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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사람] 소리이음

험한 타향살이의 다리가 되어주고파_윤원정

[소리가 만난 사람]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험한 타향살이다리가 되어주고파



 

윤원정 학사(강릉대90)

학사회가 확보한 전국학사주소록에 따르면, 많은 학사들이 졸업이후 직장을 얻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특히 수도권에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소리] 216어디 사세요?’ 참조). 그 중에 강릉지방회의 재경학사회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이 모임을 오랜 시간 지켜온 윤원정 학사(강릉대90)를 만났습니다. 타향에서 사업체를 꾸리며 살아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진행 이시종 총무 정리 편집부)



◆◆◆

 


* 우선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고향이 어디이신가요? IVF를 어떻게 만났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강릉대 90학번 윤원정입니다. 어렸을 때는 강릉보다 더 시골인 외설악 쪽에서 살았어요. 행정구역으로는 양양과 속초의 접경지역이죠. 초중고교 모두 속초에서 나왔고요. 친구들도 대부분 속초에 삽니다. 전형적인 영동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희 고향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태백산맥을 넘어보자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저도 나름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원하던 대학에 떨어져 집안에서도 실망이 컸었죠. 강릉대에 다니던 사촌형과 같은 학교에 다니려고 지원했는데 합격했어요. 등록금 고지서를 받으러 갔다가 수석 입학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등록금을 안 냈죠. 소 팔아 대학을 보내던 때였으니 집안의 경사였죠. (웃음)


고등학교 졸업식 전날, 반창회를 했습니다. 한 친구가 술이 많이 취해서 저희 집에서 재우려고 데려왔죠. 그런데 때마침 집에서 속회예배를 드리는 중이라서 동네를 돌아다니다 교회에 데려갔어요. 거기서 친구가 토하고 자잘한 사고를 쳐서 다음날 목사님께 사과드리러 가는 길이었는데 우연히 동네 누나를 만났습니다. 그 누나가 저더러 대학에 가면 IVF에 가라고 이야기했고, 아무래도 선배의 말은 꼭 지켜야 하는 분위기라 선배의 명령에 따라 아무 것도 모른 채 IVF 활동을 시작했죠. 당시 송호영 간사님이 강릉대를 담당하셨는데, 송 간사님은 강릉IVF 최초의 전임간사였어요. 그러다 김윤호 간사님과 소그룹을 하고 원투원을 하다가 예수님을 영접했죠.


학부 때 학군장교를 했어요. 학생 수에 따라 학군장교의 비율이 결정되는데, 학교가 작다보니 우리 학군단은 21명이었죠. 그 중에 IVF 동기인 김남학 학사도 있었어요. 그래서 외롭지 않았죠. 보통 학군단은 이름순으로 순번을 정했는데, 저희만 국문과부터 체육과까지 전공 순으로 했어요. 인문계에는 크리스천이 없었지만 자연계에는 저와 제 친구, 그리고 CCCCBA 친구들까지 몰려있었죠. 그래서 저희 소대는 학군단 내에서도 분위기가 남달랐어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학군단 생활과 IVF를 함께 했습니다. 저는 초신자여서 훈련과정의 처음부터 밟았죠. 2학년 때도 리더를 했는데 3학년 1학기에만 학군단 때문에 리더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친구와 몰래 빠져나와 모임에 참석했죠. 당시 강릉대 IVF는 규모가 크지 않아서 리더들끼리 아주 친했습니다.

 



* 어떻게 서울생활을 시작하셨나요?


대학을 졸업하고 군 생활을 마치고 제약회사에 취업해서 2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제약회사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업을 할 생각이 있었어요. 사업을 하려면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먼저 취업을 했죠. 입사할 땐 5년 정도 일할 계획이었는데 2년만 일하고 그만뒀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그때를 놓쳤다면 그만두지 못했겠더라고요.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원예학과를 전공하고 제약회사에서 근무한 저는 경력과 전혀 상관없는 미디어 사업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CD로 기념품을 만드는 사업이었죠.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게 없었지만 컴퓨터는 조금 자신 있었어요. 대학교 2학년 때 저희 집 황소가 쌍둥이를 낳았는데요. 국립대라 등록금이 적은데 장학금도 받았으니, 하나뿐인 아들에게 큰돈을 들이지 않으신 부모님이 그 쌍둥이 중 한 놈을 팔아 컴퓨터를 사주셨습니다. PC가 널리 보급되지 않은 때였는데 말이죠. 앞서 언급한 김남학 학사가 산업공학과라 컴퓨터를 잘 다루어서 그 친구에게 기본지식을 배웠어요.


