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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교회, 국가의 양심이 되어주길_최삼열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 구석구석에 소금과 빛이 된 교회의 손길이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의 이미지는 끝도 알 수 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공공성 회복,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저 멀리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펼쳐내어야 하는 가치입니다. 내가 아닌 특별한 누군가가 추구하고 노력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주위를 둘러보시겠어요? 나는 이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시31:2) @네팔 (ⓒ이재웅)


광장 속의 기독교

  •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
  • 교회, 국가의 양심이 되어주길
  • 내 삶에서 실현되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 정보 공개를 통한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꿈꾸며



교회, 국가의 양심이 되어주길






블랙홀 교회 


기관이나 개인이 후원 요청을 할 때 겪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특히 교인들을 상대로 할 때 어려움은 더욱 커진다. 교회에 헌신된 교인일수록 후원에 인색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후원 요청에 거절당하는 것이야 흔한 일이고, 당연히 요청하는 기관이나 사람이 더 애써야 할 부분이 많은 법이다. 그러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후원이나 사업 참여 요청을 할 때 거절당하는 이유와, 교인들이 거절하는 이유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부를 하지 않는 이유는 ‘돈 달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not asking). 우리나라 통계청이 발표한 <국민나눔실태>에 나온 기부 미참여 이유를 보면, 연령대가 높을수록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라고 응답한 비중이 크고 젊을수록 ‘기부단체 불신’ 항목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그런데 교인들의 경우는 어떨까? 아마 ‘이미 많은 기부를 하고 있어서’ 다른 곳에 기부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가장 높게 나올 것이다.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 외의 다른 곳은 ‘믿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필요 없다고 믿기’ 때문도 높게 나올 것이다. ‘이미 너무 많은 기부를 하고 있어서’라는 이유는 기부 미참여 이유 중에서도 아마 가장 독특한 케이스일 것이다. 


실제로 교인들은 교회에 어느 정도의 헌금(기부)을 하고 있을까? 2013년 정재영 교수는 ‘한국교회미래를준비하는모임’의 자료에 근거해 우리나라 교인들은 1인당 연평균 150만 원, 교인 전체적으로는 연간 약 6조 원에 달하는 헌금을 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2013년에 조사하고 발표한 다른 자료에 따르면, 교인들은 월평균 약 22만 원의 헌금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간으로 따지면 1인당 264만 원이다. 같은 계산법으로 하면 교인 전체적으로는 연간 약 10조 5천억 원의 헌금액이 나온다. 전수조사 통계가 아니라 오차가 크지만 대개 개신교인들의 헌금액은 6조에서 10조 사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연간 기부총액은 어느 정도일까?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4 국내 나눔 실태 결과>에 따르면, 2013년 국세청에 신고된 개인 기부총액은 7조 8,300억 원이다. 교인들의 연간 헌금 추정치가 국민 전체의 기부총액과 맞먹거나 오히려 상회한다. 교인들이 어느 정도의 헌금(기부)을 하고 있는지 이제 실감이 나는가? 교인들은 이미 ‘충분히’, ‘힘에 지나도록’ 헌금(기부)을 하고 있다. 세상이 ‘1% 나눔운동’을 펼치기 오래 전부터 교회는 ‘십일조(수입의 10% 헌금)’를 강조하고 실천해 왔다. 


문제는 교인들의 헌금(기부)액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오직 교회에만, 그것도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에만 하는 것이 문제다. 더 나아가서 교인들의 모든 ‘가처분 기부총액’을 흡수해서는 절대 내뱉지 않는 블랙홀과 같은 교회가 문제다. 교회는 국민 전체의 기부총액에 맞먹는 헌금을 투명하게, 건강하게, 전략적으로 사용할 책무가 있다. 만약 교회가 이 역할을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비약적으로 개선될 것이다. 




이사로 가득 찬 교회 


교인들의 헌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기 위해 다른 비교를 한번 해보자. 대개의 기독교 단체들은 후원자를 모집하여 그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후원자들은 월 1만 원 이상의 정기후원을 요청받는 경우가 많으며 매월 정기 자동이체를 위해 CMS 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액 정기 후원자들만으로는 단체의 운영비와 사업비를 충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사들이 납부하는 이사회비도 큰 도움이 된다. 비영리단체 이사회의 역할이 후원금 납부에만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 기독교 단체들의 현실상 이 부분이 도드라지고 있다.


기독교 단체 이사들의 이사회비는 어느 정도일까? 단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월 10만 원~15만 원 사이다. 20만 원 이상을 요청하는 곳도 있지만, 월 5만 원의 이사회비를 요청하는 단체도 있다. 이사회비가 많다고 느껴지는가? 자, 그럼 위의 헌금액과 비교해 보자. 우리나라 교인들의 연간 헌금액을 기독교 단체에 적용하면 그 단체의 이사급에 해당한다. 이 말은, 교인들이 교회에 헌금하는 금액을 다른 기독교 단체에 후원(기부)하면 그 단체에선 당장 그 사람을 (후원)이사로 영입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매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불경하게도(!) 사람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앉아 있는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등을 관찰하곤 한다. 그러다 어느날 눈길이 헌금하는 시간에 멎었다. ‘단체들은 정기적으로 월 1만 원이라도 후원하는 후원자 한 명 얻기가 그렇게 힘든데, 교회에는 매주 자발적으로 헌금하는 사람들이 그득하구나!’ 그 순간 헌금액 계산이 되면서 앉아 있는 교인들이 모두 이사들처럼 보였다. ‘교회는 이사들로 가득 차 있다.’


