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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연재] 소리지음

[말씀산책] 세상 속의 나그네(벧전1:1~2)_김문정

2018년 02+03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말씀산책]


세상 속의 나그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벧전1:1~2 -








김문정(연세대93)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2012부터 신대원 3년, 신약학 석사 2년을 마치고 

현재 안산이주민센터에서 기관목사로 이주민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 중에 가장 특별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물어본다면 태국에서 1년, 영국에서 3년 살았던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그때는, 오늘 본문의 주제처럼 ‘세상 속의 나그네’로 살았던 기간입니다. 나그네의 삶은 재미날 때도 있지만 아주 힘들 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 기간 동안 바닥을 쳤던 적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학교를 마치고 유학생 사역을 하기 위해 이사했는데, 낯선 도시에서 혼자 사는 삶이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영국 사람들이 아주 꺼려하는 도시였습니다. 마침 제가 다니던 영국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이 베드로전서 본문으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계셨습니다. 말씀이 저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고, ‘Stranger in the world, 이거 꼭 내 꼴이네. 남의 나라에서 나 지금 뭐 하고 있냐?’며 오히려 자조적이었습니다. 한국사람 하나 없는 영국 도시에서 외국인 유학생 사역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은 베드로가 말한 ‘세상 속의 나그네’와 꼭 닮아 보였습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베드로’라는 인물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단연코 눈에 띄는 인물입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말이나 행동을 과장하는 스타일인데, 이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습니다. 처음 제자로 발탁되는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지요. 특히 누가복음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그렇습니다(눅5장). 이 날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있는 배에 오르셔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고는 시몬(예수님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기 전에 ‘시몬’이라고 불렸습니다)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시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렇게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우리들이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말씀하시니 다시 한 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보나마나 헛수고일 테지만,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니까 한번 시늉이라도 해보겠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엄청난 양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역시 베드로는 이 사태에 대해서도 격하게 반응을 합니다.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 


 베드로의 특별한 언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아주 유명한 질문을 하나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요”, “주님은 엘리야이십니다”, “선지자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라고 대답하며 정답에서 약간씩 비껴가는 대답을 하는데, 베드로는 질문을 하신 예수님의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합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의 의도를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막8:29).


 마태복음은 이 장면을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답했고,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아주 만족해하시며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하십니다. 덧붙여서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까지 하십니다. 우리가 유럽이나 기독교 성지에서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동상을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여기에서 멈췄으면 좋았으련만 베드로는 자신의 성격에 걸맞게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다가올 고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누자, 베드로는 이에 대해서 강하게 항변합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고 묘사합니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모를 정도로 아주 강력한 반대를 표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는 말까지 쓰시며 나무라십니다. 예수의 제자로서는 아주 민망한 장면이죠.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게 된 행동을 한 것입니다.  

 

 특별한 언행의 클라이막스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일컫는 베드로답게 예수님이 끌려가시자 그 뒤를 따라갑니다. 스승이 위기에 처했는데 그냥 못 본체 할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베드로의 미행은 아쉽게도 그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결과를 맞습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따라가는 자’인데, 그 따라감이 결국 실패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강력하게 부인한 뒤에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기분이 어떠했을지는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립니다. 