회사를 관두고 컴퓨터 책을 보며 28살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지만, 당시 친구들은 졸업 후 이미 각자의 방향을 찾아갔거든요. 좀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군대에서 꽤 큰돈을 벌었으나 이미 다 써버린 후였어요호주에 배낭여행 다녀오고 회사생활에 필요한 차와 양복을 사고 전세금 마련하니 남는 게 없더라고요. (웃음) 직장에서 번 돈으로는 사업을 위한 공부를 하려고 학원에 다녔죠. 30대 초반까지 혼자 이것저것 배우러 다녔어요. 이때 IVF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상경했습니다. 1998년 후반이었죠.



* IMF 직후라 취업이 힘들었을 때이네요.


당시 벤처 붐이 일어서 정부에서 지원이 많았어요.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곳도 많았고 관련 서적도 많이 나왔죠. 처음 시작했던 미디어 사업은 몇 번 해보고 난 후에 시장상황을 알았습니다. CD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고 인터넷으로 시장이 넘어갔다는 것을요. 그간 배운 게 의미가 없어져 아쉽기도 하고 허탈했어요. 당시 동암교회에서 청년부 생활을 했는데, 저를 포함해서 1/3 정도가 실업자였어요. 그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냈어요


돈도 없고 집에서 도움 받을 상황이 아니었으니 옥탑방과 반지하를 전전하면서 사업을 했어요. 나름 계획이 있었지만 잘 안 되니 사업을 접고 취업을 해야 하나 고민했죠. 실제로 취업이 된 회사도 있었지만, 일단 방향을 틀었으니 계속해 보자고 스스로 다독였습니다. 사업이 계속 지지부진하던 차에 IVF 친구의 형님이 소프트웨어 사업을 하는데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배웠던 걸 바탕으로 거기에 참여했습니다. 그게 2000년 여름이었어요. 그러다 2002년에 대학원 시험을 봤어요. 디자인 관련 학과였는데 첫 번째는 떨어지고 두 번째에 합격했죠. 첫 학기, 한 교수님의 경영관련 수업을 듣다가 여름방학 때 과감히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그후 지금 하고 있는 3차원 캐드 프로그램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죠. 이후 미국 쪽에 3차원 캐드를 개발·공급하는 업체의 사장을 서울에서 만났고, 그분과 현재 15년째 함께 파트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15년째 함께 일하다 보니, 개인적인 부분도 알게되고, 인생의 동지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다양한 3차원 캐드제품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서울에서 아파트도 샀고, 나름대로 정착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 그때에도 재경학사회가 있었나요?


제가 졸업하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4학년 말에 선배를 따라 재경학사회에 가서 인사를 드리기도 했고요. 군대에 있을 땐 주말에 학사회에서 예배드리고 부대로 복귀하기도 했어요. 그때에도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종로 쪽의 실로암 분식에서 선배들을 만났던 기억이 나네요. 이영기 형님(강릉88)이 주도해서 재경학사모임을 했어요. 서울에 온 후 저도 교회활동뿐 아니라 학사모임에 참여했고요. 제가 회장을 맡았던 1999, 2000년엔 저희 집에서도 모였죠. 회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재경학사모임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 강릉지방회의 대표간사는 윤원정 학사님과 학사회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의지하신다고 하더군요. 학사모임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계시다고요.


제가 특별히 뭘 잘해서가 아니라 꾸준히 자리를 지켰고, 그렇게 명맥이 이어지니 간사님도 의지하시는 것 같아요. 다른 학사회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강릉학사회는 출신 학사들에게 자신의 고향을 찾아온 것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어요. 객지생활에 힘든 부분이 많아요. 자기가 알던 관계들이 없어지고 모두 새로 시작해야 하죠. 당장 집값부터 고민이에요. 돈을 벌어도 다 집값으로 나가니까요.

 


* 저도 지방 출신이라 타지에서 사는 외로움에 공감합니다.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사람을 외롭게 하는 면도 있고, 지방의 끈끈한 정을 기대하기가 어렵죠. 재경학사모임은 어떤 내용으로 모이고 있나요?