교인들이 헌금을 교회에 하지 않고 다른 기독교 선교단체나 사회단체에 한다면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교인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모른다. 평범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환경에 가면 각 단체의 이사에 해당하는 재정적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 기독교 단체의 실무 직원의 급여를 받고 살았던 나 같은 사람도 다른 단체의 이사로 섬길 수 있었던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헌금(기부) 행위야말로 성도가 자신의 믿음과 신학을 주도적으로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영역이다. 습관적으로 예배시간에 헌금을 내는 것으로 자신이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헌금이 어디에 어떤 일로 쓰일지 주체적으로 선택할 것인가. 


왜 이상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단체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 존속하는지, 왜 뜻 깊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단체는 늘 힘들고 어려운지 생각해 보자. 대개의 경우 돈이 몰리는 쪽이 존속하고 돈이 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지속하기 어려운 법이다. 천동설 수준의 젊은지구론을 주장하는 단체가 왜 존속하는 것일까? 큰 교회들이 앞장서서 후원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헌금한 돈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 단체에게 흘러갈 수 있다. 교회에 헌금했으니 교회가 알아서 잘 할 거라는 생각은 순진하다 못해 심각한 직무유기일 수 있다. 잘못 사용한 교회가 일차적으로 책임이 크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매개기관으로서의 교회 


개인이 자신의 헌금(기부) 행위를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과 더불어 교회의 역할도 중요하다. 사실 교인이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헌금하고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일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개개인이 여러 다른 단체의 활동을 일일이 살펴서 기부하고 참여하기란 현실적으로도 쉽지 않다. 교인이 자신의 가처분 소득과 시간을 교회에 헌금과 봉사라는 명분으로 맡겼다면 교회는 그것들을 모아서 효과적으로 사용할 책무가 있다. 교회가 이 책무를 잘 감당할 수만 있다면 교인들은 한결 수월해 진다. 교회를 단일창구로 여겨서 돈과 시간을 맡기면 된다. 


일반 사회에선 이런 역할을 하는 단체를 ‘배분기관’ 혹은 ‘중간지원조직’으로 부른다. 일반 시민들이 도움이 필요한 곳을 일일이 찾아가서 기부할 수 없으니 대표창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기부를 하면 그 단체가 도움이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배분해 주는 모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직접 사업을 하기 보다는 여러 필요한 사업을 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을 대신해서 모금, 조사연구, 지원 사업을 하기 때문에 중간지원조직이라고도 한다. 사랑의열매로 잘 알려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아름다운재단이 대표적인 배분기관, 중간지원조직이다. 나는 교회가 이런 배분기관, 중간지원조직과 같은 매개기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돈과 시간이라는 교인들의 자원(resource)을 블랙홀처럼 끌어당겼다면 그것을 공공의 선을 위해 재분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위해 그 자원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에만 교회는 그 자원을 맡을 자격이 있다. 교회가 곧 하나님나라는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교회 그 이상이다. 따라서 교회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공동선(common good)을 위해 협력하고 지원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합당한 쓰임이다. 교회가 자산(assets)과 자원(resource)을 한시적으로 맡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그것이다. 


교회가 거룩한 매개기관을 자임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소모하거나 혹은 직접 사업을 시도하려고 하는 경우 그 소임을 잃게 된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이 두 가지 극단에 치우쳐 있는 것 같다. 내부적으로 퇴행하지도 않으면서 직접 나서려고 하는 욕심도 자제하는 것, 나는 이것을 희생과 용기라고 부르고 싶다. 전자는 용기가 필요하고 후자에는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선교든, 지역사회 복지든, 공공의 이슈든, 교회는 직접 하려고 하기보다는 선교단체, 지역사회, 시민단체와 협력하고 지원하는 역할에 머물기를 권한다. 교회가 교인들을 훈련하고 구비시켜서 전문 선교/시민/지역단체로 보내주고, 재정적인 지원마저 뒷받침해 준다면 (교회로 전도하려는 미끼 상품으로 쓰지 말고)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시민들의 신뢰와 사랑은 덤으로 따라올 것이다.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교회를 국가의 ‘양심’이라고 주장했다. “교회는 국가의 지배자도, 종도 아닙니다. 교회는 국가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국가의 인도자이자 비판자가 되어야지, 국가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언자적 열정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도덕적 권위나 영적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낱 사교 클럽으로 전락할 것입니다”(Strength to Love, 1963). 


만약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이와 같은 역할을 소홀히 하고 있다면 - 심지어 적대시하고 있다면 -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믿음과 양심을 실천하는 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물이 되고 있다면 그곳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아닌 곳에 매주 정기적으로 나가고 있다면 영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이다. 거기다 시간과 돈까지 허비하고 있다면 불쌍하기까지 하다. 당장 관둬라. 




최삼열◆고려대92

영원히 철들기를 거부하며 ‘지랄총량’을 마음껏 사용하고 있다. 마라톤 풀코스 2회 완주, 디아블로3 정복자 레벨을 180까지 찍었다. 클래시오브클랜은 6홀, 레이븐은 21렙에 빛나는 성과를 올리는 중이다.


















vol.220=2015.06+07

광장 속의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