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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사람] 소리이음

연결하고 소통하는 선교의 플랫폼이 되고파_이대행

[소리가 만난 사람]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연결하고 소통하는 선교의 플랫폼이 되고파




한국교회에서 해외선교 동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선교한국’ 운동이 출범한 이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합운동으로서의 선교한국이 출범한 이후 91년부터 약 25년간 동안 실무자로, 지금은 상임위원장으로 그 현장을 지켜온 이대행 학사(숙명여대87)를 만났습니다. 현재 선교 동원 운동의 상황과 과제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해온 어려움과 현재 처한 긴장 등, 현실적인 삶의 이야기도 들어보았습니다. (진행 이시종 / 정리 편집부)  




먼저 옛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학부시절 참여했던 IVF 선교부 모임부터, 어떻게 선교 동원 사역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추억을 되살려 보시겠어요?


대학 2학년 때였어요. 이득수 선교사님이 선교지로 떠나시기 전 선교 세미나를 여셨는데, 당시 제 동기 임수경이 열심히 참여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선교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말, 필리핀에서 EARC가 열렸습니다. 88년부터 허용되면서 학생들도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죠. 개인적으로는 그때의 해외경험이 인상 깊었어요. 타문화권에서 다른 언어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신기했죠. 선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1988년에 제1회 선교한국이 열렸고, 저는 90년 대회에 처음 참석했어요. 신선했습니다. 선교가 새롭게 다가왔어요. 당시에 고직한 선교사님이 기도합주회를 인도하셨는데, 기도회가 그렇게 역동적인 건 처음이었어요. 강의로 들은 지식이 기도로 엮이는 경험을 하면서 선교사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금요일, 한참 졸고 있었는데 이동원 목사님이 선교사로 헌신할 사람들은 일어나라고 ‘콜링’을 하셨어요. 벌떡 일어났는데 졸다가 일어난 사람은 앉으라고 하셔서 다시 앉았죠. (웃음) 얼마 전에 이사하면서 짐을 정리하다 보니까 이때 작성했던 헌신서가 있더라고요. 현장에는 나가지 않아도 선교라는 영역을 나의 삶에 깊이 품겠다고 적었더군요. 실제로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네요.  


선교한국 대회 이후, 졸업하고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했어요. 부모님은 반대하셨지만 그냥 추진했어요. 장기선교를 나가기 전에 현지를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김중안 간사님이 연락을 하셨어요. 학사 몇 명이 인터서브 프로그램을 통해 중동지역에 가니 함께 가자고 하셨죠. 저까지 여섯 명이 두 달 동안 이집트, 터키 등을 다니며 이슬람권 사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여행 이후에 김중안 간사님을 중심으로 IVF 선교부 모임이 시작되었죠. 뭐, 별로 한 일은 없어요. (웃음) 볼링 치러 다니고 선교한국 사무실에서 우편 발송 돕고 그랬죠. 굉장히 느슨한 모임으로 관계를 만들어 갔어요. 그 흔한 스터디도 하지 않았고 정말 즐겁게 지냈어요. 모여서 서로 사는 이야기 나누며 놀다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일했고요. 모임은 그저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확인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러다 IVF 선교부는 학생 중심 사역으로 김종호 간사님이 이어받았습니다. 


졸업을 하고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선교한국의 제안을 받아 8월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반대했는데 부르심이 있다면 가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곳이 아니라면 준비했던 대로 9월에 선교를 나가겠다 생각했고요. 선교한국이 연합운동으로서 초창기라는 점이 행정학을 전공한 제게 중요하게 보였습니다. 전문영역이 구조적으로 정착하는 걸 돕고 싶었거든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의 안정화에 관심이 있었다고 할까요? 



2006 선교한국 '잊혀진 부르심' (출처: 선교한국 홈페이지)

선교한국이 작년에 14회를 맞이했죠. 1회 대회 빼고 모두 참석하신 셈인데요. 모든 대회가 각별하겠지만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대회를 꼽아보신다면 언제인가요?