제가 회장일 땐 IVP에서 펴낸 성경공부 시리즈로 공부했어요. 한때는 학교별로 모이기도 했고요. 강릉대 학사들끼리 모일 땐 1월에 챕터캠프를 하며 모임 계획을 세웠죠. PBS도 하고 어떤 주제에 대한 토의도 하고요. 제가 대학원에 다니던 1년 정도는 모임이 흐지부지되기도 했죠. 다른 학교의 상황도 어렵다 보니 다시 합치자는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강릉지방회 전체 재경학사모임으로 합친 지 1년 반 정도 되었습니다. 지금은 강사를 모셔서 강의 듣고 나눔도 하고요. 다양한 방식으로 모임을 진행합니다. 모임에 오는 학사들의 연령층이 다양하지는 않은데요. 제가 졸업할 때만 해도 서울에 올 기회가 많았는데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서울에 취업이 되는 학사가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보통 지방 사람들은 그 지역에 취직을 하고요. 서울에 취업하더라도 원래 서울 출신인 사람이 대부분이라 자기 집에서 지내죠. 집 걱정 없으면 학사모임에 잘 오지 않더라고요. 학사모임 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모임에 참석하는 학사들의 필요도 다양해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목표의식이 투철하다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고향을 떠나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생활이 힘드니 어려움을 나누고 싶어서 오는 사람도 있고, 힘든 건 힘든 거고 모임에 와서는 뭔가를 얻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고정 멤버도 있지만 새롭게 유입된 사람들은 과거 이야기를 계속 하고요. 어떤 사람은 실망하고 더 이상 안 오는 경우도 생기죠.



학사들의 필요가 정말 다양하죠어떤 사람에게는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어려움이 있을 거고요그래도 10년 이상 모이다 보니 자녀들이 커가는 걸 함께 보고 가족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사업체를 운영하며 무척 바쁘실 텐데도 재경학사회뿐 아니라 전체 강릉학사회에도 애정이 많다고 들었습니다학사회에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저는 대학 1학년 때 IVF를 통해 영접을 했어요. 여기에서 오는 애정이 큽니다. 말씀 보는 훈련도 IVF에서 받았고요. 그래서 군대에서도 QT를 계속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혼 후에는 아내와 아침마다 성경 읽고 출근하고 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학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학사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학사가 되면 후원을 많이 하라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기본적으로 학사가 후원하는 건 맞지만 학사는 후원만 하는 사람은 아니죠. 학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당시 간사님도 명확하게 말씀해주시진 않았어요. 그래도 학사가 중심에 서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제가 재경학사모임 회장을 할 때에는 다른 학사들에게 학사들 스스로 뭔가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죠. 하지만 각자의 삶이 힘들다보니 잘 먹히진 않았어요. 일터와 삶터, 소명에 대한 고민이 많았으나 풀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공간이 딱히 없었고요. 그래서 자발적으로 재작년 EARC에 맨 처음 등록하기도 했죠.



* 2013EARC가 학사님의 삶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나요?


그곳에서 제가 그동안 생각했던 방향성이 맞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을 요약하고 보충해서 강릉 학사들에게 나누기도 했어요.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기억에 더 많이 남았고,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했어요. 가령 어떤 부패한 조직 내에도 크리스천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 그 조직을 욕하기만 하는 것보다 그 속의 크리스천이 자기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싶어요. 이런 식으로 사회에 대한 고민을 정립하고 있습니다. 당장 바뀌는 것보다는 초점을 주님께 맞춰가고 있어요.

 

 

*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하게 모이는 재경학사회는 강릉IVF 외에는 없습니다. 그게 학사님 덕분이란 생각이 들어요. 모임을 지켜준 학사님이 귀합니다. 재경학사회를 10년 이상 섬겨온 입장에서 학사회에 제안하고 싶은 게 있으신지요?


제가 중앙회에 제안할 건 사실 없어요. 다만 강릉이 참 멀리 있죠. 춘천IVF에서 독립했다 보니 한 단계를 더 거치는 느낌도 있고요. 우리 학사들에게 이런 콤플렉스를 뛰어넘자고 이야기는 하지만 쉽진 않아요. 저는 지방 출신이지만 대학원을 서울에서 나왔고 서울생활을 오래했어요. 저에겐 이 두 가지 성격이 다 있으니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게 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앙회와는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싶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강릉학사회도 발전하지 못할 거예요. 재경학사회에 얼마나 모이느냐보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학사회는 결국 캠퍼스 때 배우고 꿈꿨던 것을 학사들이 인생 안에서 실천하고 하나님의 뜻을 함께 이뤄가며 서로를 자극하고 격려하는 자리인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주는 학사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강릉IVF뿐만 아니라 많은 학사들이 타향살이를 하는데 선배로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정착 아닌 정착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각자의 상황이 다르니 해결책을 쉽게 말할 수는 없죠. 서울에 오자마자 정한 교회에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데, 참 독특한 케이스죠.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IVF 친구와 함께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에 가라는 것뿐이에요. 저도 먼저 상경했던 친구와 서로 도와가며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도 소개하고 친해졌어요. 서울에 정착하는 건 운이 좋았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 그런 면에서 재경학사회의 역할이 중요하겠습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찾는 데 신뢰할 만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겠습니다. 학사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ARC에서 학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도 그렇고 오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학사님이 참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라는 걸 재확인했습니다. 앞으로도 교제가 이어지기를 바라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