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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기획] 소리정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정치색(色)] 상대방으로부터 배우려는 순수한 마음 간직하길_김용휘

[소리] 2013년 여섯 번째 소리 -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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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으로부터 배우려는 순수한 마음 간직하길


시끄러운 세상 속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 이재웅(상명98)



김용휘(총신대07)

2011년 겨울 졸업하였고 현재는 대한민국 공군으로 근무 중이다. 교회 친구들 사이에서는 좌파, IVF 동기 내에서는 우파라고 불린다.




저는 남서울 지방회에 속한 총신대학교 07학번 김용휘라고 합니다. 학교마다 특성이 다르겠지만 총신 지부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 문화에 익숙한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성경 공부, 권위에 대한 인정, 순종, 봉사에 대한 열심, 헌신에는 거부감이 없는 반면 변화에 대한 포용, 새로운 관점, 이전에 없던 시도에 대한 적극성, 사회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 등 현장 중심의 진취성은 다소 약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요즘은 사회 운동에 관심 있으신 간사님 덕분에 많이 나아진 것 같더군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신학대학교라는 이름 때문에 캠퍼스 내에서 전도 활동이 의미 없을 정도로 불신자 비율이 낮았기 때문에 현장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고 타 지부를 도우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자 한양대(안산), 중앙대(02학번 선배님들의 경우에는 동국대)로 나가 전도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피곤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간사님과 선배들의 생각이 아주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학부시절 있었던 일

2010년 2학기, 마지막 학기 리더를 할 때였습니다. 사회부 소속이었던 저는 다른 지체들과 번갈아가며 매주 금요일마다 사회 DPM을 인도했습니다. 사회를 위한 기도제목을 찾던 중, 당시 SSM(기업형 슈퍼마켓)의 골목상권 침해 문제를 접했습니다. SSM의 상권 확대로 인한 소규모 자본으로 운영되는 자영업자의 생계를 우려하는 뉴스였습니다.


저는 ‘어차피 대기업은 각종 광고와 홍보로 정당성을 확보할 것이고 진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관점은 대부분 잘 모르고 넘어가기 쉬우니까 SSM의 판매 분야 확대가 어떤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고민하도록 해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DPM 시간 에 서너 가지의 주제 중 하나로 SSM 문제를 놓고 “기업이 이윤추구의 목적으로 각 분야에 무한정 뻗어나가는 상황을 비판할 수 있는 눈을 달라고, 이윤 추구가 상생과 공존으로 선하게 발현되도록, 골목 상권을 보호하는 정책과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되고, 소비하는 우리들도 고민하고 소비할 수 있도록 하자.”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DPM이 끝나고 채 30분도 되지 않아 장문의 발신번호제한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인데 한쪽 입장만을 전달한 것 같아 아쉬웠다. 다들 관점이 다른데 이런 종류의 기도제목은 불편하다.”


한마디로 “다른 관점의 지체도 배려해 달라”는 내용이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시간조차도 누군가는 강요나 설득으로 느껴 마음이 상했다는 사실, 정치적 견해의 다름으로 혼란을 느꼈다는 사실에 기도하는 내내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을까 싶어 미안했습니다. 한편, ‘나는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말한 적이 없는데...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을 돌아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누가 불매운동 하자고 했나?’하는 짜증도 올라왔습니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가볍게 항의(?)하는 문자는 IVF 생활을 하면서 선배들이 가르치는 대로 듣고 간사님이 알려주는 대로 이해하며 리더까지 해온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DPM 인도자라는 위치를 생각해볼 때 저와 다른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공적인 자리에서는 일방적, 확정적 결론을 내리기보다 공감대를 먼저 형성하고 말하는 내용의 목적과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그때의 저는 몰랐습니다. 저 역시 제가 배우고 익힌 대로 누군가에게 전수하고 있는 과정이었을 텐데 거기서 도전을 받은 것이기에, 그리고 그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기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런 일이 발생할 때 대처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사회부 리더였으면서도 사회 이슈에 대한 정치적 성향의 차이로 인해 발생할 문제를 예상하고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경우 묻어두지 말고 공론화해서 토론의 장을 만들었더라면 한층 성숙하게 우리 운동의 본질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 소비자 입장의 경제관념, 시장에서의 수요-공급 분석의 다양한 관점 필요 등, 더 좋은 주제로 윈윈(win-win)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학부시절에 이런 훈련을 한다면 학사의 삶에서도 다양한 정치 의견이 등장하는 대화에 좀 더 능동적으로, 얼굴 붉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졸업 이후 있었던 일