모든 대회가 기억에 남아요. (웃음) 그중에서도 처음 스텝으로 참여했던 92년 대회를 잊을 수 없어요. JOY선교회가 선교한국대회의 포문을 열고 IVF가 선교한국이 지속될 수 있도록 교두보를 놓았다면, 92년 대회를 준비한 예수전도단은 선교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봅니다. 돌아보면 그 대회를 준비한 분 중에 탁월한 분들이 많았어요. 이때 시스템이 구비되지 않았다면 일반 수련회와의 차별성을 마련하지 못했을 겁니다.  


92년 대회의 주제는 “2000년을 향한 한국 청년 학생들의 책임!”이었는데, 핵심 화두는 ‘선교 동원운동(mission mobilizer)’이었어요. 그때부터 선교 동원이라는 개념이 한국교회에 자리 잡았죠. “모든 족속마다 교회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이라는 주제로 열린 94년 대회에서는 ‘미전도 종족(unreached people)’이라는 개념이 확산되었고요. 이 개념은 1974년 로잔대회에서 랄프 윈터 박사가 소개하여 선교사역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죠. 이 두 가지가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을 이삼십 년간 이끌어 온 중요한 개념이었습니다. 초반의 두 대회가 우리의 방향성을 설정한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선교에서 중요한 게 동원, 미전도 종족, 연합, 이 세 가지인데, 한국교회는 초반부터 세 가지가 모두 자리 잡은 거죠. 이건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입니다.

  


한국교회의 침체 흐름과 학생 선교단체의 쇠퇴기를 겪으며 학생 선교 동원도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선교한국의 참여자 수도 대폭 줄었다고 들었습니다. 최근의 흐름은 어떤가요?


전체적인 참가자의 수가 줄더라도 학생 선교단체의 참석비율이 유지된다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으니 성과 면에서도 동력이 크게 일어나진 않더군요. 지금 개신교의 행태에 문제가 있으니 선교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방향을 정확히 잡으면 현세대도 충분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동력이 사라진 채 조직만 남는다면 더 이상 운동체가 아니겠죠. 결국 단체의 리더들이 감당해야할 요소라고 봅니다. 자신이 리더인가, 매니저인가를 고민하며 방향성을 설정해야겠습니다.  


참가자 수가 줄어드는 건 사실 굉장한 스트레스에요. 그렇지만 그 자체보다는 정체성의 혼란이 위기죠. 소수의 사람들이 미래에 감당해야할 몫을 생각하면 숫자는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개인의 문제에만 매여 있는 사람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과감히 내려놓는 전략도 필요하겠고요. 선교사역에 눈을 뜬 사람과 자기 문제에 갇혀 있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삶의 풍성함이 다르죠. 학생단체가 위기를 극복하려면 선교적 비전을 학생들에게 심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선교한국은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어요. 그 어디보다 선교한국에 왔을 때 학생들의 시각이 바뀔 거라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면 되겠더라고요. 홍보를 열심히 했다면 참가자에게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학생단체도 과거와 비교해 줄어드는 수를 걱정할 게 아니라 이 시대의 사람들이 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할 바를 다한 것이겠죠. 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위기가 훨씬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참가자가 많았을 때 홍보를 지금보다 더 전략적으로 하고 훨씬 잘 준비된 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그때는 우리의 몸을 만들기 위해 일하신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간사들이 조를 짜서 일주일에 두 번씩 교회를 돌아다니며 홍보를 하는데도 잘 안 되더라고요. 결국 홍보의 문제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겠죠.

  

선교현장에서도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현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최소한의 복지시스템이라도 활용할 수 있도록 권장하고 있고요. 접근 전략도 기존과는 달라져서, 지역 특성에 맞춘 프로젝트를 개발해 활용할 수 있는 자금에도 주시하고 있습니다. 선교라는 영역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며 진정성을 갖춘 사람들이 현장에 갈 수 있도록 하고요. 

  

한편, 중국, 인도, 대만, 몽골, 인도, 에티오피아 등에서 선교한국과 같은 동원운동이 일어나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 때 외국인이 개입하고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더라도 스스로 만들어가도록 스피릿을 전수하는 것이 중요해요. 저희는 다만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하고 있죠. 그래야 각 나라에 적합한 운동이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의 노력과 별도로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이야기할 기회도 만들어 주셔서 지경을 넓혀 가신다고 생각해요.




