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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Sori/[사람] 소리이음

[소리가 만난 사람] 하나님이 부르신 그때, 그곳에서 자리를 지켰을 뿐_김용범(1)

[소리] 2017년 다섯번째 소리 - 10+1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 소리가 만난 사람 - 하나님이 부르신 그때, 그곳에서 자리를 지켰을 뿐 (1)

▷ 소리가 만난 사람 - 하나님이 부르신 그때, 그곳에서 자리를 지켰을 뿐 (2) 










<소리가 만난 사람>

하나님이 부르신 그때, 그곳에서 자리를 지켰을 뿐



김용범 ◆ 인하대 88




대부분의 IVF 학사들은 졸업 후 곳곳으로 흩어져 '세상속의 하나님 나라' 운동원으로 자기 역할을 감당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IVF 가까이에서 공동체를 직접적으로 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경인지방회 개척멤버로, 대학원 시절에는 활동학사로, 그리고 졸업 이후에는 지방회의 이사와 이사장으로,

IVF와 30여년을 함께해온 김용범 학사를 만났습니다. 








◆ 먼저 독자들에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인하대학교 88학번 김용범입니다. 비즈니스 컨설팅 일을 하고 있는데, ‘엑센츄어’라는 회사에서 17년 정도 근무했고, 작년에 ‘EY’라는 회사로 이직하여 9개월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비즈니스 컨설팅이란, 기업체가 가지는 어려움이나 문제점, 업무상에서의 애로사항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생산성을 높이도록 가이드하거나 IT 같은 시스템의 도입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주로 맡았던 일은 서플라이체인, 즉 ‘공급망’이라고 이야기 하는데요, 국내 물류 R&D 구매 사이드의 컨설팅 부분입니다. 지금도 ‘서플라이체인 오퍼레이션(SC&O)’이라는 조직의 리드를 맡고 있습니다. 


가족으로는 가톨릭 대학교(옛날 성심여대) 91학번인 아내와 고3 아들, 중3 딸이 있습니다. 제대하자마자 참석했던 ‘평생동역자 수련회’에서 같은 조의 조장이었던 아내를 만났습니다. 대학교 4학년부터 교제를 시작해서 3년 반 후에 결혼했죠. 아내는 지금 전업주부로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고요, 두 아이는 다행히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건강하게 잘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 인하대학교 IVF의 개척멤버이자 대표였다고 들었습니다. 

IVF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개척 당시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인하대 IVF와의 만남은 어떻게 보면 우연이고, 어떻게 보면 필연이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 인하대학교 선배가 있었어요. 그 형이 IVF를 하고 있었죠. 형은 87학번이었고 당시 2학년이었는데, 혼자서 ‘지부개척 연합모임’에 나가고 있었습니다. 형은 겨울수련회를 다녀와서 IVF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교회의 후배였던 제가 눈에 띄었다고 해요. 그렇게 형의 제안으로 IVF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종교서클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큰 거부감은 없었어요. 미션스쿨은 아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선생님들과 예배를 드리곤 했거든요. 


그때부터 몇몇 친구들과 함께 지부개척 연합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지부개척 연합모임에는 총신대, 인하대, 한양대, 수원대, 아주대 등이 참여했어요. ‘사랑의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 LGM을 했는데, 김상훈 목사님의 말씀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분이 폴라 티를 자주 입으셨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그러면서 학교에 소그룹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2학년이었던 그 선배가 리더를 했고, 밑으로 저와 한성식, 최성민, 송현식이라는 친구들이 함께했어요. 몇 명 되지는 않았지만 DPM도 시작했죠. 따로 동아리방이 있었던 게 아니라서 그냥 잔디밭에 앉아 기도모임을 하곤 했어요. 여름 수련회에는 7~8명 정도 참석했던 것 같고요.  


초기에는 몇 명 없다 보니까 재미가 없었어요. 공동체성도 잘 생기지 않았죠. 그래서 1학년 때는 자주 피하거나 도망 다녔습니다(웃음). 학교가 있는 인천에서부터 강남까지 지부개척 연합모임에 참석하려고 오가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결국 1학년 겨울방학 때 겨울수련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보통 겨울수련회에 참석해야 멤버십이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겨울수련회를 안 갔으니 공동체를 안 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죠. 하지만 신기하게도 방학 중 모임에는 열심히 참석했어요. 겨울수련회에 가지 않았던 일이 미안했던 것 같아요(웃음). 잠시의 반항이었습니다. 저는 혼자서도 QT는 계속 훈련했었는데, 방학 때 모임에서 PBS 훈련도 하고 말씀도 보면서 그때부터 열심히 했던 것 같네요. 


사실 개척 당시에 어려움이 참 많았어요. 동아리로 인정받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죠. 모임방이 없어서 전전하기도 했고요. 공간만 생기면 들어가서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당시 학교 바깥에 가건물을 지어놓은 곳이 있었는데, 꽹과리를 치는 등 소음을 많이 일으키는 동아리의 공간을 분리하는 장소였다고 해요. 다른 동아리들은 그 가건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학교와 실랑이를 벌이는 타이밍에 방이 하나 비었고 그 틈에 우리가 들어가 6개월 간 눌러앉았어요. 나중에 동아리 등록 신청에 실패하면서 방에서 쫓겨나게 됐죠. 돌아다니면서 다른 공간을 찾다가 8층 시계탑의 꼭대기를 발견했어요. 원래는 비둘기들이 사는 곳이었고 지붕도 없었죠. 그곳에 토목공학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널빤지와 판넬로 지붕을 만들어 지내곤 했어요. 기독교 동아리에 관심을 가진 교수님들이 보시고는 위험하다며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 인하대 지부는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도권에서도 아주 활발한 지부로 성장했는데, 

개척멤버들의 자발성과 헌신이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학사님도 대학원에 진학해서 활동학사를 하셨다고요.