 어떻게 보면 실수투성이인 베드로의 엉뚱한 행동과 드라마틱한 인생은 오히려 저에게 완벽주의 바울보다는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사실 제가 젊을 때(?)는 바울이 이상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점점 들면서 오히려 베드로의 모습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항상 정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에 가까이 갔다가 쓸데없이 한마디를 더 보태서 감점이 되는 ‘안타까운 답지 같은 인생’이 우리네 인생과 더 닮은 것 같아서이죠. 베드로의 이후 행로는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서 그려진 뒤?여기서도 실수를 해서 사도 바울에게 엄청 면박을 당합니다(갈2장)-사라집니다. 따라서 베드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베드로의 이름으로 남겨진 편지가 있다는 것이 아주 반가울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서신의 엄청난 양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으로 잡은 구절이 담겨 있는 베드로전서를 읽어 보면 ‘나그네’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1장 1절에서부터 자신이 편지를 쓰는 대상이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나그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베드로전서에 총 세 번 나옵니다. 앞서 말한 1장 1절과, 1장 17절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마지막으로 2장 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입니다. 한마디로 베드로는 그 당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나그네’라고 표현했습니다. 제자들의 정체성을 ‘나그네’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개역개정에서 ‘나그네’라고 표현한 παρεπδημος(‘파레피데모스’)라는 단어는 ‘낯선 땅에서 거주하는 이방인, 방문자, 일시적 체류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일시성’과 ‘방문자’라는 개념이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베드로가 성도들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 성도들이 살던 환경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는 베드로전서에 15번이나 나오는 ‘고난’이라는 말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은 신약성경에서는 베드로전서에 제일 많이 쓰였고, 신구약을 통틀어서도 시편(17번)에 이어서 2위입니다. 시편이 총 150편이고, 베드로전서는 겨우 5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빈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현재는 믿음 때문에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지만 우리가 속한 곳은 우리에게 위협이 가해지고 있는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임을 강조함으로써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예수를 믿기 전의 습성에서 벗어나기를 계속해서 권유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나그네’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성도들이 이전에 속해 있던 세상’과의 분리를 강조하려는 의도도 엿볼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기 전에 이교를 따르던 생활습관을 베드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3). 이러한 삶을 떠나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 것을 권고하며 베드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일시적 체류자로서 ‘나그네’의 삶을 성도들에게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나그네’라는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땅에 사는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옵니까? ‘나그네’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일시성은 잘못하면 이 땅의 것을 ‘덧없는 것, 헛된 것, 그냥 사라져 버릴 것’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죄로 가득한 곳, 따라서 믿음과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멀리하여야 할 것’으로 여기게도 합니다. ‘하나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은 참 바람직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거처를 두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서 모두 헛된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은 그다지 건강하지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교회와 세상을 양분하는 이원론적인 사고 구조가 교회를 사회로부터 소외시킨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죄로 가득한 곳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나를 세상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이해한다면,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다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여기고 ‘교회 중심의 생활’을 성도들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이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집’으로 보는 것과 상충됩니다. 또한 이러한 이해는 인간의 구원을 영적인 것으로만 한정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영의 문제만이 아니라 영과 육을 포함하는 전인적인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구원도 인간의 영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육체적 일상이 포함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인간의 영과 육을 분리하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나그네’라는 단어가 가져올 수 있는 이러한 오해를 방지하고, ‘나그네’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최근에 한 비디오 클립을 보면서 아주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의 힌트를 발견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비디오는 5년 동안 거의 돈을 들이지 않고 세계를 여행한 크로아티아 사람 ‘Tom’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톰은 경제 위기로 갑자기 직장을 잃고, 삶의 의미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카우치서핑(couchsurfing)’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의 집에 여행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전한 집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미디어와 교육, 또 교회의 가르침(?)이 주는 영향으로, 세상은 톰에게 두려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두려움을 떨치고 여행을 떠났고, 5년 동안 발로 걷고 차를 얻어 타며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은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인종이나 문화, 종교의 차이가 아무리 크더라도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같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 전에는 미디어나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믿지 말아야 할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행 전과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행을 다녀온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이러한 감동도 시들해집니다. 여행에 대해서 반복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지겨워지고, 사람들도 자신의 이야기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여행 후 우울증(post-travel depress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제 귀가 번쩍 뜨였던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첫 번째는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했던 일을 다시 하고, 오래된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익숙한 곳에 다시 가면서 옛 생활을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를 누비며 여행의 활기에 넘쳤던 그 사람은 사라지고 맙니다. 두 번째 방법은 다시 가방을 싸고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여행이라는 스릴 넘치는 모험 속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여행을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계속 떠돌아다니게 되면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마음을 충족시킬 수 없고,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일시적인 관계 때문에 안정감도 가질 수 없습니다. 톰은 이제 마지막 방법을 통해서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합니다.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여행하듯 사는 것입니다. 여행가서 하듯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거리를 걷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말도 걸어보고, 새로운 취미를 갖고,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시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려움을 떨치고 여행을 떠났던 모험심과 패기 넘치는 그 사람으로 일상을 흥미롭게 살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베드로가 말한 ‘나그네’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하나님나라에 속한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나그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그네는 여행하는 길에서 마주치는 풍경이나 사람들에 시선을 뺏길까봐 전전긍긍하며 최종 종착지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며, 오래된 또는 새롭게 시작하는 인연을 귀하게 여기며,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즐거워하며 사는 사람이 아닐까요?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들과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감사하면서 잠이 들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오늘은 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설레면서 잠이 깬다면, 매일매일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의 기분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에도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겪는 어려움 정도로 생각하며 지나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2018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 한 해도 우리에게 어떠한 인연과 만남이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한 해를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ps. 너무 힘들어서 영국 사역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찰나, 그 영국교회에서 부목사님이 대신 주일 설교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다 마치고 “오늘 예배를 마쳤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단 아래로 내려가셨다가, 무슨 영문인지 다시 단 위로 올라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직 예배를 마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자기가 ’Stranger in the world’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아니면 무슨 일로 이 낯선 곳에 왔는지 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힘들어 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백 명 정도의 성도들이 함께 있던 예배당에서 저는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꼭 저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던 것이죠. 여전히 세상 속의 나그네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꽃길임을 그때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