선교동원 현장도 거친 현장이라고 봅니다. 문화가 다른 여러 단체와 함께 일해야 하는데, 연합운동을 하는 사역자의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20년 넘는 기간 동안 그 어려움을 감당하신 비결을 듣고 싶습니다. 

 

실제로 보통일이 아니에요. 스스로 신기할 정도죠. 어떤 분은 저에게 약간 남성적인 성향이 있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렇진 않아요.  



남자였다면 오히려 못 버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제가 남자가 될 순 없으니 답변 드리기가 어렵네요. (웃음) 다만 남자였다면 지금보다 빨리 리더십 그룹에 섰겠죠. 저에겐 보수적인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어요. 예전에는 ‘나는 왜 계속 틀리지?’라고 생각했어요. 20대 후반부터 40대 남성들과 일하다 보니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서로 관점이 달랐던 거였어요.

  

연합운동은 사실 백조와 같아요. 우아하게 호수를 누비지만 물밑에선 엄청난 발차기를 하고 있죠. 스트레스가 극심합니다. 제가 여성이라서 연합운동을 할 때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어요. 한국사회의 소위 ‘사우나 문화’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단점이라 볼 수 있겠죠. 남성과 여성이라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다른 문화가 있고요. 한국교회가 남성중심의 문화라 불편함도 있죠. 어떨 땐 “여자가 무슨!”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냥 ‘영적으로’ 느껴져요. (웃음)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니 유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문화를 넘어서긴 어렵더군요. 

  

사실 처음 상임위원장 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 한국문화에서 여성이 리더십으로 버티기 어려우니 거절하라는 조언도 들었습니다. 그때 부르심의 확신이 생기더군요. 여성이라서 못한다는 건 하나님이 여성을 만들 때 실수하신 거라고 들렸어요. 저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받아들이겠으나 여자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을 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죠. 

  

제가 여성이라서 갖는 장점은, 사람들의 경계심이 없다는 점이에요. 제 앞에서 속의 말을 모두 하고, 힘들면 도와주겠다는 말도 선뜻 하시죠. 오히려 참여적인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경계심 없이 명제 중심으로 일하니 장점이죠. 그리고 남성 리더에게는 하지 않았을 불평불만을 제게는 모두 쏟아놓으니 서로 투명하게 대화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사실 정말 힘들어요. 제가 성인(聖人)은 아니니까 스트레스도 가끔 풀고요. (웃음) 

 




가족 이야기를 해주세요. 결혼하고 아내와 엄마로서 살면서 조직에서 활동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육아나 가사분담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서로 배려하고 계신가요?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제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제 시간은 출퇴근 시간뿐이었죠. 그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지금은 여유가 생겨 어느 정도 극복했고요. 만약 싱글이었다면 지금보다 어떤 일을 더 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결혼해서 하나님이 가정사를 절묘하게 이루어 가시는 경험을 했어요. 결혼 이전에는, 결혼한다면 가사에 전념하며 교회 일에 헌신하고 싱글로 살아간다면 싱글 여성들의 건강한 모임을 만들어가겠다고 기도했죠. 결혼 자체보다는 결혼 여부에 따라 삶의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했어요.  

   

결혼 이후에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결혼하고 1년 안식년 기간에 아이를 가졌고요. 저는 시부모님과 시할머니, 그리고 저희 아이까지 4대가 함께 생활했어요. 게다가 제가 종갓집 맏며느리였어요. 명절 때면 삼사십 명의 손님을 치르고, 한 달에 두세 번씩 친척들이 할머니를 뵈러 방문했어요. 녹록하지 않았죠. 그런데 출산 후 선교한국에서 저를 필요로 했고, 신학을 하는 남편이 제가 일을 하는 걸 좋아했어요. 시부모님도 어느 정도 개방적이시라 제가 일 하는 걸 반대하시지 않았어요. 대가족인 덕분에 아이가 정서적으로도 안정적으로 자랐어요. 가족의 탄탄한 울타리 덕분에 육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죠. 

