때에는 너희도 비합리적인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내 나이 마흔 즈음에 기독교 


나이 마흔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 신학은 세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신학은 자연의 아름답지만 동시에 추한 모습을 설명할 수 있고, 선뿐만 아니라 폭력과 파괴, 고통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제대로 된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양면성을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흔 살이 넘어서는, 현실이 기독교 신학을 포함한 다른 어떠한 이론으로도 깔끔하게 포섭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고난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 더욱 그러하다. 가라앉는 세월호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죽어간 아이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신학은 세상을 잘 설명할 뿐 아니라 삶을 잘 살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점점 깨닫고 있다.


 저자는 앞에서 말한 계몽주의의 합리성이 아닌 소위 비판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기독교의 합리성을 설명하지만, 마르틴 루터와 시몬 베유의 통찰을 언급하면서 세상을 설명하는 것에 있어서 기독교 신학의 한계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 신학자는 이해와 독서와 사색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과 죽음과 저주받는 것을 통해 만들어진다”,

“ 십자가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을 때 느끼는 절망을 보여준다”,

“ 이 세상의 경험들은 종종 하나님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는 신학이 거의 쓸모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고난에 관해서 보자면, 기독교 신학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 고난을 경험하고 죽음에 동참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말대로“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보면 신체적 야만성·심미적 누추함·개념적 모호함·영적인 혼란을 느끼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밀한 임재와 활동을 확신”할 수 있다. 이제 좋은 신학이란 어떤 것인지 분명해진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신학을 이해해야 할 것인지가 분명해진다. 좋은 신학은“세상을 해석하고 그것의 질서와 수수께끼를 이해할 수 있는렌즈”를 제공한다. 그러나 동시에 좋은 신학은 그것을 통해“우리가 어둠과 절망을 통과하여 삶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우리의 인식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