작년 상반기에 겪은 일입니다. IVF 동기들 채팅방에서 4대강 사업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분명 다른 대화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오고 갔습니다. 토론회가 아니었기에 제가 대화에 굳이 끼지 않아도 되는 소위 ‘눈팅’만 해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학부시절 세계관 강의를 통해 ‘4대강 사업’은 환경적인 측면, 추진 과정, 사업 타당성 등에서 제가 알고 있고 예상한 것보다 심각한 문제를 안고 시작한 사업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고 비판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쏟아 부은 돈은 어떻게 회수가 안 되니 지지자들의 주장대로 홍수 막고 가뭄 해결하기를 바라자. 성공여부를 보고 판단해도 되지 않느냐”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대화의 처음부터 저는 낙관론자에 가까웠고 낙관적으로 바라볼만한 객관적 근거가 없음에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비판 이전에 기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앞장서서 비판하고 언론을 여론으로 재생산 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적어도 우리 연차끼리는 뾰족한 대안 없는 비판을 하기보다는 어려울 때일수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로 말한 것인데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동기 A는 사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쌓여 불만이 이미 가득 찬 상태였고, 비교적 객관적인 자료와 실제적인 증거로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A가 저의 태도를 보고 미지근한 상태, 소극적이고 지극히 소시민적인 삶의 태도라고 여겼을지는 모르겠지만, 화가 난 것인지 자기가 생각하는 진실을 알리고자 했는지 저에게 “군인이라서 그러냐.”며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습니다. 논쟁은 순식간에 군복무의 필요성과 가치, 국가 방위의 정의가 무엇인지 등으로 뻗쳐 나가 격렬한 언쟁이 되어갔고, 목적을 잃고 표류하는 배처럼 여러 주제를 이야기하며 점점 위험 수위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글은 읽고 있지만 아무도 저와 A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관망하고 있음을 눈치 챈 것은 이미 서로에게 상처를 많이 남긴 후였습니다.






보다 못한 다른 동기의 만류로 상황이 종료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저와의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뛰어넘지 못하는 A의 약함,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어느 누구하나 나를 이해해주고 대변해주는 이 없다는 생각에 친구들 전체에 대한 불신이 더해져 외로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한동안 연차 채팅방에서 나가 있게 되었고 모든 연락을 단절하였습니다. 


혼자가 되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상황에서 ‘내 편, 네 편’ 생각한 것이 우스웠습니다. A는 학부시절에도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던 사람이었고 저는 그것을 그 사람의 매력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그와 순간적으로 지기 싫고 억울한 마음에 이해해주지 못하고 엉겨 붙어 싸운 것이 창피했습니다. 얼마 후 A가 흥분해서 말을 가리지 못했고 다른 곳을 향하던 분노가 나에게 향한 것임을 인정하고 사과하였고, 저 역시 사과를 주고받으며 관계는 원래대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저희 연차는 웬만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주제 바깥에 놓인 정치 문제에서는 몸을 사리게 되었습니다. 살벌한 현장을 눈으로 보고야 만 것이었습니다. 그랬다가는 둘의 관계가 파탄이 날 수도 있겠다고 느꼈고 전체 동역관계에도 영향을 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두 가지 사건 이후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어떤 모임(사람) 간에는 정치적인 견해에 대한 자유로운 소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직접적인 만남이 없어도 SNS 상에서 다양한 사람의 정치적 관점에 얼마든지 동의하거나 반박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얼굴을 보며 목소리를 들으며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면 일이 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 사례와 같이 논지에서 벗어난 새로운 싸움의 불씨를 일으키는 경우는 상대방에 대한 오해와 아쉬움, 섭섭함, 분노 등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SNS 상에서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이 공동체 내에 나타날 경우 당사자뿐 아니라 절대 다수의 동역자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요즘은 모두가 자신의 정치성향을 활발히 표현할 수 있는 환경에 사는 것 같습니다. “좋아요” 또는 “공유하기”, “리트윗”을 통해, 내가 쓰지 않아도 한 번의 클릭으로 나의 것으로 만들거나 또는 그 의견에 찬성/동의/지지의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누가 어느 문제에 관심이 많구나, 누구는 어떤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럿이 모인 모임의 대화중에 대립각이 세워지려는 분위기가 풍기면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발언과 주장을 포기하거나 회피하는 지체도 있을 수 있고, 역시 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중간에 조정하는 입장도 난처해 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특정 주제만 등장하면 전체가 불편해지고 대화가 단절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애초에 나와 정치적 성향이나 입장이 정 반대인 지체가 있는 자리라면, 나와 반대 입장의 사람뿐 아니라 휘말리기 싫은 전체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기에 대화의 주제 선정과 정치적 발언에 대해 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논쟁이나 설득이 아니라 나는 이러한 관점밖에 잘 모르니 상대방과 상대방의 생각으로부터 배우고 더욱 알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 전제가 되면 나와 정치 의견이 다른 타인과 타인의 관점에도 관대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동역자 중에 누가 SNS 상에서 나와 정치적 성향이 다른 글을 공유하거나 연결한 것을 보더라도 거부감이 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 스스로가 더 배워야하고 더 넓은 시야와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제가 애써 찾지 않아도 그런 정보를 제 눈앞에 가져다주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비록 그 관점에 “좋아요”를 누르기까지 찬성이나 동의는 못하더라도 균형을 잡아주어 “고마워요”하는 마음을 가지니 한결 마음이 편합니다.


사실 ‘이거 아니면 반드시 저거’, ‘흑 아니면 모두 백’은 복음을 지키는 입장을 제외하고는 우리를 그다지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관점은 동일해도 방법론이 다를 수도 있고, 방법론이 같아도 목적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일면만을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거나 마음 문을 닫지 말고 천천히 다가가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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