저에게 IVF를 제안했던 선배는 “나는 전공을 포기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헌신했어요. 그래서 모임이 생겨날 수 있었고, 모임은 역시 학생자발성에 의해 지속되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2학년이 됐을 때 1학년이 들어왔는데 리더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2학년 1학기부터 BBS 리더를 맡게 되었어요. 스스로 공부하고 준비해야 했기에 정말 많이 배우고 성숙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3학년이 되었을 때쯤부터 공동체가 탄탄해지면서 성장을 많이 했습니다. 89학번 후배들과도 끈끈해졌고, 그들이 들어오면서 공동체 분위기도 좋아졌어요. 수적으로는 97년도 이후에 많이 성장했던 것 같아요. 


인하대 IVF는 간사님들이 개척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모임에 참석하면서 시작됐어요. 1학년 때는 지부에 간사님이 안 계신 채로 지부개척 연합모임에 나갔던 것이고요. 이후에도 간사님들이 몇 분 계시긴 했지만 겸임을 하거나 신입간사훈련 등으로 자리를 비우실 때가 많았거든요. 제가 대표를 했던 시기도 간사님이 없는 시기였어요. 한 학기동안 휴학을 하고 대표로 섬기게 됐죠. 이후에 군대를 다녀왔는데, 돌아왔을 때도 간사님이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한 최진원 학사가 활동학사로 섬겼고, 이후에는 제가 대학원에 진학해서 활동학사를 이어갔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 이유 중에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도 절반정도 작용한 것 같아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활동학사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학부 때는 공부를 못해도 티가 별로 안 나는 편인데 대학원 공부는 그렇지가 않거든요. 학생도 얼마 없는데다가 수업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교수님들이 엄청 야단을 치셨어요. 한번은 발표를 하고 있는데 “니가 대학원생이야!? 니가 하는 소리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하며 화를 내신 적도 있어요. 대학원에서는 수업 때마다 준비와 발표가 필요했고, 때문에 수업 때마다 안 좋은 소리를 들어서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돌아보면 참 감사해요. 사실 인하대에서 IVF 운동을 시작한 것은 저와 그 선배가 처음이 아니었어요. 그보다 5년 전, 10년 전에도 그 운동을 해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제가 있었을 때에 와서야 공동체가 세워지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저 하나님이 생각하신 타이밍에 제가 거기에 있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내가 다른 대학교에 입학했다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거기서도 IVF를 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또 그랬다면 제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해요(웃음). 제가 인하대 IVF에 있을 수 있어 감사하죠.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 이후에 경인지방회가 만들어지면서 이사로 참여하게 되셨습니다. 

지금까지 이사장으로 섬기고 계신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경인지방회는 원래 남서울지방회 소속이었어요. 졸업 이후에는 남서울 학사모임에 참여했고 남서울이사회에도 이사로 소속되어 있었죠. 그러다가 2002년도에 경인지방회로 독립을 하게 되었어요. 따로 떨어져 나오는 것에 두려움은 있었지만 독립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리상으로도 남서울은 상당히 먼 곳이었고 대부분의 학사와 간사들도 자연스럽게 독립을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당시 이미순 간사님이 지부가 독립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독립을 하면서 회관도 구매했는데, 필요한 재정의 절반 이상을 남서울지방회와 이미순 간사님의 지인들이 부담해주셨습니다. 정말로 감사하죠.


지방회가 독립을 하면서 저는 독립된 지부의 이사장이 되었습니다. 지방회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나이 많은 학사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이사회에 나가고 이사장을 맡고 있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얼마 전, 교회 주보에 올라온 한 청년의 글을 본 적이 있어요. IVF라는 선교단체를 소개 받아서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어 감사하다는 글이었는데, 이 청년이 우리 아들이었으면 좋겠더라고요. 제가 이사회에서 섬김으로 다른 사람의 아이들을 돕는 것처럼, 다른 누군가의 헌신을 통해 우리 아이들도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캠퍼스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간사님들은 나를 대신해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했어야 하는 일, 우리 모두가 했어야 하는 일을 그들이 대신해서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간사님들을 후원하고 돕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현재의 이사회는 세대교체가 많이 된 편이에요. 6~7년 전까지만 해도 매번 보던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나이가 어리고 잘 모르는 학사들도 많이 있어요. 그 친구들과는 학교 다닐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새롭게 만나 교제하는 셈이죠. 이사회는 1년에 서너 번 정도 모이고 주로 토요일 아침에 만납니다. 1시간 정도는 사역보고를 하고, 1시간 정도는 삶을 나누며 서로를 깊이 알아가며 친해지는 시간을 갖고 있어요. 경인지방회는 이사들이 헌신과 후원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전체 후원의 16%를 이사들이 담당하고 있어요. 굉장히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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