  

물론 시댁에서 사는 건 힘들었어요. 문화충격이었죠. 불필요한 오해도 생기고요. 그런데 남도 섬기는데 친척을 섬기지 못하랴,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도 전하는데 시부모님에게 일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겠나,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무엇보다 남편이 중간에서 절대적으로 제 편이 되어주었죠. 아주 온유한 사람이에요. 저와는 기질적으로 다르지만 저를 잘 보필해주었어요. 올해 저희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남편도 2013년에 교회 개척을 하게 되었어요. 모든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서 새로운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모든 상황에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도록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만들어 놓으셨어요. 선교한국에서 10년 일하고 결혼했는데, 그때는 사무실에 매이지 않아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던 때였죠. 그래서 아이가 아프다거나 사무실에 늦게 오더라도 일이 잘 돌아갔어요. 10년 동안 전문적인 정보와 선교계의 인맥을 자산으로 확보했고요. 일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완급을 조절할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도 준비되었고 대가족이라는 환경적인 도움도 받아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어요.

  



학사님의 장기적인 삶의 전망은 어떤가요?

  

옛날에는 멀리 보며 살았는데요, 지금은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요. (웃음) 2016년이 선교한국에 중요한 때입니다. 2014년에 선교동원이 나름 최저점을 찍었으니 어느 정도 다시 올라서는 기반을 마련한다면 좋겠어요. 그렇지 못하고 계속 저점을 찍는다면 존재 자체를 고민하게 되겠죠.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사역도 깊어질 거라고 봅니다. 선교사나 선교적 맥락에 있던 사람이 하나님께 돌이켰을 때 부흥의 물꼬가 트이죠. 30년간 한국교회와 선교단체가 선교운동을 키우기 위해 애썼다면, 이제는 선교한국이 이런 물꼬를 터주는 역할로 전환하면 좋겠습니다. 선교운동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촉발점이 되도록, 하나님이 반전을 이뤄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어요. 근거 없는 낙관론은 아니에요. 대안 없는 비관이 더 힘드니, 대안을 만드는 낙관이랄까요? (웃음) 어떤 과제가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졌는지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학생 때 했던 PBS 노트를 들춰 봤는데요, 하나님이 그때 저희가 기도했던 것을 들어주셨더라고요. 기도했던 대로 살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죠. 그래서 기도는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웃음) 어려움도 많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길게 바라보며 일하고 싶어요. 2010년에 상임위원장을 맡으면서는 키워드를 “Facilitate”의 ‘F’로 잡았어요. 네트워크를 넘어 시너지가 날 수 있도록 제가 연결하고 돕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올해 다시 상임위원장을 맡으며 제가 왜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기도하며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플랫폼의 혁명>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며 이거다 싶었죠. 중국의 샤오미가 어떻게 대두됐는지, 미국의 애플이 어떤 개념으로 세계를 장악하는지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선교한국도 하나의 플랫폼이죠. 누구나 와서 놀 수 있고, 기여한 만큼 만족감을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임기 동안의 키워드는 “Platform”의 ‘P'로 잡았어요. 하지만 이런 일이 임기 내에 승부를 보는 일은 아니니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즐겁게 관계를 만들고 일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IVF 학사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90년대에 선교현장에 나간 학사님들이 많습니다. 또 선교운동 영역 곳곳에 IVF 출신이 많아요. 이런 사실에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와 함께 책임감도 가져야겠죠. 다양한 곳에서 일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역할을 다한다면 좋겠고요. 본인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소망의 물꼬가 되면 좋겠습니다. 학부 때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심겨줬지만 졸업 후 많이 잊어버리고 사는 게 현실이에요. 학생들은 수련회에서 열심히 내공을 쌓으면 좋겠어요. 수련회처럼 집중적으로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는 인생에 있어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특권입니다. 지나보면 알겠지만 다시 오지 않는 기회죠. 학사들은 학생 시기에 배운 바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적용하려 애쓰며 하루하루를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학사님의 하나님의 뜻을 향한 진지하고 열정적이면서도 적극적인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선교영역의 새로운 동력을 위하여 분투하는 학사님의 비전과 운동을 응원하겠습니다. 


















vol.218│2015.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